재밋섬 건물 매입 승인한 제주도, 입장 밝혀야
감사 결과만 기다리는 수동적 태도 지양해야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 "가정을 전제해서 답변할 수 없다" 말하는 사람들
일부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가정을 전제해서 답변할 수 없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것으로 보이는 사실에 대한 의견을 묻는 말에 대한 답이다.
‘만약’을 묻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만약 제주도민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의회에서 예산 반영에 반대 뜻을 표출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 ‘정부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을 시 사업은 중단되는가?’ 등등.
하지만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라면,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이라면 “답변할 수 없다”는 말은 “책임지지 않겠다”라는 말과 같다.
언젠가 미디어를 통해 ‘쿨하다’라는 말이 유행을 탄 적이 있다. ‘쿨하다’라는 말은 타인에게 무관심한 듯한 태도로 말을 길게 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명하지 않는 이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쿨하다'는 말이 가진 긍정적인 의미보다, '무미건조한 태도로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다'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많다.
예를 들면,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이 공항에서 수행원을 쳐다보지 않고 캐리어를 밀어 전달하는 영상을 본 누리꾼들이 "쿨하다"라고 말하는 경우다.
이러한 경우 '쿨함'이란, 타인의 시선과 말에 개의치 않고 멋대로 행동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쿨한’ 태도가 유행을 탄 탓일까.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이들이, 쿨하면 안될 상황에서 ‘쿨한’ 태도를 보인다.
지난 9월 7일, 도정 질문 자리에서는 카지노 대형화와 규제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제주도내 기존 카지노 사업장들이 최초 허가면적에 비해 사업장 면적을 2배 가까이 늘린 것으로 확인되면서, 제도적 조치가 없다면 카지노 대형화가 지속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이상봉 의원(더불어민주당, 노형동 을)은 원희룡 제주도지사를 향해 “카지노 대형화 규제를 위한 법 개정이 가능하다면, 조례 개정을 하겠느냐”라고 질의했다.
하지만 원희룡 지사는 “가정을 전제로 한 답변은 하지 않겠다”라며 끝내 즉답을 피했다. 원 지사는 영리병원 공론화 문제를 지적하는 의원의 질의에도 같은 말로 답을 회피했다.
의원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가정을 전제로 한 답변은 하지 않겠다”라는 한 마디로 해결해버리는 마이웨이(My way)식 쿨함이다.
# 재밋섬 건물 매입 승인한 제주도, 입장 밝힐 의무 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추진 중인 재밋섬 건물 매입에 대해서도 도의 입장은 참으로 ‘쿨’하다.
<미디어제주>는 지난 9월 27일 조상범 문화체육대외협력국장과 만나 그의 의견을 물었다. 전임 국장의 전결로 집행된 내용이므로 신임 국장의 의견도 매우 중요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기자는 물었다. “만약 재단의 신임 이사장이 사업 추진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조상범 문화체육대외협력국장은 “가정을 전제한 질문엔 답이 곤란하다”라는 의사를 밝혔다. 원 지사과 같은 쿨함이다.
한편, 의회는 “사업을 원점에서 전면 검토하라”면서 부정적인 태도다.
이런 와중에 도에서 승인한 113억 예산으로는 재밋섬 건물 매입의 부가세 비용이 모자라다. 부가세까지 납부를 완료하려면 추가경정예산심사를 통해 모자란 돈을 받아야 하는데, 의회가 그리 쉽게 통과시켜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재단의 재밋섬 건물 매입 건에 대해서는 책임자들의 의지가 감사위원회의 감사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재단의 재밋섬 건물 매입 과정에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국장 본인은 건물 매입을 찬성하는 입장인지 등을 묻자 조 국장은 “도의회 회의 때 답변한 내용과 같다”라는 말로 일관했다.
수많은 질문에 한결같이 "의회에서 밝혔던 것들이 입장의 전부다"라고 답하는 그.
기자는 조 국장의 생각을 듣고자 재차 질문했지만, 돌아온 답은 '첫 만남부터 다소 부담스러운 질문'이라는 말이었다.
이는 기자가 조 국장과 안면이 없는 사이에서, 처음으로 대면하는 자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 만난다고 해서 기자가 그를 상대로 질의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의혹이 있다면 언론사 기자가 아니더라도, 도민 누구나 질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뉴스 인터뷰에서 최악의 답변은 ‘노코멘트’다. 떳떳하다면 노토멘트라고 하지 않고 질문에 답했을 것이다.
대담 도중에 이야기의 흐름이 거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빠져나올 수 없는 경우라면, 이때 해결책은 솔직해지는 것이다” -래리 킹(Larrt King)
미국의 유명 앵커 래리 킹은 자신의 저서 ‘대화의 신’을 통해 이같이 말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사업을 추진하는 주체 혹은 관계자가 추진 배경과 과정에 자신이 있다면, 관련 질의에 답을 피할 필요가 없다.
책임자가 답을 피한다는 것은, 책임을 피하겠다는 의지 표출과도 같은 것이다.
제주도와 재단이 강력하게 추진 의사를 밝히며 강행한 만큼, 제기되는 많은 의혹과 문제를 해소해야 하는 책임도 이들에게 있다. “가정을 전제한 질문이기에, 답할 수 없다”, 혹은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가정을 전제한 질문이더라도 합리적이고, 현실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내용이라면 이에 대해 고민하고 답할 의무가 그에겐 있다.
지난 10월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에서 야당 의원이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가정’을 전제로 한 질의를 했다.
만약 핵폐기 없는 종전선언이 이뤄질 시, 북한이 도발할 경우 유엔군과 미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을 우려하는 질문이었다.
이에 이낙연 국무총리는 “가정을 전제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북한의 도발이 있다면 이전의 합의는 당연히 무효화됩니다. 다만 미북 간 협상에 대해 양 정상이 큰 신뢰와 기대를 표명하고 있어 희망을 갖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이라는 가정이지만, 북한의 도발이 이뤄지면 합의를 무효로 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그들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질문에 모두 답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도민들의 우려가 존재하고, 합리적인 문제 제기로 탄생한 질문이라면, 이것은 더이상 ‘전제를 가장한 질문’이 아니다. 소중한 국민의 ‘목소리’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의 위치, 자리에 있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목소리’에 답해야 한다. 추가 질문을 막는 '노코멘트'로 책임감 없는 ‘쿨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