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 사업’ 참가자 고진숙

나는 모태 스포츠팬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가난해서 TV가 없었다. 아버지께선 늘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축구중계를 들으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어린 나도 이불을 움켜쥐고 찌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들려오는 축구중계를 듣고 있었다. 4-1로 경기가 끝나기 직전, 차범근 선수가 5분에 세 골을 넣어 극적인 동점을 만들어내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스포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빚을 다 갚으신 아버지께선 TV를 사셨다. 라디오 중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다양한 세계가 펼쳐졌다. 매우 어려운 룰을 가진 스포츠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가령 테니스라거나 야구라거나. 나는 야구광이 되었다.

외로운 시골 중학교 여학생이었던 나는 야구, 팝음악, 책에서 위안을 얻었다. 사춘기의 열병들이 훑고 지나간 후 언제나 나를 지탱해주던 든든한 친구였다. 그 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야구전문 기자였다.

야구를 좋아하면 저녁이 있는 삶이 된다. 고된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난 후 야구 중계를 켜놓는다.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면서 귀로 듣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TV 앞에 앉는다. 야구는 스포츠라기보다는 마치 무협 세계와 같아서 한 합을 겨루는 고수들처럼 공 하나를 두고 투수와 타자가 서로를 응시한다. 세상이 정지하고 숨도 못 쉬는 찰나의 순간. 타자의 타율이 어쩌고 투수의 방어율이 어쩌고 하는 확률이 인간의 의지에 의해 깨진다. 동시에 하루 종일 머릿속에 쌓아놓은 삶의 쓰레기들이 말끔히 비워진다.

어느 날인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야구가 멀어져갔다. 경기 스코어만 확인하고 말기도 했고 포스트 시즌만 챙겨보기도 했다.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야구가 완전히 내 삶에서 떠났다. 사랑에도 이유가 없지만 이별에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저녁이 사라졌다. 텅 빈 동굴이 저녁마다 찾아왔고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시시한 시작’을 참가하기 시작했다.

올해 여름 초입, 종달리 소심한책방에서 열린 ‘2025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프로그램의 시 창작 모임 ‘시시한 시작’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아는 작가가 진행한다는 것과 집에서 가깝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마 어느 하나라도 아니었다면 결코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에서 동쪽 마을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소외된 곳이다. 작고 조용한 마을에 작은 책방이 생겼는데 처음엔 이름 그대로 소심해서 주인이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동쪽 마을에서 작은 책방이란 관광객이나 외지인을 위한 곳이었다. 나 또한 책방을 갈 때는 마치 머나먼 이국의 마을을 어슬렁거리다 골목에서 발견한 노란 불빛을 따라가는 관광객 모드가 되곤 했었다. 그런 책방에서 시 수업이라니!

시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저녁이 다시 찾아왔다. 시를 읽고 시를 쓰고 시를 생각하는 순간이 너무도 즐거웠다. 아무리 고된 일상을 보냈더라도, 마음을 휘젓는 일들을 겪은 후라도 ‘그래 내겐 시가 있지’ 하게 되곤 했다. 텅 비었던 순간들을 시가 채워갔다.

시와는 거리가 있는 삶이었고, 시를 쓴다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었는데 마치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만나게 되는 작은 책방처럼 시가 내 앞에 있었다. 그리고 내 삶을 다독여주었다. 시란 게 이런 거구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거구나, 싶었다.

작은 책방답게 작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시 수업이 이뤄졌다. 문우, 시우들은 나와는 전혀 달랐다. 고된 일상을 마치고 아주 먼 곳에서 오랜 시간 운전해서 왔다. 처음엔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제주시엔 훨씬 많은 기회가 있는데 이름 그대로 제주 동쪽 끝 마을 종달까지 헐레벌떡 달려오는 그들이 신기했다.

수업을 하면서, 시우들의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를 쓰지 않으면 시로 써내지 않으면 안 되는 내면이란 게 있었다.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처절하게 단어를 벼려내었다. 물론 처음 써보는 시였으니 우리 모두의 시는 엉성했다. 그래도 수업을 이끄는 허은실 시인은 내면의 입구에서 서성이는 우리들에게 등불을 비춰줬다. 수업의 끝 무렵 우리가 도달한 곳은 그곳이었다. 나의 입구.

이런 수업이 공짜라니. 대한민국 정말 엄청난 나라구나 싶었다. 도로나 건물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세금을 쓰는 나라라니. 세금 낸 보람이 있었다.

첫 시 수업을 하던 날 여름이 시작되었는데 시 수업이 끝나니 거짓말처럼 이른 겨울이 찾아왔다. 그래도 이번 겨울은 좀 다를 듯하다. 프레드릭처럼 여름내 성실하게 색을 모았으니 말이다. 허은실 시인, 소심한 책방, 시우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제주 섬 동쪽 끝자락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마을에 있는 ‘소심한책방’. /사진='소심한책방'
제주 섬 동쪽 끝자락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마을에 있는 ‘소심한책방’. /사진='소심한책방'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 사업’ 참여 후기 공모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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