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예수살이공동체 안동평화순례단 강소진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예수살이공동체 주관으로 11월14일부터 16일까지 “안동평화순례”가 있었다. 참가자 15명은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안동을 순례하며 평화에 대해 고민했다. 그 일정 중에 문상길 중위 생가 방문이 있었다.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같은 해 4월 3일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봉기가 있었고 평화로운 해결을 보려던 이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새로 취임한 연대장 박진경은 30만 제주도민을 모두 죽여도 좋다고 강경 진압을 예고했고 이에 항명한 부하들이 상사를 암살했다. 미군정과 정부의 강경진압 정책에 따라 제주도민을 빨갱이, 폭도로 매도했던 박진경은 이후 호국영웅으로 추대받아 추모비와 동상까지 세워졌다. 그러나 30만 제주도민의 목숨을 살린 이는 처형당했고, 그의 주변인들도 희생되었다. 그는 살인마,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잊혀야 했다.

그의 이름은 문상길. 당시 중위였다. 최근 '채상병 순직 사건' 이후 박정훈 대령에게 가해진 여러 현실을 보며 군 조직의 경직성과 살벌함을 새삼 느낀다. 문상길은 심지어 상사를 죽였고 그건 그도 밝혔듯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는 제주 사람이 아니었고 뜻을 같이 한 이들 중에도 제주 출신은 없었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며 제주의 아름다움 뒤에 숨은 이야기 4.3의 아픔을 알고 이해할수록 문상길 중위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마음의 빚도 커졌다.

문상길 중위의 고향, 안동을 찾다

문상길 중위, 그를 찾아 안동에 왔다. 그날은 11월 15일. 공교롭게도 을사늑약 체결일(11월 17일)이자,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내려져 제주를 산 지옥으로 만들었던 그 11월 17일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역사는 을씨년스러웠지만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아도 될까 싶게 하늘은 맑고 화창했다.

생가 앞에는 “안동 마령동 기와 까치구멍집”이라는 이름과 ‘문화재’라는 표지만 있을 뿐, 문상길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고 다른 설명도 없었다. 순례를 이끌던 길잡이는 여러 번 이 집을 방문 했지만 집주인을 만난 것은 처음이라며 집안으로 이끌었다. 주인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우선 앉아서 뭐라도 먹으라고 권했다.

안동평화순례단이 문상길 중위 생가의 현 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예수살이공동체
안동평화순례단이 문상길 중위 생가의 현 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예수살이공동체

주인장에게 물었다.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나요?”

“(이 집과) 이름이 같은 식당이 있어요. 그래서 헛제삿밥 파냐고 와요. 1년에 한 두 번은 헛 걸음해서 오는 사람이 있어요.”

“다른 사람은요?”

“없죠.”

“이 집을 구입하고 후에 문상길이란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떠셨나요?”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별 느낌은 없었어요. 다만 어떤 무거움 같은 게 있었죠.”

문상길 중위는 잊혔다. 주인장은 후배인 안상학이 집에 들어서며 드디어 문상길 중위의 집을 찾았다며 행복해 하던 웃음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안동 출신 시인 안상학은 4·3문학상 심사를 계기로 문 중위가 안동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까치구멍집의 현 주인도 집을 구입할 당시에는 문상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까치구멍집의 가치를 알아보았기에 제시된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내어 이곳을 샀다. 문상길 중위에 대해 잘 몰랐던 그들 덕분에 문상길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일까. 집주인은 곳곳을 보여주며 이 집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려주었다. 기와 아래 큰 구멍이 앞뒤로 나서 까치가 드나들 것만 같았다. 까치가 진짜 다니냐는 일행의 질문에 이젠 도망갔다고 주인장이 농을 던졌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문상길의 행적을 찾던 이와 생가의 현 주인이 선후배 사이였다는 것, 이 집이 임하댐 수몰로 사라질 뻔했다는 것. 문상길 중위가 알고 보니 종가집 장손이며 그가 살던 집은 300년 넘은 고택이라는 것. 까치구멍집이라는 희귀성 때문에 현 주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까지 모든 게 놀라웠다. 그토록 와 보고 싶던 문상길 중위의 생가에서 집주인까지 만났으니 꼬리에 꼬리를 물 듯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까치구멍집에서 발견한 의인의 결의

주인장의 안내에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 몇 점을 보여주다가 무심하게 방바닥에 있는 종이 꾸러미를 가리키고는 나가버렸다. 붓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흘겨 쓴데다 거친 필체에 줄 간격도 좁아 읽기 어려웠다. 문득, ‘그’ 라는 단어가 보였다. 혹시 ‘그’가 문상길이 아닐까?

긴 글에 적힌 ‘그’는 분명 문상길 중위였다. 일행의 도움으로 이 글이 안상학 시인이 문상길 중위를 세상 밖으로 끌어 올리며 발표했던 <기와 까치구멍 집> 시의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상사를 죽이기로 다짐했던 순간부터 생의 끝까지, 청년 문상길의 가슴에 흘렀던 결의가 거칠게 쏟아져 내렸다.

문상길 중위의 생가 내부에 펼쳐져 있는 글. ⓒ예수살이공동체
문상길 중위의 생가 내부에 펼쳐져 있는 글. ⓒ예수살이공동체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그 사이 하늘나라 법정에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

문상길 중위는 박진경 암살 사건 법정 최후 진술에서 담대하게 말했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합니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합니다.”

꽃다운 23살이었다.

기억한다는 것은 끝나지 않은 까닭

까치구멍집 아니 문상길 중위의 집을 떠나며 잠시나마 이곳을 뛰놀았을 그를 떠올렸다. 그의 조상들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상룡 일가와 함께 만주로 떠났던 것처럼 문상길도 해방 이후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어 제주로 떠났다. 그의 가슴 속에 흘렀던 독립운동가의 정신은 목숨을 걸고 제주도민 30만의 목숨을 살려냈다. 그 목숨 값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제주는 4.3을 넘어 평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가옥 전체에 풍기는 고즈넉함과 고요함이 쓸쓸했다.

문상길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이 집이 그저 문화재 혹은 헛제삿밥 식당과 같은 이름으로 기억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문상길 중위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의 후손들이 안동이 제주가 문상길과 의로운 이들의 이름을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

손님을 그냥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바구니 가득 과일을 담아 준 까치구멍집의 현 주인과 문상길 중위가 모르게 닮은 것 같았다. 발길을 옮기려다 용기 내어 감사를 전했다.

“저는 제주 사람입니다. 이 집을 사 주셔서 지켜주시고 유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갚으면서 살겠습니다.”

처음 우리를 맞았던 사람 좋은 미소로 주인장이 대답했다.

“있었어요. 시인이랬나, 소설가랬나 ‘김0울’이라고. 문상길 중위를 찾아왔다고 와서는 자신이 제주 출신이고 자기 조상도 4.3때 희생되었다고. 그런 사람이 찾아왔었어요. ”

그렇다. 기억한다는 것은 끝나지 않은 까닭이라고 했다. 찾아오고 기억하는 사람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까닭에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안동 마령동 기와 까치구멍집(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검바우길 28-3)”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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