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아의 독서평론] <34>
제주어 수필집 ⪡그릇제도 매기독닥⪢과 ⪡보리밥 곤밥 반지기밥⪢

1부
 1. 공동체의 윤리 안에서 끌어올린 말들의 생명력
 2. 유년 시절의 ‘고향땅 밟기’로 회귀하는 기억의 서사

2부
 3. 웃음과 침묵 속에 드러나는 삶의 진실
 4. 현대인의 일상에 스며든 제주어 수필
 5. 지역 문학 복원을 위한 김신자의 제주어 수필


3. 웃음과 침묵 속에 드러나는 삶의 진실

칼럼을 두 차례로 나누어 싣게 되면서, 이번 글은 지난 독서평론 “공동체의 윤리 안에서 끌어올린 말들의 생명력 및 유년 시절의 ‘고향땅 밟기’로 회귀하는 기억의 서사”에 이어 마무리를 짓는 2부의 내용이다.

김신자의 작품 속에는 장난스럽고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그 안에는 체면과 사랑, 억압과 자존심 같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그 웃음은 언제나 진솔함을 머금는다. 이는 삶의 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웃음이며, 그 웃음으로 삶을 견뎌온 이들의 리듬이다. 한 편의 유쾌한 수필을 읽고 난 뒤 마음에 남는 것은 그 웃음을 끝까지 지켜내며 우리에게 건네는 삶의 미소이다.

또한 그녀의 수필에서 가난은 결핍이나 불행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가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삶을 성실하게 꾸려가는 과정이며 시인을 성장하게 한 내적 원천이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김신자의 대표 수필들 ― ≪우리나라 국보 1호는 무신 거니?≫, ≪ᄉᆞ춘기 ᄉᆞ춘 성님 ᄇᆞᆯ그롱ᄒᆞᆫ 가심앓이≫, ≪곤밥 보리밥 반지기밥≫, ≪감저뻿데기광 경운기≫, ≪할망당에 간 돈 천원 봉갓수다≫ 등은 웃음과 침묵을 오가며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품고 있다. 그 안에서 제주어 특유의 입말 감각은 발효된 기억의 풍경과 어우러진다.

여기에서는 먼저 카니발레스크의 시선으로 웃음의 윤리를 담은 ≪우리나라 국보 1호는 무신 거니?⟫를 살펴보고, 이어 ≪ᄉᆞ춘기 ᄉᆞ춘 성님 ᄇᆞᆯ그롱ᄒᆞᆫ 가심앓이≫에서 청춘의 설렘과 반전의 미학을 짚어보고자 한다. 두 작품을 따라가며 김신자 수필이 어떻게 웃음과 침묵 사이에서 삶의 본질을 포착하는지, 그 문학적 결을 함께 읽어보려 한다.

1) 카니발레스크를 따라 웃음의 윤리를 묻다 - <우리나라 국보 1호는 무신 거니?>

수필 <우리나라 국보 1호는 무신 거니?>는 “시간이 지나민 석어부는 음식이 잇고, 발효뒈는 음식이 싯지양. 사름도 거자 비슴칙ᄒᆞᆫ 거 닮아마씀”이라는 비유적 문장에서 출발한다. 이는 삶의 시간성과 인간 존재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며, 곧 중학교 시절 한문 시간의 기억으로 전환된다. 현재의 성찰과 과거의 회상이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수필은 회고와 사유가 교차하는 구성으로 펼쳐진다.

회상의 중심에는 ‘불독’이라 불리던 한문 선생님과의 익살스러운 에피소드가 자리한다. 시험 다음 날, 한문 선생님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오더니 칠십 점도 못 받은 학생들을 줄줄이 앞으로 불러세운다. 아이들 마음은 ‘언제 내 이름 불릴지’ 조마조마해지고, 교실 안은 숨소리마저 줄어든다. 그런데 그 가운데 불려 나온 한 친구, 그 녀석의 답안지는 정말 기상천외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고사성어의 뜻을 묻는 문제에 뭐라고 썼는고 하면? “백 번 묻는 놈은 개만도 못하다”고 적었던 거다! 선생님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씩 웃더니 “이놈은 창의력은 좋네. 나가 벵다글락은 다 못허주만 반점은 주켜” 하며 억지로 칠십점을 쥐여주고 돌려보낸다. 아이들은 속으로 킥킥 웃고, 작가는 그 장면을 익살스럽게 살려내며 독자들에게 웃음보를 터뜨리게 한다.

이 수필은 현재의 독백과 과거의 회상이 너스레와 함께 오르락내리락하며 구성된다. 그러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세월이 훌쩍 지난 후, 그 친구와 다시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다. 너무 웃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스르르 따뜻해지는 이 수필은 제주말의 감칠맛과 작가 특유의 입말 감성이 만나 탄생한 ‘발효된 기억’의 한 토막이다.

어른이 된 뒤 노래방에서 다시 만난 그 친구, 이번엔 시험 대신 마이크를 들고 해프닝을 터뜨린다. 노래는 구슬프게 이어지는데, 친구의 ‘남대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한 화자는 정색하지 않고 슬며시 묻는다. “양수야, 우리나라 국보 1호가 무신 거니?” 그러자 친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남대문 아니냐게”라며 너스레로 받아친다. 이윽고 금새 눈치챘는지 슬쩍 남대문을 닫는다. 그 한마디에 빵 터지는 웃음 속엔, 세월이 흘러도 녹슬지 않는 우정의 온기가 배어 있다.

김신자 시인은 이 장면을 제주어 특유의 입말과 능청스러운 너스레로 천연덕스럽게 풀어내며, 무안함도 따뜻한 농담으로 감싸 안는다. “우리나라 국보 1호가 무신 거니?”라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정겹고 웃길 수 있다니, 그건 이 수필만의 마력이다. 독자는 어느새 웃음과 연민, 유쾌함과 따스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게 된다. 진짜 국보는 어쩌면, 저렇게도 오래된 친구 사이에 오가는 저 한 줄짜리 유쾌한 농담일지도 모르겠다.

이 장면은 바흐친이 ⪡바흐친의 산문학⪢에서 말한 카니발레스크의 핵심 정신, 즉 일상의 위계나 체면을 유쾌하게 뒤집으며 삶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웃음의 전복성을 잘 구현한 사례다. 권위 있는 존재가 조롱받고, 공적 언어가 유희로 바뀌며, 체면과 진지함의 질서가 뒤집히는 순간, 오히려 인간관계는 더욱 정직하고 평등한 자리로 나아간다.

분석자인 필자 역시 도서관 조용한 자리에서 그 대목을 읽다 히죽히죽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분석 내내 작가의 천연덕스런 위트와 재치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혼자 당황스러운 웃음을 억눌러야 했다. 김신자 시인 특유의 그 유머는 말의 결 안에서 자연스레 솟은 생활 감각이며 그것은 수필 곳곳의 양념처럼 정서의 탄력을 만들어낸다.

김신자의 수필이 지닌 문학적 강점은 말맛이 살아 있는 제주어 입말에 있다. 인물의 말투와 표정이 문장에 녹아들어서인지, 짧은 한 줄만으로도 장면이 또렷이 그려진다. 이처럼 그녀의 수필은 발효된 쉰다리처럼 곰삭은 인간관계를 하나의 일상적 해프닝으로 끌어올리며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유연한 사유를 지녔다.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적 웃음의 힘이란 잠시나마 삶의 일탈을 통해 오히려 더 진실하게 관계를 회복하는 언어의 방식이다. 이 수필에서처럼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관계를 품은 존재의 윤리로 발효되는 것이다.

2) 붉은 속내의와 볼 빨간 성님-⟪ᄉᆞ춘기 ᄉᆞ춘 성님 ᄇᆞᆯ그롱ᄒᆞᆫ 가심앓이⟫

봄맞이 정리라는 일상적 행위에서 출발한 작품 ⟪ᄉᆞ춘기 ᄉᆞ춘 성님 ᄇᆞᆯ그롱ᄒᆞᆫ 가심앓이⟫는 시간의 결을 따라 회상으로 미끄러지는 독특한 시점 전환을 보여준다. 수필은 현재 시점에서 ‘내의 한 벌’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곧 고등학생 시절 언니의 첫사랑에 얽힌 기억으로 이어진다. ‘내의’라는 사소한 사물이 매개가 되어 과거와 연결되는 이 흐름은 단일 시점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자연스럽게 교차시키며 서사의 생동감을 일으킨다.

“게난 우리 ᄉᆞ춘 성님은 그걸 붸려가난 영어선싱이 넘이 멋젼 가심팍이 ᄐᆞᆯ랑ᄐᆞᆯ랑ᄒᆞ기 시작헷수다”라는 문장은 사춘기의 설렘과 동경을 제주어 특유의 입말로 진솔하게 드러내며, 내면의 떨림을 따뜻하게 전달한다.

이 수필의 독특성은 후반부에 이르는 반전의 미학이다. 가슴앓이의 대상인 영어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 샤쓰를 입었다고 생각한 성님이 사실은 “왕자표 ᄇᆞᆯ그롱ᄒᆞᆫ 속내의”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는 사실은 이 수필의 클라이맥스이다. “이 오라방이 미쳐신가 ᄒᆞ멍 용심을 바락 내지커라렌양” 같은 대사는 인물의 심리 변화와 언니의 당혹감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면서도 수치와 설렘이 교차하는 젊은 날의 정서를 입체적으로 비춘다. 이 해프닝은 단순한 웃음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사춘기의 허기와 순수함이 어우러진 성장의 장면으로 기능한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오래도록 남는다는 사실은 수필문학이 지닌 ‘감정의 잔향’을 섬세하게 살려낸 방증이기도 하다.

또한, 이 수필은 구어체의 자유로운 호흡과 서술자-초점화자의 분리를 통해 독자와의 정서적 거리 조절을 탁월하게 수행한다. ‘나’는 관찰자이자 회상자이며, ‘ᄉᆞ춘 성님’의 경험을 통해 시대적 정서와 성장의 풍경을 함께 꺼내 보여주는 주체이다. 특히 “피아노 치는 소리가 음률 ᄒᆞ나ᄒᆞ나에 이녁의 ᄆᆞ음을 짓두디리멍...”과 같은 문장은 음악의 감각을 통해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며 섬세한 묘사를 가능케 한다. 수필의 유머와 반전은 정서의 환기 효과를 준다. 결국 “내의 한 벌을 데끼지 못하는” 현재의 ‘나’의 서사와 ‘사춘기 언니의 가슴앓이’라는 과거의 서사가 하나로 수렴되면서 액자구조의 플롯을 완성하며 수필의 멋을 자아낸다.
 

4. 현대인의 일상에 스며든 제주어 수필

김신자의 수필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 한복판에 제주어가 스며 있다. 정리와 소비, 갈등과 성찰 같은 도시적 삶의 문제들이 그녀의 손끝에서 제주어 말씨로 번역될 때 그 언어는 더 이상 지역어가 아니라 내면의 떨림과 윤리 존재의 방식이 된다. 이 수필들은 그 언어의 숨결을 따라 현대인의 내면과 관계 그리고 기억의 풍경을 제주어의 결로 다정히 어루만진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녀의 제주어 수필이 지금 여기 현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미니멀 라이프>, <관계를 맺는다는 건>, <층간소음도 셍각ᄒᆞ기 나름이우다>, <수저론>, <체얌으로 팔아본 당근마켓의 온도>, <관계를 맺는다는 것> 등 도시의 생활과 심리적 거리, 소비 감각, 갈등을 제주어라는 따뜻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김신자 시인의 수필에는 유년기부터 청소년기, 성년기에 이르는 삶의 조각들이 고르게 스며 있다. 그중에서도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청소년기 이후의 독자들이 깊이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글은 관계 맺기에 대한 섬세한 성찰의 언어이며, 특히 제주어라는 말씨에 깃든 정서의 떨림과 관조의 시선은 ‘관계 맺기’라는 주제를 말과 삶의 결 속에서 되새기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수필은 세대 간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함께 읽고 사유할 수 있는 제주어 수필문학의 현재성을 품고 있다.

여기에서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수필 전문을 중심으로 김신자 수필문학의 문학성과 언어미학을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관계와 정서, 그리고 제주어라는 언어의 촉감이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 조응하며 문학적 사유로 확장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작품이 지닌 정서적 울림과 존재론적 깊이를 함께 성찰해보고자 한다.

분석 텍스트 – 김신자, ⪡보리밥 곤밥 반지기밥⪢, <관계를 맺는다는 것>

‘난 그때 아무것도 이해ᄒᆞᆯ 중 몰란게. 말이 아니라 행동을 봥 판단헤사 헤신디, 그 꼿은 날 향기롭게 ᄒᆞ고, 빗나게 헤서. 절대 도망가지 말아사 헷던 건디, 알아ᄎᆞᆯ려먹어사 ᄒᆞ여신디. 꼿덜은 넘이 모순적이라. 경ᄒᆞ주만 난 너미 두련 그 꼿을 ᄉᆞ랑ᄒᆞᆯ 중 몰라서.’ (어린 왕자 중에서)
생략
거실 ᄒᆞᆫ 구석텡이, 족은 산삼 고무낭은 나광 ᄒᆞᆫ디 지낸 게 어느똥안이 헷수로 16년이 지낫다. 물만 주민 무정ᄒᆞ게 잘 자란다. 왕초보가 헤마다 가지치기를 잘 못ᄒᆞ난산지 ᄒᆞᆫ 펜더레 휘어지곡 ᄌᆞᆫ가젱이덜이 들쭉날쭉이라도 ᄒᆞ건 살아보젠 ᄌᆞᆫ뿔리덜을 베꼇더레 벋으멍 고맙게도 잘 커주엇다. 그나마 너미 ᄒᆞᆫ펜착더레만 벋언 더 지레가 크지 안ᄒᆞ게끔 가젱일 ᄌᆞᆯ라줄 적마다 나 ᄆᆞ심은 잘도 아팟다. 고무낭이난 가젱일 ᄌᆞᆯ라가민 히양ᄒᆞᆫ 고무 진액이 나오는디 ᄎᆞᆷ말 히양ᄒᆞᆫ 피가 흘르는 거 닮앙 ᄃᆞᆨᄉᆞᆯ이 돋은다. 고무진액도 하영 나온다.

낭을 집 안이서 잘 키우젱ᄒᆞ민 벳도 들어사 ᄒᆞ고, 물도 잘 맞촹 줘사 ᄒᆞᆫ다. 또시 트멍트멍 창문도 ᄋᆢᆯ앙 ᄇᆞ름도 맞촤줘사 ᄒᆞ는디 공들이는 게 경 쉽들 안ᄒᆞᆫ다.
집안에 감옥살이추룩 딱 가두와졍으네 오전에만 드는 벳을 맞으멍, 좁짝ᄒᆞᆫ 화분이서 뿔리를 ᄂᆞ리는 게 얼메나 ᄀᆞᆸᄀᆞᆸᄒᆞᆫ 일인가.
셍각ᄒᆞ민 야네덜토 주연 잘못 만난 고생헴구나 ᄒᆞ는 셍각이 든다. 경헤도 나신딘 느량 행복을 주고 활력을 준다. 살아가는 게 버치고 느랏ᄒᆞ여져가민 야네덜은 나 ᄆᆞ심을 아는 고라 어느똥안이 꼿도 피우곡, 지레도 막 커 가멍 저울에 ᄃᆞᆯ아볼 수 엇인 천금ᄀᆞᇀ은 ᄉᆞ랑을 벤ᄒᆞᆷ엇이 나신디 준다.
그추룩 우리집 거실 ᄀᆞ득 푸리롱ᄒᆞ게 소곤닥거린다.

-김신자, ⪡보리밥 곤밥 반지기밥⪢, 〈관계를 맺는다는 것〉 부분

 1) 관계를 따라 움직이는 플롯 전개와 시점의 리듬

김신자 수필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한 인물이 식물과 관계를 맺어가는 확장적 과정의 서사적 플롯을 따르고 있다. 이 과정은 시점의 리듬과 정서의 밀도를 통해 타자와 공존하는 삶의 가능성을 천천히 펼쳐 보인다. 수필은 ⪡어린 왕자⪢의 인용을 출발점 삼아, 고무나무와 함께 살아온 시간을 조용히 되짚으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내면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플롯구성과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본다.

① 관계의 본질 – 느끼고 감당하는 일
→ ⪡어린 왕자⪢ 속 장미꽃의 말을 인용하며, 화자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관계를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해보다 감응이 먼저이고, 그 감응은 책임과 기다림을 동반한다.

② 처음의 무지 – 이름도 모르는 존재들
→ 거실 한쪽, 이름조차 몰랐던 화초들과 마주한 화자는 점차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식물들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관계의 시작은 이름 짓기이며, 이는 존재를 향한 첫 인식의 행위다.

③ 시간과 돌봄 – 길들여지는 마음
→ 물을 주고 가지를 치며 화자는 자신이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이 길들여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반복되는 돌봄은 신뢰를 쌓아가며, 관계의 감각을 정교하게 해준다.

④ 생명 감응 – 고무진액과 마음의 통증
→ 고무낭의 가지를 자를 때 흘러나온 진액을 ‘히양ᄒᆞᆫ 피’로 비유하며, 화자는 식물의 상처를 자신의 아픔처럼 느낀다. 이 감응의 순간은 초점화자의 자리를 드러낸다.

⑤ 이름의 변화 – ‘야네덜’이 되는 존재
→ 처음엔 ‘그것’이었던 고무낭이 이제는 ‘야네덜’이라 불린다. 이는 식물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며 상호주체적 인식으로 나아간 전환의 순간이다.

⑥ 삶의 윤리로 확장된 관계
→ 고무낭이 놓인 거실은 일상의 공간을 넘어 관계의 리듬이 살아 숨쉬는 감정의 무대가 된다. 식물을 돌보는 행위는 타자를 돌보는 마음의 훈련이자, 윤리의 감각을 키워내는 문학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 수필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능성을 따뜻하게 품어낸다. 감응하는 눈과 성찰하는 말, 두 개의 시선이 한 인물 안에 공존하면서 관계 맺기의 윤리가 시점의 리듬을 따라 서서히 드러난다. 화자인 ‘나’는 현재 고무낭을 바라보는 존재이자, 그 식물과 16년을 함께 살아낸 기억의 주체이다. 초점화자는 감각과 정서로 반응하고, 서술자는 그 반응을 언어로 가다듬으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예컨대 고무낭의 가지를 자를 때 “ᄆᆞ심은 잘도 아팟다”는 고백은 감정의 직접적인 표출이자 초점화자의 자리다. 하지만 “히양ᄒᆞᆫ 피가 흐르는 거 닮앙”이라는 묘사는 감각이 사유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감응과 성찰이 밀고 당기며 교차하는 흐름은, 관계라는 것이 단일한 시선이 아니라 겹쳐지는 시선들 속에서 성립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수필 서두에 삽입된 ⪡어린 왕자⪢의 장미꽃과의 대화는 이러한 시점 구조를 확장시킨다. “도망가지 말아야 했던 건데, 알아ᄎᆞᆯ려먹어사 ᄒᆞ여신디”라는 문장은 관계의 책임과 오해, 그리고 감정의 누적을 되짚게 하며 고무낭과의 서사를 우화적 시선으로 비춘다. 외부 텍스트와 내부 경험이 이중액자처럼 포개지는 이 구조는 단일한 체험을 보편적 관계의 성찰로 확장시킨다.

2) 고무낭과 함께 살아낸 시간의 물활론적 상상력과 상호주체성

이 수필의 주체적 상징물 ‘고무낭’은 이름도 모르고 무심히 바라보던 대상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 존재는 점차 ‘그것’에서 ‘너’, 그리고 마침내 ‘야네덜’로 호명되기에 이른다. 이 호명의 변화는 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며 타자화의 진전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작가는 고무낭을 향한 관찰의 시선 속에서 서로 소통하는 내면적 관계를 맺는다. 이후 고무낭은 “나의 마음을 아는 고라”, “삶의 빗을 환하게 밝혀주는 존재”로 격상된다.

예컨대 “가젱일 ᄌᆞᆯ라줄 적마다 나 ᄆᆞ심은 잘도 아팟다”, “히양ᄒᆞᆫ 고무 진액이 나오는디, ᄃᆞᆨᄉᆞᆯ이 돋은다”는 표현은 고무낭의 상처를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내면 반응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대상을 인격화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물활론적 상상력의 발현 지점이다. 이처럼 작가는 사물에 감정을 투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물과 반복된 교류 속에서 생명적 공명을 나눈다. 여기서 ‘야네덜’이라는 호명은 상징적 정점이라 볼 수 있다. 사람을 지칭하는 말을 식물로 적용함으로써 그녀는 인간과 식물의 경계를 허무는 상호주체적 인식의 전이를 완성한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관찰의 시선 → 이름 부여 → 반복적 돌봄 → 감정의 교류 → 주체 인식의 전이 → ‘야네덜’이라는 인격화 → 존재의 공존과 회복

이러한 관계 맺기 플롯은 수필 전체의 서사적 골격을 이룬다. 특히 도입부에 인용된 ⪡어린 왕자⪢의 문장은 이 구조를 단단히 받쳐준다. “절대 도망가지 말아야 했던 존재”라는 말은 고무낭이 화자에게 내면의 약속이자 책임의 주체로 다가온다는 점을 암시하며 사랑 속에서 길들여지는 존재 간의 윤리를 담고 있다.

결국, 고무낭이 ‘야네덜’로 불리는 순간 그 호명은 존중과 동행의 언어가 된다. 타자는 내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존재이며 관계를 통해 내 삶의 윤리를 함께 짓는 동반자가 된다. 고무낭을 향한 마음의 결은 차곡차곡 감응을 축적해가며, 관계 안에서 움트는 윤리적 감수성을 작가는 정겹고 서정적인 입말로 풀어낸다.

3) 제주어 입말의 감각

수필의 언어는 단지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정서를 감각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제주어의 입말은 관계의 결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내면의 리듬을 실어 나른다. “ᄆᆞ음광 시간이 그디에 오고셍이 기대영 앚아가난”, “피 닮앙 ᄃᆞᆨᄉᆞᆯ이 돋은다”와 같은 표현은 제주어 특유의 어조와 억양, 속도감으로 감정의 미묘한 떨림을 표현해낸다.

“삶이 버치고 느랏ᄒᆞ여져가민 야네덜은 나 ᄆᆞ심을 아는 고라”는 문장은 속도, 정서, 관계가 동시에 발현되는 언어적 정점이다. 제주어는 이처럼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며, 존재의 상태 자체를 언어로 품는다. 김신자의 수필은 지역어가 문학적 정서와 철학을 어떻게 담아내는지를 증명하는 실천적 예이다.

4) 고무낭과 함께 빚어낸 관계의 서사

고무낭이 놓인 거실 한편 그곳은 관계가 자라고 기억이 누적되는, 말하자면 하나의 서사적 공간이다. 아침 햇살이 들고 바람이 스며들고 물을 주는 손길이 오가는 반복 속에서 이 공간은 어느새 삶의 리듬과 마음의 결이 쌓여가는 장소가 된다. 바흐친의 개념을 빌리자면 이 수필은 ‘시간’과 ‘공간’이 인물의 존재와 내적인 정서에 얽히는 ‘크로노토프’로 구성되어 있다. 거실이라는 장소는 고무낭과 ‘나’의 관계가 성장하는 시간이 누적된 무대이며 동시에 그 시간이 감지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공간은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변화하고 확장된다. 매일 물주기와 가지치기,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추는 일상적 동작은 단조롭지만 그 안에 ‘관계의 리듬’이 자리한다. 수필 속 화자는 이 리듬을 따라가며 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다. 고무낭의 가지가 자랄 때마다 그리고 그 가지를 자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마음의 떨림은 단지 생물학적 성장의 기록이 아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응축되어 빚어낸 정서의 결정체다. 공간은 그 정서를 품고 마침내 감각화된다. 좁은 화분 안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의 생애는 거실의 일상을 하나의 생명 이야기로 바꾸어놓으며 관계 맺기의 감응을 독자의 내면에 심어준다.

이 수필의 시공간 구조는 외부 텍스트인 ⪡어린 왕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중구조로 확장된다. 어린 왕자와 장미꽃의 관계는 반복과 예측 그리고 그로 인한 설렘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고무낭과의 삶과 정확히 겹쳐진다. “느가 오후 니시에 온뎅ᄒᆞ민, 난 시시부떠 행복헤지기 시작ᄒᆞᆯ거여”라는 문장은, 관계를 이루는 시간의 정서적 축적을 보여주는 문장이며 수필의 공간에 다시금 내면의 시간을 불어넣는다. 외부 우화와 내부 경험이 겹치는 이 이중 액자 구조는 거실 한편의 장면을 우주적 관계의 서사로 확장시키는 문학적 장치가 된다.

결국 고무낭과 함께한 거실은 내면의 울림이 바깥세상과 교감하는 감정의 장이며, 반복된 돌봄이 서사로 누적되어 관계의 지층을 형성하는 생명적 배경이 된다. 작가는 이 평범한 공간을 우주로 확장시키며 한 구석의 생명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이야기가 깃들 수 있는지를 펼쳐 보인다.

제주어로 건네는 관계의 미학

고무낭이 놓인 그 공간은 마음이 바깥세상과 조심스럽게 닿는 통로이며, 일상과 내면이 엮이는 감정의 마루다. 물을 주고 가지를 자르며 반복되는 하루가 쌓여간다. 마음의 결과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며 그 공간은 이야기를 품는다. 관계는 하루하루 쌓인 정성과 돌봄 속에서 서서히 발효되는 마음의 과정이다.

이 글은 마음을 건네는 언어의 방식과, 관계가 어떻게 생성되고 지속되는지를 정서의 결로 되묻는다. 생명을 향한 감응과 타자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서사 속에 잔잔히 흐르며, 제주어 입말의 결은 그 정서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마음이 언어를 통해 천천히 건너가는 장면이며, 고무낭 곁에 머문다는 것은 타자를 향한 조심스러운 다가섬이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 수필을 따라 읽으며 관계 맺기란 결국 느린 시간 속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살아 있는 ‘제주어’가 놓인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이 빛나는 이유는 삶의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마음과 관계의 본질을 차분히 되돌아볼 수 있도록 사유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아울러 일상의 언저리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서서히 존재의 윤리로 스며들며 수필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5. 지역 문학 복원을 위한 김신자의 제주어 수필

김신자 시인의 수필은 삶의 언저리에서 되살려낸 장면들을 언어의 진정성으로 비추며 잊히는 것을 기억하고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삶의 윤리를 복원하는 문학적 실천을 감행한다. 제주어로 짜인 문장 안에는 정서와 경험 유머와 회한 침묵과 깨달음이 겹겹이 배어 있다.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진솔한 울림을 지닌 그 문장은 반전과 은유적인 익살과 풍자를 넘나드는 말맛을 통해 일상의 언어를 문학의 숨결로 끌어올린다. 그 중심에는 제주어가 있다. 제주어는 그녀의 글에서 삶의 리듬을 품은 감각의 통로이자 공동체의 기억과 윤리를 환기하는 문학적 매개체로 기능한다.

수필집 ⪡그릇제도 매기독닥⪢과 ⪡보리밥 곤밥 반지기밥⪢은 제주어 수필문학의 본령을 정립한 중요한 이정표다. 유년의 고향 땅을 되짚는 기억의 서사 공동체의 정서를 품은 말들 웃음과 회한이 교차하는 일상의 진실 그리고 현대인의 내면을 감싸는 감각적인 제주어 표현들은 모두 김신자 시인 특유의 문학적 지형을 이룬다. 이 수필집들은 그녀의 삶이라는 ‘플롯’ 속에서 다시 다른 플롯들을 꺼내어 펼치며 다채로운 인생사를 드러내고 독자에게 문학 읽기의 깊은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현실적인 수필 작법 안에서도 액자식 구성,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구조, 기억의 층위가 포개지는 시간 배열, 세태를 관조하는 시선 등 다양한 서사 장치들이 정밀하게 짜여 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그녀의 수필은 일상을 넘어 존재와 윤리를 탐색하는 문학적 서사로 확장된다.

김신자 시인.
김신자 시인.

이번 평론을 준비하며 두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첫째 수록하고자 했던 보석 같은 작품들을 지면의 제약으로 모두 담아내지 못한 점이다. 둘째 수필이 전면 제주어 원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제주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지 않는 세대나 외부 독자층에게는 이해와 접근에 일정한 제약이 따를 수 있다. 일부 핵심 어휘에는 각주가 달려 있으나 전체 맥락을 온전히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향후에는 표준어 번역본을 병기하거나 별도로 출간하여 김신자 시인의 위트 있는 감각과 유려한 문체 그리고 제주의 정서가 보다 넓은 독자층과도 폭넓게 소통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신자 시인은 시와 수필을 넘나들며 꾸준한 창작 활동을 이어온 동시에,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제주 지역의 감정어와 언어 생태를 연구해온 학문적 실천가이기도 하다. 대학 강단과 다양한 교육 현장에서 제주어 강의를 지속하며, 제주어 보존과 세대 간 언어 감각의 전승을 위해 힘써왔다. 막내딸로 자라 한 세대를 건너뛴 감각으로 제주어를 체화한 그녀는, 이중 감각을 지닌 존재다. 그녀에게 제주어는 단지 기억이나 정서를 넘어, 삶을 이루는 본원적 언어다. 문학은 그 언어의 자연성과 생명력을 가장 깊이 발현시키는 형식이 된다.

아울러 김신자 시인의 수필이 특별한 이유는 제주어를 단순한 ‘재현’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 말에 스며든 세계관과 존재 방식을 온몸으로 살아낸 삶의 언어로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그녀의 문학은 말을 살리고, 그 말은 다시 삶을 품으며, 제주어 문학을 현재 속으로 불러오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는 지역어가 지닌 문학적 가능성과 내면의 깊이를 증명하는 문학적 실천이자, 제주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성취이며 기록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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