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아의 독서평론] <33>
제주어 수필집 ⪡그릇제도 매기독닥⪢과 ⪡보리밥 곤밥 반지기밥⪢

1부
1. 공동체의 윤리 안에서 끌어올린 말들의 생명력
2. 유년 시절의 ‘고향땅 밟기’로 회귀하는 기억의 서사

2부
3. 웃음과 침묵 속에 드러나는 삶의 진실
4. 현대인의 일상에 스며든 제주어 수필
5. 지역 문학 복원을 위한 김신자의 제주어 수필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라 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학성을 지닌 수필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허구적 장치를 활용하는 소설이나 시와 달리 수필은 삶의 표면을 정면으로 통과하며, 끝내 자기 고백의 투명성을 놓지 말아야 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본령이 인간 내면을 비추는 일이라면 수필은 그 거울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여, 빛과 그림자를 함께 반사한다.

문학평론가 안성수 교수는 “수필 쓰기는 수행이자 깨달음의 언어를 찾아내고 본질과 대화하는 힘을 기르는 방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수필이 존재를 사유하며 삶의 진실과 마주하려는 윤리적 실천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점은 수필을 자기 수행과 존재 인식의 통로로 이끈다.

수필의 소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맞닿아 있다. 이 사실적인 기반 위에 글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삶을 진솔하게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붓 가는 대로’ 쓰는 수필이라 함은, 그 붓끝에 반드시 진정성의 향기가 스며 있어야 함을 내포한다. 그 것은 감정의 표출이나 단순한 고백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되 그 드러냄이 내면을 꿰뚫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 사유가 다시 자신과의 대화를 거치며 깨달음의 언어를 끌어낼 때, 그리고 그것이 작가만의 시선과 문체의 결을 따라 새롭게 직조될 때 비로소 수필은 문학이 된다.

김신자 시인은 바로 그 진정성의 미학을 지켜내며, 제주라는 땅의 말과 생애의 풍경을 자신의 글로 빚어낸다. 그녀의 글은 삶의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아래 깊은 층위까지 들여다보려는 시선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개인에서 공동체로, 부끄러움에서 성장으로, 구어에서 문학으로 이행되는 관통선(貫通線)을 따라 정서의 결을 조율하며 그녀 특유의 언어적 무게를 창출해낸다.

2001년 ⪡제주시조⪢ 지상 백일장에 당선된 이후 2004년 ⪡열린 시학⪢으로 등단한 작가는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후, 제주어 감정 표현 유형 등 방언 연구에 몰두하며 학문과 문학의 접점을 넓혀왔다. 특히 제주어를 기반으로 시와 수필 양 장르에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일군 그녀는 시집 ⪡당산봉 꽃몸살⪢, ⪡난바르⪢,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등으로 시적 세계를 확장해왔다. 제주어 원문으로 쓰인 수필집 ⪡그릇제도 매기독닥⪢, ⪡보리밥 곤밥 반지기밥⪢은 제주어 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귀한 작품집이다. 아울러 최근 출간한 제주어 동시집 ⪡잘도 아꼽다이⪢는 어린이 문학에서도 제주어의 생명력을 생생히 전달한 작품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수필집 ⪡그릇제도 매기독닥⪢과 ⪡보리밥 곤밥 반지기밥⪢은 수필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작품 전문을 제주어 원문으로 수록한 사례다. 이때의 제주어는 공동체의 정서와 기억이 스며든 말의 생태이자 삶의 온도를 지닌 언어다. 김신자 시인은 이 언어를 원형 그대로 담아냄으로써 일상의 육성을 문학으로 형상화하고, 사라져가는 말들 속에서 지역 정서의 흔적을 복원하고자 했다. 이처럼 제주어 원문으로 쓰인 그녀의 수필은 곧 제주 정체성을 온전히 품은 언어적 증언으로 자리매김한다. ⪡제민일보⪢와 ⪡제주특별자치도의회지⪢에 장기간 연재된 100여 편의 제주어 수필을 묶은 이 두 권의 책은, 한 시대의 언어와 감정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귀중한 문학적 자산이다.

본 평론에서는 김신자의 제주어 수필집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네 가지 흐름으로 정리해본다. ① 마을과 공동체의 윤리 안에서 끌어 올린 말들의 생명력, ② 유년 시절의 ‘고향땅 밟기’로 회귀하는 기억의 서사, ③ 웃음과 침묵을 오가며 드러나는 삶의 진실, ④ 현대인의 일상에 스며든 제주어의 감각과 존재성 등 두 권의 수필집에 담긴 개괄적 성격과 각 대표 작품 하나씩을 분석하되, <어머니는, 나신디 웬겨 싱거진 꼿이우다>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 등 두 작품을 중심으로 수필의 서사와 기법 및 문학적 가치 등을 세밀히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마을과 공동체의 윤리 안에서 끌어 올린 말들의 생명력

불현 듯, 어린 시절 졸린 눈을 비비며 제사 시간을 기다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왜 그렇게 사람은 많았는지, 그 북적임 속에서 작은 접시에 여러 조각으로 나뉜 사과를 집어 먹던 맛이 아직도 입안에 감돈다. 향긋한 냄새와 함께 그 순간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김신자의 수필에는 바로 그 시절, 어린 날 마음 설레게 하던 제사의 풍경과 마을의 풍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신자의 수필 세계는 유년의 기억에서 출발해 마을과 공동체의 언어,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관계로 나아간다.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개인의 추억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안에는 마을 사람들의 말투와 표정, 나누던 음식과 손길이 함께 겹쳐 있으며, 그 모든 것이 당시의 생활윤리와 관계망 속에서 살아 있다.

<식게 이왁 1·2·3>, <미싱 이왁 1·2>, <그릇제도 매기독닥>, <할망덜 소도리 1·2·3>, <돗걸름 내기 1·2>, <톳검질 메기>, <메역귈 ᄉᆞᆯ리 페와사>, <할망당에 간 돈 천원 봉갓수다>, <약장시 오던 날>, <아지망덜이 ᄌᆞᆸ짓물에 왈락 데메젼 ᄉᆞ답을 ᄒᆞ여나십주>, <당산봉에 이신 삼반석은 어떵 생긴 돌이고?> 등의 수필은 바로 이러한 ‘말’과 ‘정성’을 매개로 공동체의 서사를 엮어낸다.

작품 속에서 ‘그리움’은 특정 인물이나 사물에 머무르지 않고 마을 전체로 확장되며, 서로의 삶을 이어주는 말이 된다. 떡을 전하던 걸음, 바느질로 옷을 고쳐 입히던 손길, 그릇을 빌리고 돌려주던 마을의 규약은 모두 일상의 풍경이자 공동체적 기억의 결을 이루는 요소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리움의 온기를 품은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공동체적 윤리와 언어로 확장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식게 이왁 1·2·3>, <미싱 이왁 1·2>, <그릇제도 매기독닥>을 중심으로, 생활 속 말과 정성이 빚어낸 공동체의 풍경을 개괄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1) 왕왕작작한 식겟날-<식게 이왁 1~3>

<식게 이왁 1~3>은 어린 시절 제사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마을 풍경과 공동체의 정서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던 숙자네 집, 들고 나는 어른들의 소리, 떡을 돌리던 아이의 기억이 겹겹이 쌓인다. 작가는 식게를 단지 하나의 의례로 그리지 않는다. 그 자리는 음식을 나누고 말을 건네고 마음을 주고받는 공동체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얻어먹은 공은 갚아사 ᄒᆞ느녜”라는 어머니의 말은 삶을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며 마을이 유지되던 윤리의 말씨였다. 떡 한 조각도 허투루 나눌 수 없는 정서와 정성의 자리에 있었다.

이 수필에서 오래 머물렀던 장면은 뒤칩이 할망에게 떡을 전하러 갔던 심부름의 기억이다. “목청이 터져라 웨울러도 ᄂᆞ시 대답이 읏인 거라양”이라는 말에는 기대와 서운함, 기다림과 그리움이 겹쳐 있다. 백 원을 받을까 설레던 마음은 대답 없는 밤과 맞닥뜨리며 눈물로 번지고,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는 할망의 소식을 들은 뒤에는 허탈과 미안함으로 남는다. 화자는 조심스레 떡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때의 마음 떨림을 다시 불러낸다. 짧은 에피소드지만 그 안에는 절실한 마음의 결이 담겨 있다.

수필은 제주어의 입말과 생활의 언어로 그 시절의 풍경을 오롯이 복원한다. 떡을 들고 골목을 지나던 걸음, 사과 한 조각을 잘게 나누던 손길, 어른들의 웃음과 흘러나오던 이야기까지 모든 장면이 말의 리듬을 따라 생생히 되살아난다. 작가는 웃음과 정겨움, 서운함과 애틋함이 어우러진 기억을 되새기며, 공동체가 숨 쉬던 시간을 문장 안에 차분히 그려넣는다. ⟪식게 이왁⟫은 제주의 말을 통해 마음을 잇고 관계를 새기며 기억을 품에 안는 수필이다. 제주어가 지닌 말맛과 생활의 윤리를 따뜻하게 담아낸 이 글은 지금의 우리에게 오래된 온기를 다시 건네준다.

2) 미싱에서 바느질된 삶의 무늬-<미싱 이왁 1·2>

수필 <미싱 이왁 1·2>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일제 손미싱을 중심으로, 세대를 이어온 여성들의 삶과 기억을 따뜻하게 펼쳐낸다. 열여섯 살에 물질로 번 삼천 원으로 장만한 미싱을 “신줏단지 모시듯” 아끼던 어머니는, 눈이 어두워진 뒤 딸에게 그것을 조심스레 물려준다. 미싱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는 화자는 어머니 곁에서 눈으로 익힌 솜씨로 아이 옷을 만들고 바지를 줄이며, 자신만의 바느질 세계를 차근히 일군다. 이때 미싱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잇는 매개이며 추억과 애틋함을 꿰매는 실이 된다.

작품 속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장면은 갈중이를 건네며 “마, 이거 느네 아덜 입지라” 하고 말하던 삼춘의 손길이다. 옷감 한 폭은 여름을 시원하게 하고, 장례 때는 상복이 되어 곁을 지키며, 평범한 날에는 일상의 옷으로 몸을 감싼다. 김신자는 이 섬세한 바느질이 단지 의복을 만드는 기술을 넘어, 관계를 기워내고 흠이 있는 삶을 다시 쓰임새 있게 만드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특히 “하간 옷덜을 박음질ᄒᆞ는 시상은 날 기분좋게 멘들아줍네다게. 터지고 헌헌ᄒᆞᆫ 삶도 ᄆᆞᆫ 새판칙ᄒᆞᆫ 삶으로 바꾸와주난양”이라는 표현은 작품의 정조를 응축한다. 낡고 터진 옷을 고쳐 입히는 일은 깨지고 지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과 닮아 있다. ‘드르륵 드르륵’ 울리는 미싱 소리는 한 가정의 역사이자, 사라져가는 제주 여성들의 생활기술과 정서의 리듬이다. 김신자의 수필은 그 소리를 문장 속에 고스란히 담아, 독자로 하여금 오래된 손미싱 앞에 앉아 있는 듯한 현존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미싱 이왁 1·2>는 바느질을 통해 삶과 사랑, 그리고 공동체적 기억을 기워 올리는 한 편의 온기 있는 기록이 된다.

3) 매기독닥과 공동체의 풍경-<그릇제도 매기독닥>

김신자의 수필 <그릇제도 매기독닥>은 사라지는 사물에서 기억을 끌어올리고 공동체적 감각을 되살리는 문학이다. 오름을 오르던 화자가 폐허가 된 생이집 주변에서 발견한 ‘낭가쟁이’는 새가 집을 짓기 위해 물고 오던 가지로, 자연과 함께한 삶의 정서를 상징한다. 이어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신 뒤 발견된 80~90년 된 그릇들은 대가족과 마을 공동체가 나눴던 시간의 촉감을 되살려 준다.

“옷덜쾅 빗난 그릇덜토 씨당 실프민 픽픽 데껴부는 시상이라노난”이라는 말처럼, 요즘 시대는 오래된 사물과 관계가 손쉽게 버려지는 시대다. 그러나 화자는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그릇 하나를 물받침으로 되살리며 “씨레기 덜미서도 곱닥ᄒᆞ게 쓰민 된다”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작품의 중심에는 공동체의 풍습 ‘그릇제(契)’가 있다. 마을에서 함께 돈을 모아 잔칫날 돌아가며 사용하는 그릇은 공동소유와 상호신뢰의 표상이다. 화자의 어머니가 큰오라버니 장가를 보낼 때 분주히 그릇을 세고 빌려왔던 이야기는 유쾌한 회고로 펼쳐진다. 특히 밥그릇 하나가 없어져 마당을 샅샅이 뒤지고 장부를 대조하던 해프닝은 웃음을 넘어 공동체의 풍경을 바라보게 한다.

이 수필은 과거의 풍속을 회고하는 동시에 현대의 단절된 감각과 겹치는 이중구조로 짜여 있다. 낡은 그릇 하나가 소환한 기억은 오늘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계기가 된다. 액자식 구성에서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며 물건 하나에도 생명이 깃들던 공동체적 기억의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필자는 이 수필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참을 멈추었다.
“용수리 갈 적마다 시간은 인정사정 봐주는 거 읏이 박박 지와부는 지우개 닮수다게.”
화자가 ‘용수리’를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시간이 얼마나 무정한가 하는 사실이다. 시간은 누구의 마음도 살피지 않는다. 인정사정없이 모든 것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지우개처럼, 사람과 기억과 물건을 하나둘 허물고 지나간다.

“하나둘 사진으로 치곡 느량 기록하지 않으면 그릇제에 대한 추억도 이추룩 매기독닥 뒈불 거 닮아마씀.”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우리가 하나둘 사진으로 남기고 글로 적어두지 않으면, 그릇제에 얽힌 기억도 어느새 이렇게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다고. ‘매기독닥’은 제주어로 아무것도 없거나, 하던 것이 끝난 상태를 뜻한다. 말끝에 스며드는 이 표현에는 기억의 마감과 공동체 풍습의 소멸, 그리고 삶의 장면들이 너무도 쉽게 덧없어지는 시대적 위기감이 담겨 있다.

이처럼 <그릇제도 매기독닥>은 현재–과거–현재로 이어지는 액자식 구성을 바탕으로, 사라지는 기억과 물건을 감각적으로 복원해낸다. 그 중심에는 ‘그릇제’라는 공동체의 풍습과, 그것을 지우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애틋한 시선이 자리한다. 어머니가 남긴 그릇 하나에도 손때와 세월이 묻어 있듯, 이 수필은 문학이라는 그릇에 그 시절의 온기를 담아 되살려낸다. 문학은 때론 매기독닥, 즉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은 풍경에서 다시 피어나는 유일한 언어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크로노토프(chronotope)’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크로노토프란 시간과 공간이 한데 결합되어 서사의 의미를 형성하는 지점을 뜻한다. ‘그릇제’는 단지 그릇을 빌리고 돌려주는 실용적 행위가 아니라, 마을이라는 공간 안에서 세월을 따라 반복되어온 신뢰와 관계, 공동의 기억이 응축된 하나의 시간-공간이다. 잔칫날마다 각자의 집에서 빌려온 그릇들이 한집에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과정은 마을 전체의 리듬을 따라 형성된 서사적 시간과, 그릇들이 놓이고 나뉘던 생활의 공간이 포개지는 장면, 곧 하나의 크로노토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크로노토프의 시선은 <미싱 이왁>과 <식게 이왁>에도 적용된다. 손미싱 앞에 앉아 밤새도록 ‘드르륵 드르륵’ 박음질하던 시간과, 제사 전날 떡을 들고 골목을 오가던 발걸음은 단지 과거의 장면이 아니라, 공동체의 리듬이 새겨진 고유한 시간-공간이다. 바느질이 멈춘 순간에도 손끝에 남아 있는 촉감, 제사가 끝난 뒤에도 입안에 남아 있는 사과 조각의 향처럼, 이 시간-공간은 기억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확장된다. 김신자의 수필은 이렇게 서로 다른 생활 장면을 하나의 생활사적 크로노토프로 엮어내며, 개인의 추억을 공동체의 역사로, 그리고 사라져가는 풍습을 현재 속으로 불러낸다. 이는 곧, 삶을 잇는 말과 정성이 시간이 지워도 여전히 살아남는 방식이자, 지역문학이 품을 수 있는 회복력의 한 형식이다.
 

2. 유년 시절의 ‘고향땅 밟기’로 회귀하는 기억의 서사

어머니는 곧 고향땅이다. 자연 앞에 설 때 우리는 문득 어머니의 품을 떠올린다.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어머니가 그리운 순간이 있다. 가끔 ‘고향땅 밟기 프로젝트’를 한다며 찾아오는 필자의 자녀들을 보더라도 고향은 그만큼 정서의 스펙트럼이 넓고 인간의 감각과 삶의 기초를 처음 배운 모태적 장소로 작동한다. 그래서일까. 고향과 어머니는 자주 같은 등식으로 치환된다. 말 그대로 어머니라는 단어 대신 고향땅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 둘은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품의 이미지로 겹쳐 있다.

모성의 발현이 각별한 만큼 어머니 혹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도 남다르다. 많은 문학작품에 어머니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체온에는 아버지와 가족, 고향까지도 함께 아우르는 정서의 결이 흐른다. 김신자의 수필에서도 그러하다. 그녀가 언어로 다시 불러내는 어머니의 형상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겹쳐 있는 고향의 향수와도 같은 존재다. 그리하여 그 추억들은 독자의 가슴에 자연스레 포개지고,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의 이야기들과 공명하게 된다.

그녀의 수필에는 유독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글들이 많다.

<무뚱에 앚으난 ᄃᆞᆺᄃᆞᆺᄒᆞᆫ 벳이 초집에 녹아들언>, <어머니는, 나신디 웬겨 싱거진 꼿이우다>, <어멍이 밥 하영 먹으민 천당 간덴>, <어멍광 ᄒᆞᆫ디 나 들어가는 거무룽ᄒᆞᆫ 세타>, <니야카만 보민 아부지가 생각나양>, <이녁 아방 자랑질ᄒᆞ기>, <ᄎᆞᆷ치로 바당구신 뒐 뻔 ᄒᆞ여낫수다>, <숨빌락 1·2>, <보제기 아덜 1·2>, <나의 받아쓰기, 고무신>, <쿠싱ᄒᆞᆫ 자리젓>, <족받이 들런 원담이 멜 잡으레> 등에서는 부모의 모습과 고향땅, 친구들, 공동체가 어우러졌던 유년 시절의 풍경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덕분에 독자들은 그리웠던 고향의 땅을 가슴으로 다시 밟으며, 저마다의 기억 속으로 나직이 젖어들게 된다. 여기에서는 수필집 ⪡그릇제도 메기독닥⪢의 <어머니는, 나신디 웬겨 싱거진 꼿이우다>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지면상 작품은 일부만 제시하였다.

분석 텍스트 – ⪡그릇제도 메기독닥⪢의 〈어머니는, 나신디 웬겨 싱거진 꼿이우다〉

국민ᄒᆞᆨ교 일ᄒᆞᆨ년 어느 날, 담임 선싱님이 ‘우리가족’을 기려오렌 숙제를 내엿수다. 난양 어둑어둑ᄒᆞᆫ 밧거리서 ᄂᆞ람지 주젱이영 무셍이 뒈우는 우리 아방광, 메날 바당으로 밧디로 ᄒᆞᆫ시반시 집이 부뜨는 새 읏이 걸음반 ᄃᆞᆯ음반 ᄒᆞ멍 뎅기는 우리 어멍을 기련 ᄒᆞᆨ교에 ᄀᆞ젼 가서마씀. 벗덜은 거즘 젊은 어멍광 아방이 ᄒᆞᆫ디 모도락ᄒᆞ게 앚안 낭푼이에 밥 먹으멍 웃는 모십을 기련 와십데다. 아이덜은 나 기림을 봐지난

“야, 느네 어멍 아방은 할망 하르방? 무사 영 머리커럭이 히영ᄒᆞ니? 는, 할망 하르방이영 살아ᇝ구나이.”

어멍 아방이 잘도 늙엇젠 내무리는 소리ᄒᆞ멍 눈알로 보쿠데, 아모 말도 안헷주만 나 ᄆᆞ심은 문데겨져서마씀. 뒷녁날 ᄒᆞᆨ교에 간 보난 벗덜이 기린 기림이 교실 뒷티 벡멘에 부쪈 싯고, 나 기림은 막 ᄐᆞ나게 한가운디 삐까뻔쩍ᄒᆞᆫ 종이에 딱 부쪄젼 신거라마씀. 그 기림 알더렌 담임 선싱님의 니귀반뜩ᄒᆞᆫ 글씨가 ᄌᆞᆨ아젼 이십데다.

“잘도 행복ᄒᆞᆫ 가족이여이”.

제우 ᄒᆞᆫ 곡지 말이랏주마는, 그 일ᄒᆞᆨ년 짜리가 오십이 넘은 중년이 뒈어도 느량 ᄄᆞᆺᄄᆞᆺᄒᆞᆫ 저슬로 남안 싯주마씀.

(생략)

밥풀로 데작데작 부찌멍 ᄌᆞᆷ상ᄒᆞ게 ᄌᆞᆨ아논 활ᄌᆞ ᄉᆞ이로 어징간ᄒᆞᆫ 우리어멍 성질머리가 나옵디다게. 그땐 넘이 놈 부치롭덴 셍각만 들어신디, 요지금 셍각ᄒᆞ민 우리 어멍이 보통어멍은 아니라난 거 닮아양. 가방끈은 ᄍᆞᆯ르주마는 야학으로 배완 ᄒᆞᆫ글도 ᄆᆞᆫ 알곡 일본말도 ᄆᆞᆫ 알아노난 이녁 ᄒᆞ고정ᄒᆞᆫ 말은 핀지에 춤ᄇᆞᆯ라가멍 니 잡듯이 ᄌᆞ근ᄌᆞ근 ᄌᆞᆨ아놔십데다.

“도독놈아, 보거라. 이 늙은 할망 돈을 ᄀᆞ졍갈 셍각이 으디서 낫느냐. 너놈의 행실이 아주 나쁘다. 나가 널 똑기 잡앙으네 동네사름덜 보는 앞이서 멍석ᄆᆞᆯ이 ᄒᆞ구정ᄒᆞ다만 이번만은 용서ᄒᆞ여줄테니 낼쎄망정ᄒᆞᆫ 중 알아라.”

(생략)

“점점이라가난 또릿또릿ᄒᆞ던 총기도 하영 읏어지고양. 애기추룩 누웡 이신 우리 어멍 봐가민 눈물만 잘잘 나옵네다게. 게도, 지나가 부는 게 인생이고 사름덜신딘 ᄆᆞᆫ 메인 목심이라 생각뒈여져마씀. 놈신디 부치롭지도 안ᄒᆞ곡 당당ᄒᆞᆫ 여성상을 뒈물림ᄒᆞ여준 우리 어멍은 나신디 ᄒᆞ나뿐인 꼿이우다. 나신더레 쿰 지듯 웬겨 싱거진 꼿마씀……”- 본문 중 마지막 장면

-⪡그릇제도 메기독닥⪢의 〈어머니는, 나신디 웬겨 싱거진 꼿이우다〉 부분

1) ‘서사적 자아’로서의 나

김신자 시인의 수필 <어머니는, 나신디 웬겨 싱거진 꼿이우다>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궤짝’과 ‘문짝’의 장면을 축으로 삼아,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회상적 서사를 직조한다. 이 구조는 폴 리쾨르가 『타자로서 자기자신』에서 제시한 ‘서사적 자아’의 개념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리쾨르에 따르면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로 구성되며 기억과 대상, 사물과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 수필의 화자는 바로 이러한 리쾨르의 관점을 따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어머니라는 관계적 존재와의 교차를 통해 자기 서사를 갱신해간다. 이때 어머니는 화자의 정체성을 비추는 중요한 관계적 존재로, 화자의 서사적 자아를 구성하는 정동(情動)적 기억이자 내면적 거울로 작용한다.

주요 장면은 다음 플롯으로 압축할 수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우리 가족’을 그려오는 숙제 이야기→ 어린 시절 집안 벽장 속에서 마주했던 궤짝의 풍경→ 팔십이 넘은 어머니가 쓰러진 날 해녀증을 찾으러 갔다가 마주한 궤짝과 궤짝 문에 적힌 이름 석 자→ 어느 일요일에 찾아간 집에서 마주한 도둑에게 쓴 손글씨 편지→애기처럼 누워 있는 나신디 하나뿐인 꽃

이 장면 중에서도 필자는 화자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 두 장면, 즉 ‘우리 가족 그리기’ 숙제와 문짝에 붙은 손글씨 편지를 중심으로 기억의 결을 조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 장면은 외부의 시선을 통해 자존감을 되찾는 서사적 자아의 출발점이며, 두 번째 장면은 어머니의 언어가 삶의 윤리로 전환되는 구체적 기록이다. 이 둘은 화자의 정체성과 감정의 골격을 형성하며, 수필 전반에 흐르는 모성과 존재, 그리고 말의 무게를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2) 반세기를 살아낼 수 있었던 선생님의 한마디

국민학교 1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 ‘우리 가족’을 그려오는 숙제를 내준다. 화자는 어둑한 밧거리에서 농사짓는 아버지와 바다와 밭을 오가며 바삐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학교에 가보니 친구들은 대부분 젊은 부모와 아이들이 둘러앉아 웃으며 밥 먹는 장면을 그려 왔다. 화자는 그 틈에서 주눅이 든다. 아이들은 “야, 느네 어멍 아방은 할망 하르방? 무사 영 머리커럭이 히영ᄒᆞ니? 는, 할망 하르방이영 살아ᇝ구나이.” 하며 놀렸고, 그 말은 화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런데 다음 날, 교실 벽면에 붙은 그림들 가운데 화자의 그림만 반짝이는 종이에 따로 붙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담임선생님의 글씨로 “잘도 행복ᄒᆞᆫ 가족이여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짧은 그 한마디는 1학년이었던 화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 남았고,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따뜻한 위로로 기억된다.

화자의 담임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품어주는 사람이었다. 어린 마음에 움트던 부끄러움을 따뜻한 한 줄의 말로 껴안아주며, 한 존재를 긍정해주는 교육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렇다. “잘도 행복ᄒᆞᆫ 가족이여이.”라는 말은 이 수필 전체의 정서를 단단히 지탱하는 중심축이다. 그 짧은 한마디가 화자의 어린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던 것처럼 독자에게도 천천히 스며든다. 그 말은 삶의 어두운 골목마다 되새김질하는 숨결이 되었고 화자의 자존감을 지키는 내면의 지지대가 되었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무심히 건넨 한 문장이 평생을 살아낼 힘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교육자의 언어다. 지식을 전하기에 앞서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길 그리고 그 눈길에서 전해진 한 문장. 그 말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빛으로 남는다.

3) 문짝에 새겨진 자존의 언어에서 시작된 문학

한편, 팔십이 훨씬 넘은 어머니를 찾아간 어느 공휴일, 화자는 마당에서 ᄀᆞ렛방석을 깔고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발견한다. 구들장 벽에는 희끗희끗한 종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아이고, 어머니. 거느리왕상ᄒᆞ게 저 문에 ᄌᆞᆨ아논 핀진 무신거우꽈게. 동네사름덜이라도 지나가당 보민 ᄌᆞ식덜 무신 구체우꽈게. 따따부따ᄒᆞ지말앙 제게 떼붑서.” 당혹스러운 화자는 동네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다며 얼른 종이를 떼자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질세라 사연을 이어간다. 돈 십만원을 가져간 도둑에 대한 원망, 그 억울함을 스스로 써 붙인 손글씨로라도 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연을 털어놓는다. 화자와 어머니의 실랑이는 점점 생생한 대화로 이어진다. 말끝마다 핏대를 세우는 것 같지만 이상하리만치 그 장면은 정겹다. 그 안에는 세월을 함께 버텨낸 모녀의 질긴 정이 배어 오히려 모녀지간의 아웅다웅의 꽃으로 비쳐진다.

김 시인의 어머니는 필자의 할머니와도 비슷한 세대의 여성이다. 그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가 아직 문짝에 붙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세대의 마음과 시간이 응축된 언어의 잔향처럼 다가왔다.

“도독놈아, 보거라. 이 늙은 할망 돈을 ᄀᆞ졍갈 셍각이 으디서 낫느냐. 너놈의 행실이 아주 나쁘다. 나가 널 똑기 잡앙으네 동네사름덜 보는 앞이서 멍석ᄆᆞᆯ이 ᄒᆞ구정ᄒᆞ다만 이번만은 용서ᄒᆞ여줄테니 낼쎄망정ᄒᆞᆫ 중 알아라.”

화자의 어머니가 남긴, 엉성한 맞춤법의 편지가 어찌 이토록 깊은 울림을 남길 수 있을까. 그것은 점점 사라져가는 서간문의 온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상황을 오히려 용기 있게 드러낸 진솔함에서 비롯된 감동이 아닐까.

삐뚤삐뚤, 암호문자처럼 해독하기 어려운 언문체였지만 그 말투에는 읽는 이조차 기를 펴지 못할 기세가 서려 있었다고 수필은 전한다. 글을 배울 기회조차 드물었던 시절 엉성한 맞춤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그 편지는 화자의 어머니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붙들고자 했던 작은 선언이었다. 이처럼 김 시인의 글에는 어머니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억지로 다듬지 않고, 삶의 결을 따라 쓰여진 문장들이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어쩌면 그녀의 문학은 문짝에 쓴 편지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끝자락에서도 말을 남기려 했던 어머니의 마음, 그 떨리는 손끝의 기록이 오늘의 김 시인을 문장으로 이끈 힘이 아니었을까. 그 마음은 시간 속에 사라지지 않고 글이 되어 우리 곁으로 왔다.

4) 어머니라는 이름의 정서적 뿌리

김신자 시인의 문장 “발악발악 대들당 보민 절부암 어느 구석이서 돔박꼿썹이 후두둑 털어지던 가난이라는 밤”은 감정이 고조된 순간, 오히려 가장 조용하고 섬세한 이미지인 ‘돔박꽃잎이 후두둑 털어지는’ 장면과 병치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격한 내면의 분출과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이 나란히 놓임으로써, 고통의 순간은 한층 절제된 감성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표현은 감정의 이탈을 통한 시적 전환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격정적인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자연의 사소한 움직임에 감정을 투사함으로써 오히려 감정은 더욱 응축되고 깊은 시적 밀도를 획득한다. 이는 섬세한 시적 감수성을 지닌 문학적 자아, 즉 김 시인이기에 가능한 문장 구성이다.

삶의 격랑을 곧바로 말하지 않고, 자연의 장면 속에 감정을 겹쳐 놓음으로써 수필은 단순한 회상을 넘어 존재의 결을 비추는 시적 문장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문장에는 김신자 문학이 지닌 내면적 서정과 감각, 그리고 말보다 깊은 침묵의 미학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이 침묵의 언어는 독자의 마음속에 조용히 스며들며, 오래도록 머무는 문학적 울림으로 남는다.

이 수필의 마지막 장면이다. 총명하던 기운이 점점 희미해지고, 아이처럼 누워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 눈물이 절로 난다. 그래도 삶이란 결국 지나가며 부는 바람 같은 것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맡겨진 목숨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고 화자는 말한다. 자신의 어머니는 남 부끄럽지 않게 살아낸 당당한 여성으로서 온몸으로 그 삶을 자식에게 물려준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그 존재만으로도 화자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는 어머니다.

이제는 말없이 눈만 깜빡이는 아흔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점점 흐려지는 총기와 노쇠한 몸짓에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그것이 삶이고, ‘맡겨진 목숨’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의 길이라 화자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당당한 여성상을 대물림해준 어머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이자, 자신에게는 끝내 ‘싱거진 꽃’이다.

어머니와 자아를 잇는 서사적 응시

결국, 이 수필에서 화자는 두 장면을 통해 삶의 가장 내밀한 순간들을 비춰본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잘도 행복ᄒᆞᆫ 가족이여이”라는 말 한마디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시선이었고, 말없이 움츠러들던 아이에게 자존의 뿌리를 심어준 시작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문짝에 남긴 손글씨 편지는 화자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삶의 윤리와 언어의 기원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삶을 반영한다. 김신자 시인의 수필은 그렇게 말과 삶이 하나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자아를 서사로 끌어올린다.

어머니의 언어, 그리고 선생님의 말 한마디는 화자의 내면에 오래도록 머물며 자신을 붙드는 말이 되었고, 그것은 훗날 문학이 될 수 있었던 정서적 뿌리가 되었음을 이 수필은 보여준다. 리쾨르가 말한 서사적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기억을 이야기로 엮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자아다. 화자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그 감정과 사유를 언어로 끌어 올리며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해낸다.

그리고 그 서사의 끝에서 자아인 ‘나’는 어머니에게 “싱거진 꽃”이라며 스스로를 불러본다. 어머니라는 관계적 존재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내면의 감응이며 말과 감정이 교차하는 자각의 순간이다. 어머니는 결국 자아의 기원이자 거울이 되고 ‘나’는 그 거울 앞에 선 존재로서 끝없이 성찰하는 이야기, 곧 서사적 자아를 완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 「말의 결을 따라 삶을 적는다 ― 김신자 수필문학의 진정성과 제주어 감각」은 2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이어지는 2편에서는 ‘3. 웃음과 침묵 속에 드러나는 삶의 진실’, ‘4. 현대인의 일상에 스며든 제주어 수필’, ‘5. 지역 문학 복원을 위한 김신자의 제주어 수필’ 등을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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