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장윤우 미디어제주 청소년기자 (KIS 제주캠퍼스 G9)

정난주 마리아의 묘는 제주올레 11코스에 길에 자리 잡고 있다.
흙먼지 뽀얀 작업복 입은 농사꾼들을 지나 정난주 성지표지판을 둘러 작은 샛길로 들어가면 엄숙한 마음이 드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있다.
올레길에 있는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도 드물고 실제로 들르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인다. 천주교 성지이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만이 정난주 마리아의 묘를 방문하는 것이 전부인 듯 조용하기만 하다. 신자들의 나지막한 기도 소리가 묘 주변 공기를 묵직하게 만든다.

정난주의 삶은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양주에서 태어난 양반 가문 출신의 규수가 어떻게 이렇게 먼 제주도에서 잠든 것일까?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 전경.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 전경.

정난주 마리아는 1773년(영조 49)에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아버지는 정약현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였다.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은 그녀의 작은아버지들이다.

정난주의 가문은 조선 시대에 일찍 서학, 즉 천주교를 믿게 된 가문 중 하나다. 정난주 또한 작은아버지 정약전을 통해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고모부인 이승훈에게 세례명 ‘마리아’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인이다.

정난주는 1791년에 황사영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 황사영은 천재였다. 황사영은 16세였던 1790년에 과거시험 중 하나인 진사시에서 급제했다. 22세 때 생원시에 급제했던 정약용보다 6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최연소 장원급제로 역사에 남은 인물이다. 이 놀라운 천재를 정조가 불러들여서 손목을 잡고 “20세가 되거든 다시 오너라. 내가 너를 중히 쓰겠다.”라고 전해진다. 황사영은 정조가 잡은 손목에 명주천을 감고 다녔다고 한다.

황사영과 정난주의 가문은 친인척지간으로 매우 친밀했다. 두 가문이 가까운 사이였기에 황사영은 일찍이 천주교를 받아들 수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천주교가 심한 고난을 받았다. 정약종이 참수를 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나란히 귀양을 가게 되었다. 천주교 주요 인물에 속해 있던 황사영은 잡히지 않기 위해 제천의 배론 땅에 숨어들었다.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황사영은 신자들이 마련해준 토굴에 숨어지냈다. 이 토굴에서 황사영은 북경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잔혹한 박해와 천주교 대표 인물들의 순교 소식 등 조선 천주교 탄압을 보고 하는 긴 편지를 쓰게 된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명주천에 쓴 13,384자는 행과 열이 흐트러짐이 없었다. 편지는 북경 교회에 전하도록 할 작정이었지만 황사영을 잡으려고 급습한 관원들에게 체포되었고 몸을 수색하던 관원을 통해 편지가 발각되었다. 황사영은 죄인의 신분으로 곧장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백서의 내용에는 천주교인들의 박해뿐 아니라 조선 국왕을 무력으로 협박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이것은 조선 국왕을 향한 반역의 죄였다. 이 사건을 ‘황사영 백서사건’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신유박해 때 장기와 신지도로 귀양을 갔던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다시 조정에 불려 나가 문초를 받고 더욱더 험난한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 집안 재산은 모두 빼앗겼고, 그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귀양을 갔다. 아내 정난주와 두 살배기 외아들 황경한은 제주도 관노비로 끌려가게 되었다.

백서의 원본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금부와 포도청에 쌓인 문서를 처리하던 중 세상에 나왔다. 이 문서는 버려지기 직전에 한 천주교 신자에게 건네졌고 조선 천주교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올려졌다. 뮈텔 주교는 1925년 로마 바티칸에서 거행된 조선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 때 이 백서 원본을 교황 비오 11세에게 올렸다. 현재 바티칸의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황사영 백서의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는 백서의 복사품인 가백서가 있다.

양주시 가마골로 270번길 건물 뒤편에는 황사영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황사영 묘는 1980년 경기도 양주의 창원 황씨 선산에서 발굴하였다. 당시 무덤에는 석제 십자가와 비단 띠가 들어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확인이 되었다고 한다.

추모비 앞면에 ‘창원 황씨 알렉산델 사영(嗣永)의 묘’라고 써 있고, 뒷면에는 황사영의 생애와 백서에 관한 내용이 있다.

1801년 11월 황사영은 처형되고 11월 21일에 두 살 아들을 데리고 정난주는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정난주는 귀양길 중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추자도 예초리의 황새바위 갈대밭에 아들을 내려두고 떠났다. 황경한은 마을에 살던 어부가 데려다 길렀다고 전해진다. 여러 기록에서는 정난주가 황씨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살 아들을 추자도에 내려놓고 홀로 제주도로 간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도 출판사의 책 <한국의 섬 제주도(이재언 글)>에 따르면 아들 황경한은 이미 추자도로 유배지가 정해졌을 것으로 본다. 황경한이 공식적으로 추자도로 유배지가 정해진 것은 맞다. 그렇지만 추자도에 도착한 기록도 없고 유배 생활을 했던 기록 또한 없다. 황경한은 ‘유배지에 도착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다. 역사의 공식적 기록에서는 황경한은 유배지 도착 전 ‘사망’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제주올레길 18코스에 위치한 하추자도 황경한의 묘.
제주올레길 18코스에 위치한 하추자도 황경한의 묘.
상추자도 등대산에서 바라본 하추자도 전경.
상추자도 등대산에서 바라본 하추자도 전경.

멀쩡히 살아있는 아이를 왜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고 보고했을까?
유배호송인들이 정난주와 황경한을 돌봐주던 세력에게 매수를 당했을까? 아니면 호송길에서 본 모자의 측은함 때문에 황경한을 비밀리에 어부에게 맡기고는 공식적으로 죽었다고 보고했을까? 정난주의 간곡한 부탁이 두 모자의 이별은 막지 못했지만 황경한의 생명과 자유는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은 아닐까.

현재까지 황경한 자손들이 추자도에 뿌리를 내려 살고 있으니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비공식적으로는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황경한은 추자도 주민 오상선 부부의 양자로 살게 되었다. 현재 추자도의 황씨는 모두 황경한의 자손들이다. 황경한을 키워준 인연으로 황씨와 오씨 두 집안은 한 형제의 의미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

정난주가 황경한에게 남겨준 족보는 1970년대 초반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아쉽게도 어린 후손들이 장난으로 딱지를 만들어 놀아 훼손되었다. 추자도 입도 당시 입었던 아이 이름과 부모의 이름이 적힌 저고리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정난주는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도로 입도하였고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제주도는 육지와 격리된 최적의 유배지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제주도는 조정에서 벼슬하던 사람들이 내려오기 좋은 유배지였다고 평가되었다.
유배객이 탄 배는 대체로 전라도에서 출발하여 제주 화북포나 조천포에 도착했다. 그것은 화북이나 조천이 제주도에 도착한 유배객을 제주목으로 인계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배객들이 도착하면 제주목이나 정의현 또는 대정현 중 유배지로 결정된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대정현은 누구나 가기 싫어했던 최악의 유배지였다.

유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죄인을 고향으로 보내는 본향안치는 비교적 가벼운 유배다. 죄인이 살고 있는 집의 울타리에 가시를 두르고 그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이 가능했던 위리안치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절도안치는 가장 잔인했다.

정난주는 대정현에서 위리안치의 벌을 받았으니 중대한 죄인임은 틀림이 없었다. 게다가 관노비로 신분이 매우 하찮아졌다.

정난주는 대정현의 별감을 지냈던 김석구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는데, 이곳에서 김석구의 아들 형제를 친자식처럼 기르며 살았고, 또한 가문에서 배운 풍부한 교양과 지식으로 인근 주민들을 교육했다. 그러다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때 사람들이 ‘한양 할머니’가 죽었다며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난주가 죽자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은 그녀를 모슬봉 북쪽 한굴왓에 장사지냈다. 이후 정난주의 묘는 대정읍 동일리 9번지에 이장되었고, 천주교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로 묘지는 현재 순교자묘역으로 성역화되었다.

 

민속박물관 견학 당시 찍어두었던 정약용의 하피첩.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민속박물관 견학 당시 찍어두었던 정약용의 하피첩.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어릴 때부터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여기저기 많이 다니곤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에는 하피첩이라는 유물이 전시되어있다. 하피첩은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 갔을 때 비단 치마에 적어 보낸 편지다. 황사영 백서 사건 때문에 강진으로 유배 갔을 때 유물이다. 만약 정약용 선생이 황사영의 백서사건 때 유배가 아닌 사형을 당했었다면 하피첩도 전해지지 않았겠다. 아무래도 정난주 마리아와 내가 같은 일을 겪은 가문의 후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이 고장에 대해 묘한 아픔이 더해진다.

정난주 한양할머니가 남편을 잃고, 아들을 떼어놓고 고된 삶을 살았던 제주.
그러나 할머니는 그런 현실에 주저앉음 없이 마을 사람들을 가르침에 열심이셨다는데 제주로 공부를 하러 온 나도 그 가르침을 교훈 삼아 대정 고을에서 열심히 살아야겠다.

 

[참고 문헌]

정민. 다산의 두 하늘, 천주와 정조 파란.(2019). 천년의 상상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2012).
이재언. 한국의 섬 제주도. 이어도 출판사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