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시조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에 있다』
③제주어 시조의 폭과 깊이
1부 반복과 압축의 시적환기와 음악성
2부 자연의 결, 제주어의 결
3부 제주어 시조의 폭과 깊이
1) 시조에서 읽는 현대인의 멀티페르소나
2) 제주어 시조의 역사 인식과 치유
3) 풍자적 시선으로 본 자연과 사회
4) 오래된 미래의 ‘제주어’ 시조
나오며- 제주어 시조의 전망과 제안
세상 만물에 숨결을 불어 넣어 전하는 자가 시인이다. 이때 시인은 시적 화자인 자아와 타자(대상)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사색의 과정을 거치며 ‘자아’에서 ‘시 세계’로 진입한다. 특히, 정형률을 기반으로 하는 시조는 서사와 서정의 절묘한 조합과 형식미 안에서 다양한 시적 환기가 이루어질 때 빛을 발할 수 있는 장르이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정형률을 고수하면서도 일정한 형식을 해체하거나 변형하여 현대적 감각을 가미하려는 작품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시조에서 현대 문학의 감각을 수용하려는 시조계의 움직임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번에 펴낸 김정숙의 제주어 시조집은 다각적인 역량을 펼치며, 제주어 시조의 폭과 깊이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김정숙 시인은 제주어를 몸소 체험한 세대이다. 그러나 자녀 세대로 갈수록 ‘제주어’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시인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전체 구성을 기획한 것으로 보인다. 시조집의 큰 틀에서 보면, ① 전반적으로 표준어의 내용 속에 제목이나 소재를 제주어로 활용하는 방식, ② 제주어와 표준어를 병렬하는 방식, ③ 핵심 제주어와 표준어의 동음이의어 및 동음을 활용하는 방식 등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제주어 접근 방식에 다양한 시조 작법을 가미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제주어 시집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구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제주어에 대한 별도의 해석이나 각주 처리 없이 구성한 점도 독특하다. 제주어를 모르는 독자들을 고려했을 때는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시조’ 작품 안에서 온전히 시적 감수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깊은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 기법을 통해 작품의 익숙한 측면을 변형하거나 강조하여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려는 문학적 기법을 추구했다. 이는 일상적인 사물이나 상황을 낯설게 만들어 독자의 인식과 이해를 새롭게 자극함으로써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인식을 유도하는 것이다. 김정숙 시인의 낯선 소재, 낯선 작법, 낯선 구성력 등 이러한 색다른 시도는 결국 시조집의 작품성을 뚜렷하게 뒷받침하며, 새로운 시각을 전해준다.
「제주어에 발효된 서정과 서사성」의 세 번째 연재 독서 평론은 “제주어 시조의 폭과 깊이”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이번 글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멀티페르소나 시대의 자아와 타자 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리고 제주어 시조가 담고 있는 독특한 시대 인식을 통해 사회적 풍자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살펴보며,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주어 시조의 미학적 가치를 분석하고자 한다. 더불어, ‘오래된 미래’로서의 제주어 시조가 현대 문학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그 폭과 깊이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찰해 볼 예정이다.
1) 시조에서 읽는 현대인의 멀티페르소나
오름 길에서 우연히 만난 꽃이 바람꽃이었다. 김 시인의 시조를 접하고 나서야 이 꽃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바람꽃은 그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바라보는 대상이다. 연인, 가족, 일에 지친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이들이 지나가며, 바람꽃은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즉, 바람꽃은 만나는 대상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시각과 감정으로 인식된다. 네이버 사전에서 정의하는 멀티페르소나(Multi-persona)는 '다중적 자아'를 뜻하며, 이는 개인이 상황에 맞춰 다양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 시인은 작품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와 「비가 쏜다」에서 이러한 멀티페르소나적 특성을 통해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현대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길을 잃어야 한다면
딱 여기서 잃고 싶다
밟을까 꺾을까 아님 매달릴까
꽃샘이 날밤을 새워도
어쩌지 못한 민오름 아래
이끼 깔고 낙엽은 덮고 한뎃잠을 자다가
느, 피면 나도 피고
느, 돋으면 나도 돋아
눈에 눈
잎에 잎 맞추는
파르르르 바람꽃
-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 전문
제목에 사용된 ‘문득 흰 바람’은 자유로운 사색의 이미지를 풍긴다. 시인은 제주의 자연, 특히 ‘민오름’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경험한 감각을 바탕으로 소재를 찾았다. 그곳에서 본 바람꽃이라는 표면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의 내적 갈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길을 잃어야 한다면 딱 여기서 잃고 싶다”라는 시구는 삶의 한순간에 완전히 몰입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담고 있다. 이는 선택과 판단의 기로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내면의 질문을 상징한다. “밟을까 꺾을까 아님 매달릴까”는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을 겪는 사람들의 심리적 고뇌를 보여준다. 이는 바로 우리 모두가 마주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 시조를 감상하면서 멕시코계 미국인 가수 티시 히노호사의 「Donde Voy」가 연상되었다. 'Donde Voy'는 스페인어로 '어디로 가야 하나요'라는 뜻이며, 노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 희망을 찾아 헤매고 있어'라는 가사로 마무리된다. 이 노래는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해야 할지 고민하는 이민자들의 방황과 멀티페르소나적 자아를 보여준다. 단순한 문화적 갈등을 넘어 언어와 경계를 허물며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이 노래의 힘은 예술의 본질을 드러낸다. 김 시인의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 역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욕망은 끝이 없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욕망을 지니며, 이는 인생의 지향점이자 삶의 활력이 된다. 그러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시인은 “날밤을 새워도 오르지 못한 민오름 아래”라고 표현한다. 시적 화자는 분주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잠시 쉬어가라고 권한다. “느, 피면 나도 피고/느, 돋으면 나도 돋아”라는 구절에서는 제주어 ‘느’(너)를 사용해 시적 감각을 살려낸다. 네가 피어나면 나도 피어나고, 네가 돋아나면 나도 돋아난다는 뜻으로, 여기서 시적 화자는 ‘너’를 우선시하며 타자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눈에 눈, 잎에 잎 맞추는” 구절에서는 자아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중적인 면모를 수용하려는 긍정적 시선이 엿보인다.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멀티페르소나적 존재로서의 삶을 제시한다. 이러한 특성은 작품 「비가 쏜다」에서도 이어진다.
오늘은 비가 쏜다 뒹굴뒹굴 쉬어/바닥 떠난 발가락들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지/ 짓눌리 발창을 지나 귀마리에 닿았어//
복숭아뼈대로 세운 귀마리 단숨에 돌아/완만한 쥐설 타고 정강이를 내달려/접었다 폈다 자유로운 동모리에 내렸다//
어딘지 익숙한 살맛 엎드린 발가락 품던 맛 /잠지에서 두던이 까진 솔토메기 지대라 /부드럽고 푸근했지만 빛이 그립기도 해 //
꺾는 것과 접는 건 다르다는 것만 대충 보고/룰루랄라 살집 좋다는 잠지페기로 향했다/어딘지 익숙한 살맛 엎드린 발가락 품던 맛//
두던이 위로 올라서면 거기서부터 존둥이야 /북반구와 남반구를 잇는 적도쯤 될까나 /앞쪽 적도 밑으로 배또롱이라는 섬이 보여 //
배또롱 깊이를 몰라 외로울 때 보기로 하고 /적도 둘레는 인류의 고민 같은 거래 /그래서 사람들은 벨트를 치기도 하고 //
구릉지대 올라서면 욥갈리라는 성이 있어/열두 쌍의 뼈로 오랜 도시를 마주 품은/그 성곽 막 벗어나면 바깥쪽 귀퉁이에//
복지는 접근 방법이 달라야 한다고 /결국엔 엄지발꼬레기가 한마디를 내뱉고 /조껭이 감싸 안으며 예술 같은 벼랑 오르면 //
조껭이라는 아늑한 쉼터가 자리하지/시린 손 갈 데 없는 손 심심한 손들 숨어드는 곳/발엔 왜 그런 데가 없는지 모두 부러워하는데//
둑지 혹은 웃둑지라는 전망대가 나오지/뒤쪽으론 등뗑이라는 가파른 지대인데/스스로 제 모습 볼 수 없는 등뗑인 할 말이 많고//
몸이 가진 절벽이자 여백인 등뗑이/맞대면 따뜻해져 나눠 쓰기 좋은 곳/가끔은 쓸쓸하기도 한 풍경 품고 산다는 곳//
위를 봐 대멩이라는 깊은 숲이 보이지/야개기 협곡을 지나야 거기에 닿을 수 있어/야개긴 세울 때보다 숙일 때가 신비롭지//
머리카락 당겨 잡으며 드디어 대멩이 도착 /늘어선 발꼬레기들이 내려다보며 곰지락댄다 /맙소사, 이 모든 것을 내가 지고 사는 거야!
- 「비가 쏜다」 전문
작품 「비가 쏜다」는 13수로 이루어진 장편 연시조로, 신체의 부위를 해부하듯 세밀하게 시적으로 배열한다. ① 제주어를 발효시킨 언어유희와 은유, ② 공간의 시학, ③ 낯설게 하기 자아정체성 성찰 등 독창적인 시적 장치들이 돋보인다. 이는 제주어라는 소재를 오랜 시간 숙성시킨 김 시인만의 시적 감수성과 철학을 담고 있다.
김 시인은 제주어와 표준어의 경계를 허물며, 두 언어를 결합한 새로운 어휘들을 통해 신선하고 낯선 감각을 창출한다. 예를 들어, ‘잠지페기, 두던이, 둑지, 웃둑지’와 같은 표현들은 제주어의 독특한 어감과 느낌을 살려 독자에게 예상치 못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더불어 ‘욥갈리(옆구리) 성'이라는 표현은 신체 부위를 그리스의 역사적 성곽에 비유하며, "열두 쌍의 뼈로 오랜 도시를 마주 품은"이라는 구절을 통해 내면의 단단한 의지와 성장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시인은 제주어의 감각을 통해 신체의 물리적 특징을 정서적 의미로 재구성하며, 작품 전반에 풍부한 은유를 펼쳐놓는다. "잠지에서 두던이까지 솔토매기 지대"라는 시구는 에로티시즘을 내포하며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내면의 복잡성을 표출한다. 또한 "대멩이라는 깊은 숲이 보이지/야개기 협곡을 지나야 거기에 닿을 수 있어"라는 구절은 내면의 삶과 관계 형성을 상징하며, 자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암시한다. 이처럼 김 시인은 제주어를 통해 신체와 공간을 시적으로 재해석하며, 독자에게 낯설고 신선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탁월한 시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신체의 공간을 이동하며 펼쳐내는 발가락 여행은 ‘공간의 시학’ 측면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최근에 재발행한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집과 같은 내밀한 공간이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감정과 상상력의 투영체로 작용한다고 했다. ‘발가락’은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다. 여기서 신체 부위는 내면적인 세계를 내포하는 메타포로 일상적으로 감지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예를 들어 ‘욥갈리라는 성’과 ‘조깽이’라는 아늑한 쉼터는 신체의 특정 부분을 장소로 은유한다. 또한 독자가 그 공간에 대한 신비성과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의 감각적 경험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이는 바슐라르가 말하는 ‘쉼터’와 ‘은신처’의 개념을 연상시키며 발가락 여행이 단순한 신체 탐색이 아니라, 마음속의 다양한 공간을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바슐라르는 집의 공간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했다면, 김정숙 시인은 신체의 공간을 통해 감정과 철학적 깊이 그리고 다중적 페르소나를 탐구하며 독자들의 성찰을 유도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강조한 ‘낯설게 하기’는 김 시인의 작품에서 빛난다. "발가락들이 여행을 떠난다"라는 시구는 물활론적 설정으로 신체 부위를 낯설게 해석하는 방식이다. 발가락이 남반구, 섬, 구릉, 적도, 성곽 등 지리적 어휘를 지나며 전 지구적 멀티페르소나를 떠올리게 한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어딘지 익숙한 살맛 엎드린 발가락 품던 맛"이라는 시구에서는 작가의 따뜻한 관조가 오히려 낯선 감각을 자아낸다. 이는 현대인이 일상 속에서 익숙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느끼는 낯섦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시구 "맙소사, 이 모든 것을 내가 지고 사는 거야!"에서 김정숙 시인은 인간의 다양한 정체성과 내면의 무게를 드러낸다. 특히 “늘어선 발꼬레기들이 내려다보며 곰지락댄다”라는 시구는 복잡한 자아의 갈등과 경험 속에서도 우리를 지탱하는 핵심적 자아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발은 가장 근본적인 자아를 지탱하는 신체 부위로서, 다양한 정체성과 역할을 넘어 우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자아의 본질적 힘을 상징한다. 이 시는 현대인에게 다양한 페르소나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자아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낯설고 익숙한 여정을 계속해 나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던져준다.
시는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에 그 아름다움이 빛난다. 사실, 김정숙 시인의 작품 「문득 힌 바람이 불었는데」와 「비가 쏜다」는 별다른 해설 없이도 독자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와닿는 시들이다. 누군가의 삶에 위로를 건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들은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가 쏜다!’라는 표현처럼, 비 오는 날 멍하니 누워 흰 바람을 느껴보거나, 한뎃잠을 자며 자신의 내면을 여행해보라는 메시지를 시인은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2) 제주어 시조의 역사 인식과 치유
시조가 "시대를 노래한 장르"라는 것은 시조가 단순한 서정적 문학 형식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는 문학적 도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조는 각 시대의 정신과 감정을 담아내어, 당대와 후대의 독자들에게 시대적 정서를 전달하고 공감하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김 시인은 4·3을 주제로 한 시조에서 제주민들의 역사적 아픔을 성찰하며, 그 비극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한다.
김 시인의 작품 「빙세기를 아시나요」는 제목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빙세기'라는 제주어로 살며시 미소 짓는 모습을 표현한다. 이 시조는 4수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두 번째 수는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해 리듬과 긴장감을 더한다. 작품은 기승전결의 서사적 흐름 속에 서정성이 자연스럽게 깔려 있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리를 죽인 꽃잎”은 그들의 억압된 감정과 목소리를 내포하며, “꽃잎이 방긋 벌어지는 동안”은 김달삼과 김익렬의 회담에 잠시나마 기대를 걸었던 제주민들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수는 사설시조로, 회담을 지켜보는 제주민들의 긴장감을 담아냈다. 사설의 형식은 리듬과 운율을 자유롭게 만들어, 이야기를 서서히 끌어가면서도 점진적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다. "미소가 방긋방긋 터지는 것처럼 빙세기도 빙싹 빙싹 얼음에 싹을 낸다"는 표현은 웃음과 얼음 속 새싹의 리듬적 반복을 통해 긴장과 해소의 교차를 표출한다. 이처럼 시인은 언어유희의 감각적인 대비를 통해 고통과 희망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그렇게 그런 세기 살아낸 사람들이/ 너나없이 빙세기를 가지고 가 버렸다”라는 구절은 담판 이후 기대가 무너진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수의 "몇 세기 더 살아야 빙세기 돌아오나요?" 여기서 ‘몇 세기’라는 표현은 그 회복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암시하며, 제주민들의 깊은 상처와 고통을 강조한다. ‘빙세기’는 단순한 미소를 넘어, 시간이 흐르며 아픔이 골동품처럼 고착된 현실을 풍자하는 비판적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4·3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역사의 상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제주민의 비극은 「목 놓아 울지 못한 사람들은 말에다 곡을 할까」와 「귀순 삐라 고장섶 삐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략/다 죽여 막 억울하고 몬 죽여부난 하도 칭원호곡 / 살려거든 입 다물고 살구정호건 속솜호곡/ 할수없이 보내주고 홀수어성 보내주곡// 껴안아 다독여주며 쿰엉 어릅쓰러주곡// 진짜 울음에는 눈물방울이 없다/ 목젖 아래서 곡곡하며 길들여질 때/예 살던 일 삼 칠 번지 사람이 사라졌다
- 「목 놓아 울지 못한 사람들은 말에다 곡을 할까」 부분
이 시조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으나, 제목 “목 놓아 울지 못한 사람들은 말에다 곡을 할까”와 “진짜 울음에는 눈물방울이 없다”라는 시구에 응축된 의미 위주로 살펴보겠다. 시조에서 반복되는 ‘곡’은 제주어의 종결어미 ‘곡’과 죽은 이를 애도하는 ‘곡(哭)’ 등 동음이다. ‘곡’의 반복은 울음을 억누르고 참아야 했던 절망적 상황을 강조한다. “목 놓아 울지 못한 사람들은 말에다 곡을 할까”라는 제목은 비극적 현실에 대한 은유적 풍자로 읽을 수 있으며,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된 사회에서 슬픔조차도 ‘곡(哭)’으로 변해버리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4·3 사건은 무려 7여 년간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극심한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며 많은 희생을 치렀고, 살아남은 이들도 극도의 공포와 억압 속에서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진짜 울음에는 눈물방울이 없다”는 시구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눈물방울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눈물이 마른 상태를 넘어, 감정이 메말라 더 이상 슬픔조차 드러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의 메마름(Emotional Numbness)’은 극도로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감정을 차단하여 무기력해지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 중 하나로, 제주민들 역시 억압 속에서 고통을 표출할 최소한의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진짜 울음”은 이러한 감정의 극한을 상징하며, 고통을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의 절정에 이른 상태를 나타낸다. 김정숙 시인은 이 구절을 통해 4·3 사건의 비극적 현실을 깊이 성찰하게 하며, 그에 대한 인간 내면의 상태를 통찰하게 한다.
작품 「귀순 삐라 고장섶 삐라」는 제주어로 '흩뿌려라'를 의미하는 “삐라”와 4.3 사건 당시 이념의 상징이었던 ‘삐라’라는 동음이의어를 결합하여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8·15 해방 이후 삐라는 좌우익 간의 심리전에서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살려 주켄 삐라 호난/산에서 노려왔주게”라는 시구를 통해, 희생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삐라로 인해 다시 생존을 위협받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처럼 삐라는 '소리 없는 총성'이라 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생명을 위협받는 이념적 도구였고, 시인은 이를 시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시어의 독특한 배행이 눈에 들어온다. "포 뜰 포 뜰"은 벚꽃잎이 하늘에서 유유히 떨어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이다. 이번 시조에서 한 글자씩 각 행에 배열된 시어는 형식과 내용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문학적 접근으로 해석된다. 독자의 머릿속은,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평화로운 장면을 상상하게 하며, 동시에 삐라의 처절한 고통과 대립하게 한다. 평화와 고통. 여기서 시인은 시어의 중의적인 대입을 통해 당시 처절한 상황을 더욱 부각한다.
종장 “산목련 봄이면 봄마다/소지 소지 뿌리네”는 서정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으며, 상생의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산목련’은 표면적으로는 봄에 피어나는 생명력의 상징이지만, 4·3 희생자들의 영혼과도 연결된다. 산목련이 매년 꽃을 피우듯, 그들의 고통과 아픔도 반복적으로 되살아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소지 소지 뿌리네”라는 표현은 삐라처럼 흩어져 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이 여전히 잊히지 않고 지속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희생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동시에, 자연의 순환과 재생을 통해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김 시인은 4·3을 다룬 작품들을 통해 제주민들의 고통을 성찰하며, 희생자들의 아픔을 기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주로 언어유희와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역사적 아픔을 표현하면서도, 자연의 순환을 상징하는 시구를 통해 치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4·3의 역사를 기억하면서도 상생의 희망을 찾아내길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풍자적 시선으로 본 자연과 사회
문학에서 풍자는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작용해 왔다. 특히 시조와 같은 전통적 형식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풍자적 시선은 독자에게 깊은 성찰을 유도하며, 비판적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전달한다. 김 시인의 작품 「개예감」과 「눈빛 바코드」는 현대 사회의 발전 속에서 전통과 자연이 상업적 논리에 종속되는 현상을 비판하며, 그 심오한 의미를 언어적 유머와 날카로운 시각으로 시조 창작에 임한다.
"어멍 아방 손심엉 죽굼 살굼 죽을락 살락"이라는 시구는 어린 시절의 운동회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던 추억을 환기하는 동시에 가족과 함께 살아가며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여정을 돌아보게 된다. "개이득 개꿀 개좋음 개멋짐 개웃김 개찌질 개고생 개환장시대 오나요"는 현대 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 접두사를 통해,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성공에 대한 과장된 찬사와 경멸적인 평가를 동시에 표현한다. 이는 개발과 기술 발전이 가져온 긍정적인 측면인 “개이득, 개꿀, 개좋음” 등의 표현과, 그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 “개찌질, 개고생, 개환장” 사이의 긴장을 풍자적으로 접근한다.
마지막 시구인 "개고생 개환장시대 오나요/ 진짜로 개소리 개뿔 개판 개차반이 그리울지도"는 시의 전반부에서 이어진 과감한 부정의 언어 표현이 절정을 이루며, 이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렬한 표현들 뒤에 배치된 "그리울지도"라는 시구는, 시적 서사에 묘한 서정성을 입힌다. 이는 개발되어 가는 현재 상황이 어쩌면 과거의 고생과 힘겨웠던 순간들이 그리워질 만큼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역설적 인식을 담고 있다. 아울러 김 시인의 정서를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경제와 기술 발전 속에서 사라져가는 가치와 전통에 대한 회한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바코드’는 오늘날 상품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책 대출 인증, 각종 티켓 인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김 시인은 상업과 소비의 대표적인 도구인 '바코드'를 자연을 상징하는 '눈빛'과 결합해 시어로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자연의 풍경이 소비의 기호로 변화하는 낯선 모습에서 독자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농바치(사냥꾼)는 자연과 함께 생계를 이어온 인간의 오래된 직업이지만, ‘품절’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연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암시한다. "전설의 사냥개 늬눈이반둥겡이 단종입니다"는 자연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고, 상업적 논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지달이 삵, 꿩, 노루 등은 자연의 중요한 존재이지만, ‘재고 없음’이나 ‘이벤트용’으로 묘사되며, 자연이 인간의 오락과 소비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을 풍자한다. “들개 멧돼지는 원플러스 원"이라는 표현은 자연이 상업적 자원으로 소모되는 현실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상업 용어와 자연을 결합한 기묘한 표현은 소비주의가 자연의 본질을 왜곡하는 모습을 지적하며, 시적화자는 이미 깊이 스며든 현대 사회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김 시인의 시조 「개예감」과 「눈빛 바코드」는 풍자적 시선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자연과 전통이 상업적 논리에 의해 변형되고 소외되는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자연의 순수한 가치는 점점 기술과 개발의 압박 속에서 상업화되고 있지만, 김 시인의 독창적인 언어 선택과 유머는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애도와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4) 오래된 미래의 ‘제주어’ 시조
오래된 미래는 과거의 유산이 단순히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시대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 시인은 제주어를 이러한 '오래된 미래'로 인식하며, 시조를 통해 그 가치를 보존하고자 한다. 그는 제주어가 소멸 위기에 처한 현실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며, 제주어와 표준어의 공존을 꿈꾼다. 비록 제주어가 일상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그 문화적 가치와 언어적 독창성을 알리고자 하는 김 시인의 의지는 아래 작품들에 일관되게 드러난다.
단순한 질문 형식인 "왜 이리 예쁜 거냐/서 오누이 하는 짓이" 속에는 오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지를 담아내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예쁜’ 오누이의 먹는 동작들이 제주어로 생동감 넘치게, 마치 사설처럼 흐름을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줴어 먹고,' '조창 먹고,' '톡톡 조가 먹고'와 같은 표현들은 제주어 특유의 생생한 감각을 전달한다. 이는 단순한 먹는 동작을 넘어서, 각각의 동사가 감각과 행동의 차이를 정교하게 그려내며, 독자가 그 장면들을 눈앞에서 보는 듯 상상하게 만든다.
이처럼 다양한 동사의 사용은 시적 리듬을 만들어내며,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제주어만의 독특한 맛을 더해준다. "짜고 달고 쓰고 신 건 물 담가 울려 먹고", "입대서 덥석 그차 먹고"와 같은 구절은 각각의 맛이 입안에서 퍼지는 순간을 공감각적으로 전해주며, 독자들에게 음식의 풍미와 함께 마음에 닿는 따뜻함을 전해준다. 시인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장면을 그려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맛과 감정을 연결하여 독자들이 시조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마지막 부분의 "어머니 눈엔 꿀 뚝뚝/다디달던 그 시간"이라는 구절은 따뜻한 식사 시간의 소중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순간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가족의 사랑과 추억을 담은 삶의 의미를 포착하고 있으며, 그 시간이 시적 언어를 통해 다정하게 재구성된다. 시적 화자는 아이들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행동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드러낸다.
한 소쿠리의 글을 먹으며 봄 한철을 살았다/ 혀를 감싸 안는 자모음 유전자들이/ 나라는 행성 속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중략 2 首 //나물은 고전이었다 /볼록렌즈가 쌉싸롬했다//
- 「문자 돋아나는 봄」 부분
이 시조에서 "문자 돋아나는 봄"이라는 제목은 생명력이 깃든 언어의 이미지를 통해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의 첫 구절인 "혀를 감싸안는 자모음 유전자들이 나라는 행성 속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는 언어의 유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언어가 인간의 삶과 사고에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아울러 과학적 이미지와 결합한 언어의 묘사는 시조에 새로운 감각적 차원을 부여한다. "혀를 감싸안는 자모음 유전자들"과 같은 표현은 언어의 유전적 특성을 생물학적으로 해석하며, 언어가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진화하고 있음을 시적으로 드러낸다. 이로써 시조는 전통과 현대, 자연과 과학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되어,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종장의 "나물은 고전이었다"와 "볼록렌즈가 쌉싸롬했다"는 구절은 자연과 전통이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시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언어와 자연이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독자들에게 낯설지만 신선한 시선을 제공하며, 시조가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유연하고 변화무쌍한 장르임을 일깨워준다.
가나다라 매어 놓으면/ 말 다시 돌아올까 // 가불지 말게 대 끊기지 않게 공들인 말/12행 생략/ 파니 파니 이랑 이랑 같은 말다른 소리 나는 말/ 하간디 방방곡곡에 널브러져 사라지는 말// 구글은 알고 있을까 집 나간 말의 궤적을
- 「말 잃고 사전 고친들」부분
끊임없이 새로운 작법을 시도하는 김정숙 시인. 이 시조는 한글 자음의 순서와 제주말의 유희적 표현을 활용하여 언어의 상실에 대한 성찰을 드러낸다. 첫수 "가나다라 매어 놓으면 말 다시 돌아올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두 번째 수에서는 ‘가불지 말게’, ‘나영 느영’, ‘다 몬딱’, ‘라랄라’ 등 한글 자음의 첫음절을 변주하며 제주의 다양한 모습과 정서를 풍부하게 풀어낸다. 아울러 마지막 수에서는 "구글은 알고 있을까/집 나간 말의 궤적을"이라는 시구는 디지털 시대에 제주어가 소멸하는 현실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이 표현은 기술이 언어의 본질적 가치를 완벽히 담아낼 수 없음을 암시하며, 제주어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정체성과 기억의 중요한 매개체임을 강조한다.
이별이라는 단어는 어디를 대입해도 아픔을 느끼는 언어이다. 제주말과의 이별을 예고하는 이 시조는 자연의 소재를 통해 언어의 상실이 불가피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게난 눈진벵인 진눈깨비옌 하고/ 쇠나기 혼 주제 호민 소나기 한차례옌 하고“ 왼쪽에 제주어, 오른쪽에 표준어를 병렬로 배치하여 제주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전달하면서, 제주어의 독특한 음운과 어감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아울러 제주어는 단순한 방언이 아니라, 그 지역의 자연과 생활을 담아내는 언어임을 체감하게 한다.
"말로 할 땐 끄덕 끄덕 귀가 알아 듣는데/글로 써서 읽으라 하면 입이 버벅 버벅 거려"는 제주어를 이해는 하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게 붉은 입술이 식어가는 거구나"는 제주어가 우리의 일상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음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강렬한 시구다. 이는 언어가 단순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표현의 생명력이 점차 식어가고, 언어적 감각과 정체성마저 잃어버리는 과정을 표출한다.
결국, 김 시인의 시조들은 제주어에 깃든 삶의 가치를 문학적으로 되살리고 있는 거다. 「문자 돋아나는 봄」과 「먹는 동사」와 같은 작품에서는 음식과 일상의 사소한 동작을 통해 제주어가 가진 독특한 생명력을 드러낸다. 「말과의 이별 방식」과 「말 잃고 사전 고친들」에서는 사라져가는 제주어의 소멸 위기를 일깨우며, 제주어가 지닌 고유한 정서가 담긴 ‘오래된 미래’로서의 삶의 흔적이 후대에도 이어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내포되었다.
나오며- 제주어 시조의 전망과 제안
김정숙의 제주어 시조집은 마치 근현대사의 대하소설을 읽어낸 것 같다. 시인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과거를 거울삼아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김 시인은 제주어에 표준어를 얹으면서 소통을 바란다. 제주어에는 어린 시절의 자아와 과거 부끄러운 역사를 소환한다. 그것은 곧 표준어로 획일화 되어가는 요즘, 역사의식과 자아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을 향한 질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정숙 시인은 질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주어와 표준어의 절묘한 결합으로 과거와 현재를 문학적으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인은 제주 자연의 결을 제주어의 섬세한 결 속에 풀어내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독창적인 시 세계를 창조했다. 그녀는 자연의 소리를 제주어의 리듬에 녹여내면서도, 첨단 도구와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를 하나의 시적 공간에 담아낸다. 신체를 작은 우주로 형상화하며, 다중적 자아를 지닌 현대인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게 한다. 김 시인의 제주어에 대한 애정과 집념은 ‘오래된 미래’로서의 제주어를 현재와 미래를 잇는 살아 있는 언어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김 시인의 문학적 성취는 소멸 위기에 처한 제주어에 대한 독자층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제주어에 대한 인식 변화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제주어의 가치와 보존을 위한 연구와 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시조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는 제주의 정체성을 담은 작품으로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층 확장을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해 본다.
첫째, 초등 고학년(5학년 이상)을 위한 학교, 도서관 등 기관에서의 독서 토론 활동을 권장한다. 이 시조집에는 초등 고학년이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우선, 놀이 문화를 주제로 한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과거와 현재의 제주 문화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놀이계보」와 「할아버지 판결문」을 통해 학생들이 과거의 놀이 문화를 배우고, 현대의 놀이와 비교하는 활동을 통해 제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시적 감수성으로 깊이 이끌어 낼 수 있다. 또한,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단시조 시리즈를 활용하여 학생들이 제주의 정서를 ‘제주어’와 함께 직접 느껴보는 활동을 할 수 있다.
둘째, 중·고등학생을 위한 정체성 성찰 활동과 사회 인식을 위한 독서 활동 등의 비교과 특별 활동을 제안한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중·고등학생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기이므로, 시조 및 문학 작품을 통해 정체성 성찰과 진로 탐색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와 「비가 쏜다」는 청소년들이 멀티페르소나라는 주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꼬꼬댁 꼬꼬댁 꼬꼬정책」, 「개예감」, 「눈빛바코드」, 「빙세기를 아시나요」 등은 사회적 인식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어, 학생들이 환경, 교육, 역사 등 제주 사회의 문제를 토론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다만, 청소년들이 이 시조집을 접할 때는 학년에 맞는 시조를 선정하고, 시조 수업을 이끌기 위한 적절한 독서 토론 발문과 독서 지도안이 미리 준비되어야 한다.
셋째, 제주어 시조집을 활용한 성인 독서 모임 및 인문학 소모임이 활성화되었으면 한다. 성인 독자들에게는 도서관에서의 북토크나 인문학 소모임에서 이 시조집을 활용함으로써 제주어와 제주의 정서를 되새기는 소중한 자리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김정숙 시인의 북콘서트에서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에 수록된 시조들의 창작 배경과 시인의 삶을 연결하며 제주어의 가치와 추억을 되살리는 시간이 있었다. 이처럼 시조집을 독서 모임이나 문학 토론의 주제로 활용하면 성인 독자들 사이에서 ‘오래된 미래’로서의 제주어의 가치와 제주 감수성을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 교감의 장이 될 것이다.
김 시인의 시조집은 청소년과 성인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인 시조 형식에 현대적인 감각을 결합한 제주어 시조집의 문학적 깊이는 시조 작법의 미래 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시조의 현대적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요한 밑거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잊혀져 가는 언어를 다시 피워낸 시조 문학의 정원사 김정숙. 시인은 행간마다 제주어의 생명력을 섬세하게 가꿔 나간다. 디지털 시대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제주어를 시적 리듬으로 따뜻하게 되살려낸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는 제주어 시조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준다. 이는 제주어와 제주의 정서를 알리는 문학적 자산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김정숙의 시조는 제주어의 미래를 밝은 지평으로 이끌며 독자들에게 긴 울림을 남긴다.
※ 200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제주출신 김정숙 시인은 『나도 바람꽃』, 『나뭇잎 비문』, 제주어 시조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에 있다』를 펴냈습니다.
※ ‘아래아’는 인터넷 표기가 불가능하므로, 시조집 표기와는 달리 시평에서는 편의상 ‘ㅗ’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