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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천 할머니 삶터, '이제 외롭지 않아요'
무명천 할머니 삶터, '이제 외롭지 않아요'
  • 윤철수 기자
  • 승인 2008.04.27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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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보존 정성 모아져 새단장...방문객 이어져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다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 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름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꽂히고

어둠이 깊을 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갈이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디는 말들을 알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다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무명천 할머니 / 허영선 시인


4.3의 광풍 속에서 턱을 잃고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 한평생 슬픈 삶을 살다 2004년 9월8일 세상을 떠난 '무명천 할머니' 진아영 할머니의 생가가 이제 말끔하게 단장돼 어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제주시 한경면 월령리 진아영 할머니 생가에는 어린이들과, 함께 나들이에 나선 이들이 찾아들었다. 4.3의 상징인 무명천 할머니의 삶터를 보전하자는 각계각층의 정성이 모아지면서, 돌담 옆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났다.

잔디로 말끔히 단장된 마당. 작은 정성들이 모아지면서 비가 새던 천장에는 방수공사를 하고 도배도 새로 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지 4년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아직도 마당 한켠의 수도꼭지에서는 금방이라도 할머니의 손길이 미칠 듯, 물이 준비되고, 전기시설도 예전 그대로다.

작은 공간이지만 할머니가 머물렀던 방에는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상영할 수 있는 작은 텔레비전 한대와 DVD도 마련됐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깔끔하고 곱게 정돈된 물건들은 할머니가 가슴 속 깊이 묻고 살아왔던 세월을 보는 듯 하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위원회'(공동대표 정민구 박용수)가 새 단장을 한지 한달만인 27일 제주주민자치연대 회원들이 자녀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두개의 정낭이 열리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연분홍 꽃들이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삶터 보존에 노력했던 고성환씨는 그동안 삶터 보존을 위해 진행해온 집단장 활동에 대해 소개했다. "할머니 삶터를 위해 돌담을 차곡차곡 쌓듯이 작은 정성들이 모았졌습니다.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이 모여 각 자의 재주만큼 힘을 보탰습니다. 방수공사도 방수재주를 가진 회원의 노력봉사로 했고, 벽지단장도 회원의 노력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는 "한 땀 한땀 수를 놓아가며 이제 할머니의 삶터를 단장했다"며 "주말마다 시간을 쪼개 월령리 할머니 집을 찾아 나선 희망의 발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방문한 어린이들은 방 안에 마련된 TV를 통해 할머니 일대기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진아영 할머니의 슬픈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마당을 예쁘게 가꾸는 일에도 작은 손들의 놀림이 더해졌다.

무명천 할머니의 생가가 4.3을 모르는 어린 후손들에게 산교육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는 4.3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당시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목숨은 부지했으나 턱을 잃어 무명천으로 턱을 감싸고 한평생을 살아왔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55년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오다 2004년 타계했다.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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