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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①]고통의 현장, '부산.마산 형무소'를 가다
[동행취재①]고통의 현장, '부산.마산 형무소'를 가다
  • 박소정 기자
  • 승인 2008.11.03 0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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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하지만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청명했던 10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9시, 제주국제공항 3층 출발 대합실에는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김평담, 김용범, 윤춘광, 양동윤)가 제주4.3사건 60주년을 맞아 2박 3일의 일정으로 추진한 '2008 전국 4.3유적지 순례' 참가자들이 하나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1948년 4.3당시, 젊은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경찰과 군인 등에게 끌려가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전국의 형무소로 보내져 고통의 삶을 살았던 '4.3 수형 생존인'들. 이런 이들이 60년 전, 악몽과도 같던 그날의 현장을 직접 방문해 어렵사리 그 고통의 기억을 되뇌었다.

이번 순례에는 4.3 수형 생존인 이보연(80), 양일화(80), 부원휴(80), 김영주(87), 양규석(87)씨와 4.3도민연대 회원, 4.3연구소 연구원, 김종민 4.3처리지원단 전문위원, 제주도내 언론사 기자 등이 참석했다.

'60년 만의 4.3과 동행'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순례는 말 그대로 수형 생존인들이 60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 고난을 겪었던 현장인 부산, 마산, 대구, 인천, 마포 형무소를 방문, 이들의 기억을 듣는 형식으로 진행돼 그 의미를 더했다.

공합대합실에서 본 수형생존인 5명은 다소 어둡고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벌써부터 그 때의 악몽이 생각나는 듯 했다. 하지만 먼저 떠난 보낸 옛 동무들을 60년 만에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감회 또한 새로운 듯 했다.

이렇게 순례단은 기대반, 걱정반의 심경을 드러내며, 전국 4.3유적지 첫번째 순례지인 '부산 형무소' 터로 떠났다.

#"요강 위로 올라간 뒤, 작은 철장으로 밖을 볼 수 있었죠"

순례단이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에 위치한 '부산형무소 터'. 이 곳은 1896년 9월 일본군 수비대가 연병장으로 사용하다가 1909년 10월 21일 부산 감옥소가 들어서게 됐다.

이어서 1923년에는 부산감옥소가 '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부산 교도소로 이름이 바뀐 이 곳은 1973년 부산 사상구로 교도소를 옮기게 되고, 1975년 이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형무소의 흔적이 없어졌다. 이 아파트는 옛 형무소 터에 들어섰을 당시, 형무소 터라는 선입견이 있어 분양이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트 단지, 상가 등 현대식 건물들이 자리잡은 이 곳에서는 부산 형무소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부산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김영주 할아버지(87)는 '옛 형무소 터'를 쭉 둘러보았지만, "기억이 흐릿하다"는 말만 거듭 되풀이 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아파트 맞은 편에 있던 '부산 대청산'을 가르치더니, 옛 형무소의 위치를 기억한 듯 형무소 수형 당시의 이야기를 쭉 풀어놨다.

"우리 감방에는 30명이 한 방에서 생활했어요. 우리는 일반 수감자와는 달리 노역이나 운동도 못했고 하루종일 깜깜하고 좁은 감방에서 지냈어요. 빽빽하게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살았는데, 옷이 땀으로 다 젖고 땀냄새도 고약했어요. 또, 몇일 지나니깐 굶거나 전염병 등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아요..."

그는 또 당시 감방에 있던 요강 위로 올라가 작은 철장 사이로 '대청산'을 봤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작은 철장 구멍으로 그는 수감자들이 차량에 물건처럼 내팽겨지는 모습을 봤다고도 진술했다.

"감방에 요강 하나가 있었는 데 그 위로 올라가면 작은 철장 사이로 밖을 볼 수 있었어요. 그 때 저 산(대청산), 이름은 모르겠지만 저 산을 봤어요...그리고 그 구멍으로 사람을 던지면서 트럭에 싣는 모습을 봤는데, 한 간사가 '죽이러간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었어요. 그 이후 그들이 총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기 시작했어요..."

그의 '부산 형무소'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그는 '부산 형무소'에서만 수형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지난 1949년 7월2일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받은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은 후, 대구 형무소로 가게 됐다. 대구 형무소에서 3~4개월 정도 수감생활을 하다, 부산 형무소로 이감돼 3개월 정도 생활하다가 또 다시 마산 형무소로 이감돼 7년여 동안 수형생활을 하고 석방됐다.

#"말 안듣는 송아지 처럼 끌려다녔어요...너무 무서워죠"

'부산 형무소 터'에서 김영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두번째 순례 장소인 '마산 형무소 터'로 이동해 그의 못다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두번째로 방문한 곳은 경남 마산시 오동동에 위치한 '마산 형무소 터'. 이곳은 1910년 7월 1일 부산감옥 마산분감으로 설치돼 들어섰다가 1946년 마산형무소로 승격됐다. 마산형무소가 '마산 교도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1970년 마산교도소는 마산시 회성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직접 찾아가 본 옛 마산 형무소는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주차장 안 쪽에는 옛 마산 형무소 담벼락을 복원시켜,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또, 주차장 입구에는 '옛 마산 형무소'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 곳 지역 주민들은 '마산 형무소'는 주차장 뿐 만 아니라 뒷 쪽에 있는 천주교 마산 교구청과 그 앞의 삼성생명 빌딩을 포함한 모두가 형무서 터라고 했으며 현재 터 흔적을 알리는 비석의 위치는 정문에서 한참 비껴난 곳이라고 말했다.

이 곳에서는 '옛 부산 형무소'에서 못다한 김영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마련됐다. 김 할아버지는 어린시절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게 된 사연에 대해 하나씩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상황이 생각났는지, 다소 흥분된 격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의 가족은 1949년 당시,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서 목장일을 했다고 했다. 그는 집에 있으면 군인들이 다 잡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군인과 경찰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군인에게 잡혀 주정공장터(현 제주항 맞은편 공터) 창고에 갇히게 됐다. 이 후 불법 군사재판을 받게 됐고, 형량도 모른채 배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갔다.

"사람이 사람같지 않고, 말 안듣는 송아지 처럼 끌어가니깐...배는 어디론가 흘려가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겠고 왜 내가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무서웠어요. 도착한 곳은 바로 대구 형무소였죠.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 정도 있다가 부산 형무소로 이감됐다가, 마지막으로 마산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됐어요"

그는 대구와 부산 형무소에서는 일반 수감자와는 달리 노역과 운동 등을 할 수 없었지만, 마산에서는 피혁노동으로 구두를 제작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억울하게 끌려와서 이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꼭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컸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제주에 보고싶은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잡혀왔을 때가 27살이었어요. 결혼을 일찍한 내게는 아내와 사랑스런 딸 하나가 있었죠. 너무 보고싶어서 많이 울기도 했어요. 가족들 때문이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구두기술을 배우게 됐어요" 

그는 그렇게 7년이 지난 뒤에야 이 고통의 공간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됐다. 7년 동안의 고통이 고스란히 다가왔는지, 그는 발걸음이 쉽게 이 곳을 떠나지 못했다.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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