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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②] 고통의 현장, '옛 대구 형무소'를 가다
[동행취재②] 고통의 현장, '옛 대구 형무소'를 가다
  • 박소정 기자
  • 승인 2008.11.03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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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4.3유적지 순례 2일째인 11월 1일. 세번째 순례 장소인 '대구 형무소'를 찾아갔다.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 위치한 '옛 대구 형무소 터'.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제주 4.3사건 관련 재소자 200여명을 포함한 4000여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가운데 내란죄, 살인죄,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형무소에 수형됐다.

대구형무소에 보관중인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 명부에는 1402명 재소자 란에 '군경에 인도'라는 도장이 찍혀있었으며, 이 중 제주 4.3관련 재소자는 142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이 중 생존이 확인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경산의 코발트 광산이나 가창골에서 학살된 것으로 조사됐다.

'옛 대구 형무소 터'를 찾기는 그리 쉽지 만은 않았다. 대구형무소에 대한 기록이 없어 대구시청에서 말해 준 주소와 언론보도된 내용을 갖고 유추해 이곳을 찾아갔지만, 그 곳은 대구소년형무소였다. 결국, 대구 주민들에게 구두로 물어보면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옛 대구 형무소 터를 찾을 수 있었다. 고층건물들로 인해 어디 하나 옛 대구 형무소 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곳에서 만난 대구주민들은 비교적 대구 형무소 터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만난 현지 대구 주민 박재휴(85)씨와 이상임(76.여)씨에 따르면, 현재 대구 삼덕교회 터가 대구 형무소 사형장이었고 그 뒤쪽에는 남대구 경찰서와 육군본부 등이 있어서 대구시민들의 발걸음이 드물었다. 이들은 또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잘 듣지 못했지만, 가끔 영남일보를 통해 사형자 명단을 가끔 보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일반재판을 통해 대구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양규석 할아버지(87)는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제일 높은 건물이 3층이었는데, 지금은 고층건물들로 인해 너무도 변해버렸다"며 당시 대구 형무소 터를 기억하면서 "60년 만에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난 후, 양 할아버지를 통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물어봤다. 그는 4.3 당시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다가와 '포고령 2호'를 위반했다며 경찰서에 같이 가야겠다며 안덕경찰서에 데려갔다고 했다.

이 곳에서 수없이 취조를 받았고 온갖 구타를 받은 후 배에 몸을 실어 광주 형무소까지 가게됐다. 이 곳에서 그는 '살인.방화죄'로 10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 형무소로 이감됐다.

이 후, 그는 항소를 했지만, 대구 형무소장이 방송을 통해 "재심을 포기안하면 군법회의에 회부된다"고 말해 무서운 나머지 재심을 포기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경찰들이 잡아갔어요. 안덕경찰서에 가보니 15명 정도 있었는데, 이 중에 10명은 광주형무소에서 대구형무소로 같이 왔고, 나머지는 모르겠어요... 재심도 할 수 있었는데, 시국이 그렇다 보니 결국 포기하고 형량을 다 채우고 나왔어요. 아내와 내 자식들을 놔두고 온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어요. 그리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곳에서는 이날 옛 대구형무소에서 생사불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진혼제례를 봉행했다. 손수 제주도에서 만들어가 제례음식을 정성스럽게 올리고 먼저 떠난 4.3영령들의 넋을 달렸다.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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