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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③]고통의 현장, '마포.인천소년 형무소'를 가다
[동행취재③]고통의 현장, '마포.인천소년 형무소'를 가다
  • 박소정 기자
  • 승인 2008.11.03 0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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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배가 고파서 밖에 자라나는 풀을 뽑아서 소금에 찍어서 먹었어요. 먹으면 입도 시퍼렇게 변했지요. 인천소년형무소는 젊은 10대가 왔었는데, 대부분 이질과 설사병으로 죽어 나갔어요..."

전국 4.3유적지 순례 3일째인 지난 2일. 옛 대구형무소 희생자 진혼제례에 이어, 네번째 순례 장소인 '인천소년형무소'에서도 옛 인천소년형무소' 희생자를 기리는 진혼제례가 봉행됐다.

경기도 인천시 학익동에 위치한 '옛 인천소년형무소'는 일제강정기인 1938년 3월 인천지역에 죄수를 수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형무소는 미군정 시기인 1947년에 인천소년형무소로 개칭됐고, 1962년에는 형무소 명칭이 교도소로 바뀌면서 인천소년교도소로 개칭했다. 이어서 1990년에 인천 소년 교도소가 충청남도 천안시로 이전하고 천안소년교도소로 바뀌었으며 기존의 인천소년교도소는 미결수를 수용하는 인천 구치소로 개편됐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총 1300여명의 수형자가 생활했으며, 제주 4.3관련 수용자는 1차 군법회의 때 166명, 2차 군법회의때 194명으로 총 36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인천소년형무소도 마찬가지 고층건물 등으로 인해 '옛 인천소년형무소'의 모습을 사라져버렸다.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이보연, 양일화, 부원휴 할아버지.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온 수형 생존인들. 60년 만에 처음으로 이 곳을 방문하니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지난 1948년 12월 27일 제1차 군사재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던 양일화 할아버지는 하얀 B4용지에 당시의 형무소 모습을 그리며 설명하는 등 정확히 형무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양 할아버지에게 이 곳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 물어봤다. 양 할아버지는 쌓아왔던 고통이 터져버린 듯 40분가량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양 할아버지가 19살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이 곳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서북청년단에게 잡혀 1구서(현 목관아지)에 끌려갔다. 그는 5개월 동안 1구서에서 전기고문과 취조 등으로 받았다고 했다. 제주법원이 "좌익세력에 쌀과 돈을 줬냐"라는 질문에 그는 죽는 게 무서워서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했다.

"형량도 모르고 죄목도 모른채, 인천소년형무소 입구에서 내란죄와 금고로 형량을 내렸어요...제주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데, 나를 죽일 것만 같아서 무조건 '그렇다'라고 대답을 했어요...대부분은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다시 이 곳에 오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어서 함께 온 부원휴 할아버지도 4.3당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부 할아버지는 4.3당시 제주농업고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 갑자기 군인이 집에 들이닥쳐 잡아갔다고 밝혔다.

"당시, 군인이 좌익에 가담했냐고 물어봤어요. 나는 어리고 하니깐 절대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적으로 끌어갔어요. 전기고문도 하고 장작으로 막 몸도 때리고 너무 무서웠어요. 제주법원에서 재판을 하던데, 난 그게 재판인지도 몰랐어요..."

그는 1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생활을 했다가 풀려났다. 부 할아버지는 수형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겪어던 고통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1년이라는 선고가 이렇게 큰 사회적 제약을 받을 지 몰랐어요.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회적 제약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인천소년형무소에 들어오게 된 제주의 젊은 청소년들은 목포를 통과해 기차를 타고 인천소년형무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질과 설사병으로 죽어나갔다. 어린 나이에 아무 이유없이 끌려온 이들의 60년 동안의 고통을 이루말할 수 없는 듯 하다.

#"4.3,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마지막 순례지역인 '마포 형무소'에 찾아갔다. '옛 마포 형무소 터'에는 현재 서울서부지방법원과 서울지검서부지청이 들어섰다. 이 곳은 1950년 한국전쟁 직전 마포형무소에 수감중이던 4.3관련 제주출신 재소자들은 4.3당시 두 차례 치러진 민간인 대상 국법회의 수형인이었다.

1948년 제1차 군법회의로 마포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수형인은 120명 내외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1949년 제2차 군법회의로 복역 중이던 수형인은 350명 내외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이날 마포형무소 유적지 기행에는 특별한 손님이 자리를 함께 했다. 마포형무소에 재소하다가 북한 의용군에 편입돼 복무하다가 광주경찰서로 연행, 출옥한 김상연 할아버지(84.서울시 마포구).

김상연 할아버지는 1943년 교원생활을 하던 중 1945년 3월 1일 경찰서와 재판소 일부만 제외하고 총파업을 하던 그 때 학생들을 데리고 제주시 북초등학교에 모였다는 이유로 파업 주동자로 몰려 1년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왔다고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제1차 군법회의에서 좌측에 돈을 건네줬다는 증거가 포착됐다며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 당시 상황을 이같이 회고했다.

"취조도 받고 죽도록 매도 맞고 구사일생이 아니라 열 두번, 열 세번도 넘는 위험을 넘기고 아슬아슬 살아남은 건이데...그 때의 고통을 오늘 하루동안 이야기하라고 해도 다 못할 거예요."<미디어제주>

<박소정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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