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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고통의 현장, 형무소의 기억을 더듬다
60년 전 고통의 현장, 형무소의 기억을 더듬다
  • 박소정 기자
  • 승인 2008.11.02 2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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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4.3도민연대, 수형생존인 전국 4.3유적지 순례

1948년 4.3당시, 젊은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경찰과 군인 등에게 끌려가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전국의 형무소로 보내져 고통의 삶을 살았던 '4.3 수형 생존인'들. 이런 이들이 60년 전, 악몽과도 같던 그날의 현장을 직접 방문해 어렵사리 그 고통의 기억을 되뇌었다.

쌀쌀하지만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청명했던 10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9시, 제주국제공항 3층 출발 대합실에는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김평담, 김용범, 윤춘광, 양동윤)가 제주4.3사건 60주년을 맞아 2박 3일의 일정으로 추진한 '2008 전국 4.3유적지 순례' 참가자들이 하나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번 순례에는 4.3 수형 생존인 이보연(80), 양일화(80), 부원휴(80), 김영주(87), 양규석(87)씨와 4.3도민연대 회원, 4.3연구소 연구원, 김종민 4.3처리지원단 전문위원, 제주도내 언론사 기자 등이 참석했다.

'60년 만의 4.3과 동행'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순례는 말 그대로 수형 생존인들이 60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 고난을 겪었던 현장인 부산, 마산, 대구, 인천, 마포 형무소를 방문, 이들의 기억을 듣는 형식으로 진행돼 그 의미를 더했다.

공합대합실에서 본 수형생존인 5명은 다소 어둡고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벌써부터 그 때의 악몽이 생각나는 듯 했다. 하지만 먼저 떠난 보낸 옛 동무들을 60년 만에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감회 또한 새로운 듯 했다.

이렇게 순례단은 기대반, 걱정반의 심경을 드러내며, 전국 4.3유적지 첫번째 순례지인 '부산 형무소' 터로 떠났다.

#"요강 위로 올라간 뒤, 작은 철장으로 밖을 볼 수 있었죠"

순례단이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에 위치한 '부산형무소 터'. 이 곳은 1896년 9월 일본군 수비대가 연병장으로 사용하다가 1909년 10월 21일 부산 감옥소가 들어서게 됐다.

이어서 1923년에는 부산감옥소가 '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부산 교도소로 이름이 바뀐 이 곳은 1973년 부산 사상구로 교도소를 옮기게 되고, 1975년 이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형무소의 흔적이 없어졌다. 이 아파트는 옛 형무소 터에 들어섰을 당시, 형무소 터라는 선입견이 있어 분양이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트 단지, 상가 등 현대식 건물들이 자리잡은 이 곳에서는 부산 형무소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부산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김영주 할아버지(87)는 '옛 형무소 터'를 쭉 둘러보았지만, "기억이 흐릿하다"는 말만 거듭 되풀이 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아파트 맞은 편에 있던 '부산 대청산'을 가르치더니, 옛 형무소의 위치를 기억한 듯 형무소 수형 당시의 이야기를 쭉 풀어놨다.

"우리 감방에는 30명이 한 방에서 생활했어요. 우리는 일반 수감자와는 달리 노역이나 운동도 못했고 하루종일 깜깜하고 좁은 감방에서 지냈어요. 빽빽하게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살았는데, 옷이 땀으로 다 젖고 땀냄새도 고약했어요. 또, 몇일 지나니깐 굶거나 전염병 등으로 죽는 사람이 많았아요..."

그는 또 당시 감방에 있던 요강 위로 올라가 작은 철장 사이로 '대청산'을 봤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작은 철장 구멍으로 그는 수감자들이 차량에 물건처럼 내팽겨지는 모습을 봤다고도 진술했다.

"감방에 요강 하나가 있었는 데 그 위로 올라가면 작은 철장 사이로 밖을 볼 수 있었어요. 그 때 저 산(대청산), 이름은 모르겠지만 저 산을 봤어요...그리고 그 구멍으로 사람을 던지면서 트럭에 싣는 모습을 봤는데, 한 간사가 '죽이러간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었어요. 그 이후 그들이 총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기 시작했어요..."

그의 '부산 형무소'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그는 '부산 형무소'에서만 수형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지난 1949년 7월2일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받은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은 후, 대구 형무소로 가게 됐다. 대구 형무소에서 3~4개월 정도 수감생활을 하다, 부산 형무소로 이감돼 3개월 정도 생활하다가 또 다시 마산 형무소로 이감돼 7년여 동안 수형생활을 하고 석방됐다.

#"말 안듣는 송아지 처럼 끌려다녔어요...너무 무서워죠"

'부산 형무소 터'에서 김영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두번째 순례 장소인 '마산 형무소 터'로 이동해 그의 못다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두번째로 방문한 곳은 경남 마산시 오동동에 위치한 '마산 형무소 터'. 이곳은 1910년 7월 1일 부산감옥 마산분감으로 설치돼 들어섰다가 1946년 마산형무소로 승격됐다. 마산형무소가 '마산 교도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1970년 마산교도소는 마산시 회성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직접 찾아가 본 옛 마산 형무소는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주차장 안 쪽에는 옛 마산 형무소 담벼락을 복원시켜,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또, 주차장 입구에는 '옛 마산 형무소'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 곳 지역 주민들은 '마산 형무소'는 주차장 뿐 만 아니라 뒷 쪽에 있는 천주교 마산 교구청과 그 앞의 삼성생명 빌딩을 포함한 모두가 형무서 터라고 했으며 현재 터 흔적을 알리는 비석의 위치는 정문에서 한참 비껴난 곳이라고 말했다.

이 곳에서는 '옛 부산 형무소'에서 못다한 김영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마련됐다. 김 할아버지는 어린시절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게 된 사연에 대해 하나씩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상황이 생각났는지, 다소 흥분된 격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의 가족은 1949년 당시,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서 목장일을 했다고 했다. 그는 집에 있으면 군인들이 다 잡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군인과 경찰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군인에게 잡혀 주정공장터(현 제주항 맞은편 공터) 창고에 갇히게 됐다. 이 후 불법 군사재판을 받게 됐고, 형량도 모른채 배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갔다.

"사람이 사람같지 않고, 말 안듣는 송아지 처럼 끌어가니깐...배는 어디론가 흘려가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겠고 왜 내가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무서웠어요. 도착한 곳은 바로 대구 형무소였죠.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 정도 있다가 부산 형무소로 이감됐다가, 마지막으로 마산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됐어요"

그는 대구와 부산 형무소에서는 일반 수감자와는 달리 노역과 운동 등을 할 수 없었지만, 마산에서는 피혁노동으로 구두를 제작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억울하게 끌려와서 이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꼭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컸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제주에 보고싶은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잡혀왔을 때가 27살이었어요. 결혼을 일찍한 내게는 아내와 사랑스런 딸 하나가 있었죠. 너무 보고싶어서 많이 울기도 했어요. 가족들 때문이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구두기술을 배우게 됐어요" 

그는 그렇게 7년이 지난 뒤에야 이 고통의 공간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됐다. 7년 동안의 고통이 고스란히 다가왔는지, 그는 발걸음이 쉽게 이 곳을 떠나지 못했다.

#"재심을 포기안하면 군법회의에 회부된다는 말에..."

전국 4.3유적지 순례 2일째인 11월 1일. 세번째 순례 장소인 '대구 형무소'를 찾아갔다.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 위치한 '옛 대구 형무소 터'.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제주 4.3사건 관련 재소자 200여명을 포함한 4000여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가운데 내란죄, 살인죄,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형무소에 수형됐다.

대구형무소에 보관중인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 명부에는 1402명 재소자 란에 '군경에 인도'라는 도장이 찍혀있었으며, 이 중 제주 4.3관련 재소자는 142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이 중 생존이 확인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경산의 코발트 광산이나 가창골에서 학살된 것으로 조사됐다.

'옛 대구 형무소 터'를 찾기는 그리 쉽지 만은 않았다. 대구형무소에 대한 기록이 없어 대구시청에서 말해 준 주소와 언론보도된 내용을 갖고 유추해 이곳을 찾아갔지만, 그 곳은 대구소년형무소였다. 결국, 대구 주민들에게 구두로 물어보면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옛 대구 형무소 터를 찾을 수 있었다. 고층건물들로 인해 어디 하나 옛 대구 형무소 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곳에서 만난 대구주민들은 비교적 대구 형무소 터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만난 현지 대구 주민 박재휴(85)씨와 이상임(76.여)씨에 따르면, 현재 대구 삼덕교회 터가 대구 형무소 사형장이었고 그 뒤쪽에는 남대구 경찰서와 육군본부 등이 있어서 대구시민들의 발걸음이 드물었다. 이들은 또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잘 듣지 못했지만, 가끔 영남일보를 통해 사형자 명단을 가끔 보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일반재판을 통해 대구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양규석 할아버지(87)는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제일 높은 건물이 3층이었는데, 지금은 고층건물들로 인해 너무도 변해버렸다"며 당시 대구 형무소 터를 기억하면서 "60년 만에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난 후, 양 할아버지를 통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물어봤다. 그는 4.3 당시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다가와 '포고령 2호'를 위반했다며 경찰서에 같이 가야겠다며 안덕경찰서에 데려갔다고 했다. 이 곳에서 수없이 취조를 받았고 온갖 구타를 받은 후 배에 몸을 실어 광주 형무소까지 가게됐다. 이 곳에서 그는 '살인.방화죄'로 10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 형무소로 이감됐다.

이 후, 그는 항소를 했지만, 대구 형무소장이 방송을 통해 "재심을 포기안하면 군법회의에 회부된다"고 말해 무서운 나머지 재심을 포기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경찰들이 잡아갔어요. 안덕경찰서에 가보니 15명 정도 있었는데, 이 중에 10명은 광주형무소에서 대구형무소로 같이 왔고, 나머지는 모르겠어요... 재심도 할 수 있었는데, 시국이 그렇다 보니 결국 포기하고 형량을 다 채우고 나왔어요. 아내와 내 자식들을 놔두고 온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어요. 그리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곳에서는 이날 옛 대구형무소에서 생사불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진혼제례를 봉행했다. 손수 제주도에서 만들어가 제례음식을 정성스럽게 올리고 먼저 떠난 4.3영령들의 넋을 달렸다.

#"대부분 이질과 설사병으로 죽어 나갔죠..."

"너무 배가 고파서 밖에 자라나는 풀을 뽑아서 소금에 찍어서 먹었어요. 먹으면 입도 시퍼렇게 변했지요. 인천소년형무소는 젊은 10대가 왔었는데, 대부분 이질과 설사병으로 죽어 나갔어요..."

전국 4.3유적지 순례 3일째인 지난 2일. 옛 대구형무소 희생자 진혼제례에 이어, 네번째 순례 장소인 '인천소년형무소'에서도 옛 인천소년형무소' 희생자를 기리는 진혼제례가 봉행됐다.

경기도 인천시 학익동에 위치한 '옛 인천소년형무소'는 일제강정기인 1938년 3월 인천지역에 죄수를 수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형무소는 미군정 시기인 1947년에 인천소년형무소로 개칭됐고, 1962년에는 형무소 명칭이 교도소로 바뀌면서 인천소년교도소로 개칭했다. 이어서 1990년에 인천 소년 교도소가 충청남도 천안시로 이전하고 천안소년교도소로 바뀌었으며 기존의 인천소년교도소는 미결수를 수용하는 인천 구치소로 개편됐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총 1300여명의 수형자가 생활했으며, 제주 4.3관련 수용자는 1차 군법회의 때 166명, 2차 군법회의때 194명으로 총 36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인천소년형무소도 마찬가지 고층건물 등으로 인해 '옛 인천소년형무소'의 모습을 사라져버렸다.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던 이보연, 양일화, 부원휴 할아버지.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온 수형 생존인들. 60년 만에 처음으로 이 곳을 방문하니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지난 1948년 12월 27일 제1차 군사재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던 양일화 할아버지는 하얀 B4용지에 당시의 형무소 모습을 그리며 설명하는 등 정확히 형무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양 할아버지에게 이 곳에 오게 된 경위에 대해 물어봤다. 양 할아버지는 쌓아왔던 고통이 터져버린 듯 40분가량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양 할아버지가 19살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이 곳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서북청년단에게 잡혀 1구서(현 목관아지)에 끌려갔다. 그는 5개월 동안 1구서에서 전기고문과 취조 등으로 받았다고 했다. 제주법원이 "좌익세력에 쌀과 돈을 줬냐"라는 질문에 그는 죽는 게 무서워서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했다.

"형량도 모르고 죄목도 모른채, 인천소년형무소 입구에서 내란죄와 금고로 형량을 내렸어요...제주법원에서 재판을 받는데, 나를 죽일 것만 같아서 무조건 '그렇다'라고 대답을 했어요...대부분은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다시 이 곳에 오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어서 함께 온 부원휴 할아버지도 4.3당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부 할아버지는 4.3당시 제주농업고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 갑자기 군인이 집에 들이닥쳐 잡아갔다고 밝혔다.

"당시, 군인이 좌익에 가담했냐고 물어봤어요. 나는 어리고 하니깐 절대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무조건 적으로 끌어갔어요. 전기고문도 하고 장작으로 막 몸도 때리고 너무 무서웠어요. 제주법원에서 재판을 하던데, 난 그게 재판인지도 몰랐어요..."

그는 1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생활을 했다가 풀려났다. 부 할아버지는 수형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겪어던 고통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1년이라는 선고가 이렇게 큰 사회적 제약을 받을 지 몰랐어요.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회적 제약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인천소년형무소에 들어오게 된 제주의 젊은 청소년들은 목포를 통과해 기차를 타고 인천소년형무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질과 설사병으로 죽어나갔다. 어린 나이에 아무 이유없이 끌려온 이들의 60년 동안의 고통을 이루말할 수 없는 듯 하다.

#"4.3,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정부는 4.3위원회 폐지 즉각 중단하라"

마지막 순례지역인 '마포 형무소'에 찾아갔다. '옛 마포 형무소 터'에는 현재 서울서부지방법원과 서울지검서부지청이 들어섰다. 이 곳은 1950년 한국전쟁 직전 마포형무소에 수감중이던 4.3관련 제주출신 재소자들은 4.3당시 두 차례 치러진 민간인 대상 국법회의 수형인이었다.

1948년 제1차 군법회의로 마포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수형인은 120명 내외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1949년 제2차 군법회의로 복역 중이던 수형인은 350명 내외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이날 마포형무소 유적지 기행에는 특별한 손님이 자리를 함께 했다. 마포형무소에 재소하다가 북한 의용군에 편입돼 복무하다가 광주경찰서로 연행, 출옥한 김상연 할아버지(84.서울시 마포구).

김상연 할아버지는 1943년 교원생활을 하던 중 1945년 3월 1일 경찰서와 재판소 일부만 제외하고 총파업을 하던 그 때 학생들을 데리고 제주시 북초등학교에 모였다는 이유로 파업 주동자로 몰려 1년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왔다고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제1차 군법회의에서 좌측에 돈을 건네줬다는 증거가 포착됐다며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 당시 상황을 이같이 회고했다.

"취조도 받고 죽도록 매도 맞고 구사일생이 아니라 열 두번, 열 세번도 넘는 위험을 넘기고 아슬아슬 살아남은 건이데...그 때의 고통을 오늘 하루동안 이야기하라고 해도 다 못할 거예요."

이렇게 마포 형무소를 끝으로 전국 4.3유적지 기행이 끝났다. 전국 4.3유적지 기행을 추진한 4.3도민연대 양동윤 공동대표는 전국 4.3유적지 기행을 끝마친 소감을 발표과 함께 4.3위원회 폐지방침을 내놓은 정부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양 대표는 "지난달 31일부터 2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으로 60년전,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불목곡직 체포돼 불법 군사재판으로 인해 황당한 형량을 선고받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부산.마산.대구.인천.마포형무소를 각각 순례했다"며 "이번 순례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4.3해결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는 4.3희생자 수를 2만 5000~3만명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4차에 걸쳐 의생자 신고자는 1만 5000여명에 불과하다"며 "4.3에 대해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4.3위원회를 폐지하려고 하고 있고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은 납득할 수 없다"고 강하게 피력했다.

그는 "이번 순례를 통해 4.3에 대한 진상규명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더 많이 남아있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며 "4.3은 영원히 기억돼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앞으로 열심히 4.3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국 4.3유적지 순례 참가자들은 이날 옛 마포 형무소 앞에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날 결의문에서는 4.3진상규명사업 재개, 4.3역사현장(4.3당시 제주도민 수형 전국형무소)보전사업의 시행, 추가 4.3희생자신고기간 지정 등을 요구했다.

너무나도 무서운 기억들, 기억의 저편에 놓아 두었던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는 수형생존인들의 용기는 대단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말이 있듯이, 60년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수형 생존인들에게 이번 순례는 어떤 의미였을까. 고통을 말하는 데 있어서 괴로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60년만에 옛 동무들을 달래고 쌓아두었던 고통을 말했다는 것에 조금이나마 이들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진 기회가 됐을 것이라 파악된다.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4.3희생자 수를 2만 5000명~3만명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현재 4차까지 진행된 희생자 신고자는 1만 5000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가운데, 4.3사건 처리지원단의 통합과 4.3위원회의 폐지방침 논란은 또다시 4.3유족득과 원혼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 있다. 이같은 시점에서 다녀온 순례를 통해 느낀점이 있다면, 4.3특별법이 개정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4.3에 대해 풀어야 할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이다.<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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