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00:30 (일)
“드디어 면사포를 썼어요. 이제 소원을 풀었군요.”
“드디어 면사포를 썼어요. 이제 소원을 풀었군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3.06.19 16: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양리 현지서 ‘잠수복 벗고 면사포’ 행사
육지에서 웨딩드레스 등 행사 지원하기도
가문잔치에서 보는 제주 잔칫상도 등장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바다밭을 일군 해녀들. 그들에겐 ‘제주의 상징’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지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해녀들에겐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들이 물질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면사포라는 낭만도 그들에겐 사치였다.

제주시 한림에서 보이는 섬, 비양도. 거기를 터전으로 물질을 하는 해녀들에게도 면사포는 남의 이야기다. 드레스 없는 결혼식, 결혼식이 끝나면 본업인 바다밭을 일구는 물질이 연속된다. 결혼했음을 알려주는 사진은 달랑 한 장. 그 사진에 면사포는 없다. 흰색 저고리를 입은 젊은 여성이 갓 결혼식을 올린 신부였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면사포’가 곁에 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처럼 꿈으로만 여기며 살았는데, 6월의 따뜻한 19일은 꿈을 현실로 만들어줬다. 이날 한림초 비양분교는 드레스를 입은 이들과 하객들로 붐볐다. 해녀들은 면사포를 쓰고, 이날의 주인공임을 확인시켰다. 평생 물질을 하며 살아온 11명의 해녀들은 저마다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고, 예쁜 인물사진도 담았다. 11명의 해녀를 위해 육지부 곳곳에서 사람들이 날아왔다. 비행기를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비양도를 잇는 도항선에 올랐다. 웨딩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인물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도, 잔치음식을 만들어준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해녀 면사포’라는 소식에 반갑게 화답하며 비양도로 모여들었다.

면사포를 쓴 해녀들.
면사포를 쓴 해녀들.
19일 비양분교 마련된 '잠수복 입고 면사포' 행사. 면사포를 입은 해녀가 행사장을 지나고 있다.
19일 비양분교 마련된 '잠수복 입고 면사포' 행사. 면사포를 입은 해녀가 행사장을 지나고 있다.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고 있는 이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해녀.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고 있는 이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해녀.

일을 벌인 이는 물새알 여상경 대표. 그는 2년 전 비양도에 들어와 새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비양도 해녀들의 속사정도 하나둘 알아갔다. 드레스를 입어보지 못했다는 해녀의 이야기를 접한 여상경 대표는 평소 알고 지내던 슬로푸드한국협회 김준 슬로피시위원장과 얘기를 하다가 해녀들에게 면사포를 씌워주자는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둘의 만남은 지난해 여름철 태풍이 오던 날 이뤄진다. 김준 위원장이 ‘잠수복 벗고 면사포’라는 주제를 제안했고, 행사는 봇물을 타기 시작했다. 웨딩드레스를 지원해주는 이가 등장했고, 사진을 찍어줄 이들도 나섰다. 판은 더 커졌다. 웨딩드레스를 입는 거대한(?) 행사이니만큼 공연도 필요했다. 트로트를 불러주겠다는 사람도 나섰고, 동래학춤 문화재도 부산에서 제주로 향했다. 연극을 펼치는 이들도 ‘잠수복 벗고 면사포’를 위해 헌신했다. 덕분에 양영숙 비양리 잠수회장도 드디어 면사포를 쓰게 됐다. 그의 소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1970년에 결혼했는데 (면사포 없이)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었어요. 집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죠. 오늘 소원을 다 풀었어요. 너무 좋아요. 이렇게 좋은 행사인 줄 알았으면, 아들에게도 (엄마가 쓴 면사포를 보라고) 말할 걸 그랬어요. 이젠 소원을 풀었으니, 그저 나만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면 좋겠어요.”

결혼식은 일생일대 최고의 잔치인데, 먹을거리가 빠질 수는 없다.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이 직접 나섰다. 양용진 셰프의 지휘로 제주의 전통적 결혼행사인 가문잔치에서나 맛보는 제주 상차림이 마련됐다. 몸국은 물론, 괴기반 등이 해녀들의 잔치를 축하해주러 온 하객들에게 선보였다.

잔칫상을 준비하는 이들.
잔칫상을 준비하는 이들.

이날 하루만큼은 음식을 만드는 이들도, 공연을 하는 이들도, 비양리 주민들도 모두 하나된 하루였다. 윤성민 비양리장은 하객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금은 비양도 사람들이 좋은 생활을 하지만 옛날 어르신들의 삶은 어려웠고, 면사포를 쓰지 못한 분들도 많았어요. 제 고모님도 물질을 하시는데, 오늘 면사포를 쓰셨습니다. 기쁘고 너무 감격스러워요. 행사를 준비해준 모든 분들 고맙고,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더 좋은 시설을 갖춰서 많은 이들을 맞을 수 있도록 할게요.”

비양도에 들어온 청년 덕분에 해녀들은 면사포를 입은 사진을 자신의 집에 걸 수 있게 됐다. 여상경 대표와 지난 태풍 때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 행사를 함께 만든 슬로피시 김준 위원장은 작은 마을의 큰 변화를 잘 안다. 그것도 뭍에서 들어온 한 청년이 마을주민과 접촉하며 일으킨 물결을 잘 안다. 제주에 이주해 오는 이들이 많은데, ‘잠수복 벗고 면사포’는 제주에 살고 있는 이들과 제주에 들어오는 이주민들이 어떻게 잘 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준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면 주민들은 경계하고, 마음의 문을 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여상경 대표는 진심으로 지역의 어르신들에게 마음을 전하니까 여기 해녀삼촌들과 관계가 좋아요. 제주도는 이주를 해서 온 이들도 많은데, 들어오는 이들도 지역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지역 주민들은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죠. 오늘은 바로 그런 자리라고 봅니다. 행정의 개입이 아니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 일을 벌였어요. 주민들을 위한 날이기에 주민들이 주인이 되는 마을 잔치를 열게 된 겁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