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7 09:10 (토)
“4.3 수형인명부의 1‧2차 군법회의 자체가 모두 불법이었다”
“4.3 수형인명부의 1‧2차 군법회의 자체가 모두 불법이었다”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3.08.29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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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재심 합동수행단 검사 “영장도 없이 불법 구금, 고문에 기소 절차도 잘못”
피고인 30명 모두 사형‧무기징역 선고 후 총살됐거나 행불 … 숙연해진 법정
1947년 12월과 이듬해 7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군법회의가 모두 불법적으로 자행된 사실상 사법살인이었던 것으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사진은 4.3 직권재심이 진행되고 있는 법정 내부 모습. /미디어제주 자료사진
1947년 12월과 이듬해 7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군법회의가 모두 불법적으로 자행된 사실상 사법살인이었던 것으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사진은 4.3 직권재심이 진행되고 있는 법정 내부 모습. /미디어제주 자료사진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기소됐으면 자기가 어떤 범죄 사실로 재판을 받고 있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기소장에 범죄사실이 어떤 건지도 알려주지 않고 기소장을 송달하지도 않았어요. 여기에 지금까지도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죄명만 있지 이 분이 무슨 범죄 사실을 저질렀는지… 판결문도 없고요. 군법회의 수형인명부에는 아무 내용도 없어요.”

29일 오후 열린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주4.3사건 직권재심 사건에서 나온 합동수행단 변진환 검사의 발언 중 일부 내용이다.

변 검사는 이날 재심에서 작심한 듯 당시 군법회의가 얼마나 불법적으로 자행된 사법살인이었는지,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자세히 설명했다.

군법회의 얘기를 꺼내기에 앞서 그는 4.3특별법이 제정되면서 희생자 신고 접수를 받기 시작했던 2000년대 초 상황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희생자 신고 접수가 시작되긴 했지만, 4.3중앙위원회에서도 ‘수형인명부에 있는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희생자 결정이 뒤로 미뤄졌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희생자 접수 신고 초기에는 그냥 총에 맞아서 죽은 사람, 단순 행방불명자들만 희생자 결정을 해주다가 2005년이 돼서야 4.3중앙위에서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분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심사를 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도 법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은 반대했고, 격론 끝에 ‘이 분들도 희생자 결정을 하는 것이 맞다’고, ‘잘못된 재판’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2005년 시행령을 개정할 당시에도 사형,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경우는 또 다시 미뤄져 2007년이 돼서야 희생자 결정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변 검사는 “당시에는 이 사람은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사형, 이 사람은 죄를 덜 지었으니까 징역 1년으로 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보여진다”면서 “그냥 무작위로 이 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 사형,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 무기징역 이런 식으로 재판이 이뤄졌다고 본다. 특별히 누구를 선별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당시에는 일단 수사과정에서부터 잘못이 있었다”면서 고문과 불법 구금이 다반사로 이뤄졌음에도 구속영장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판결 절차에 대해서도 그는 “재판을 하게 되면 판사가 있고 당시에는 군인들이 재판을 했으니까 군인들을 통해 최소한의 변론을 거쳐 구형을 하면 재판장이 징역 몇 년 이렇게 진행돼야 하는데, 거기 있었던 분들은 그런 얘기를 들은 사람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수형인들이 육지 향무소에 가서야 교도관이 ‘당신은 형량이 몇이오’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재판 절차 자체가 수사, 기소, 재판, 선고까지 제대로 돼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면서 “4.3진상조사위위에서 발간한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이 군법회의가 절차적으로 아주 잘못됐다는 것이 밝혀졌고,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분들도 희생자로 결정되는 계기가 됐다”는 얘기를 전했다.

최후 변론에 나선 반희성 변호사도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부모‧형제, 자식을 잃고 생사도 모른 채 하루하루 어디서라도 살아있기를 소망하시던 유족 분들이 연좌제의 엄혹한 시절을 힘들게 버텨오면서 남은 가족들을 건강하게 잘 키워주셨기 때문에 오늘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자리에 재판장과 재판부, 검사들이 있게 하셨다”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어 반 변호사는 “하루도 긴 시간인데 7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날을 기다려온 유족 분들께 다시 한 번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은 범죄에 대한 증명이 없으므로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 선고로 75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온 유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재심에서 다뤄진 피고인 대부분이 당시 사형이 선고돼 화북리에서, 제주비행장에 끌려가 총살을 당했고 가까스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경우에도 형무소로 끌려가 한국전쟁이 발발, 총살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된 터라 이날 재심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숙연한 분위기 속에 재판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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