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2-12-03 22:39 (토)
“의병은 살기 위한 민초들의 움직임이었다”
“의병은 살기 위한 민초들의 움직임이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9.02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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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따라잡기] <5> 의병 양달사를 알리는 노력

[인터뷰] 이영현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공무원 신분으로 있으면서 양달사 알리기

퇴임 후에도 다양한 사업 벌이며 의병 조명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을묘왜변 초기는 처참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으며 차츰 나아졌다. 왜구의 기세를 꺾은 지점을 꼽으라면 영암전투를 들 수 있다. 특히 그 전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의병의 등장이다. 시묘살이 중이던 양달사가 의병을 일으켰고, 득실거리던 왜구는 물러난다. 양달사는 을묘왜변 전세를 바꾼 일등공신이었다. 비록 그의 공적은 늦게야 인정받았으나, 영암지역이 꼽는 대표적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양달사를 지금의 인물로 끌어올린 건 행정보다는 시민들의 힘이 더 컸다. 영암 사람들은 ‘양달사현창사업회’를 만들어 그와 관련된 사료 찾기 작업은 물론, 세미나 등을 열면서 양달사라는 인물을 알리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오랫동안 양달사라는 인물을 연구해 온 이영현씨가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양암학회 회장이기도 한 그의 명함을 들여다보면 앞면은 ‘의(義)’를 새겨넣은 의병기가 펄럭이고, 뒷면은 양달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들어 있다. 설명 문구를 보면 “양달사는 1555년 을묘왜변 당시 나라를 구한 조선 최초 의병장입니다”라고 돼 있다.

이영현 사무국장은 그의 명함에 박힌 내용처럼 양달사를 ‘조선 최초 의병장’으로 알리는 선봉에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영현 사무국장은 공무원 신분일 때 양달사를 조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가 양달사에 꽂힌 건, 영암에 사는 아이들에게 영암의 인물을 알려주고 가르쳐 줄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영암의 인물을 찾아봤는데 예전에도 양달사를 조명한 일이 있더군요. 1970년대 초에 공적비도 세우고 순국비도 세웠는데 유신정권 때 그런 활동이 없어진 거예요. 주변에서는 그런 인물을 영암의 인물로 세워야 한다고 했어요.”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영현 사무국장. 미디어제주
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영현 사무국장. ⓒ미디어제주

양달사는 1970년대 초 ‘반짝’ 조명을 받았다가 힘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공무원 신분이던 이영현 사무국장이 곧바로 양달사 관련 업무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업무가 아니어서였다. 그러다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도시과장으로 옮기며 영암읍성에 관심을 뒀다. 영암읍성 지표조사도 진행했다.

“지표조사를 했더니 거대한 규모의 읍성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영암성대첩 사업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어요. 그러면서 양달사를 계속 조사를 해보니까 진짜 훌륭한 분인 거예요.”

양달사 인물에 대한 공부를 차근차근하던 도중에 그는 영암군 도포면장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도포면은 바로 양달사의 고향이다. 그에게 또다시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29년이라는 공직의 마침표를 앞둔 순간이기도 했다.

“면장으로 가서 주민들을 만났는데, 주민들이 양달사를 조명하자는 겁니다. 내가 면장으로 있을 때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도포면장으로 간 건 2019년이었다. 그해 ‘양달사현창사업회’가 출범한다. 7월에 발기인 모임을 하고, 9월 25일 창립총회를 연다. 만일 그가 도포면장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양달사를 기리는 사업회는 꾸려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양달사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본인의 상중(喪中)에 전투에 나섰다고 해서 자신의 공을 말하지 않고 물러난 것을 보면, 성리학적 도학(道學) 정신에 굉장히 투철한 사람이란 거죠. 하지만 양달사의 의병 활동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어요. 지역에서 무려 300년간 계속 건의를 했어요. 그걸 보더라도 전라도민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어요.”

양달사는 1847년에 와서야 좌승지로 추증된다. 을묘왜변이 일어난지 300년을 기다려야 했다. 전라도민들은 양달사의 업적을 알리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해왔으나, 관찰사들은 번번이 미뤘다고 한다. 1777년엔 전라도 각지의 유생 444명의 이름으로 탄원서를 올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양달사의 업적을 드러내는 게 어려웠는데, 현대에 들어와서도 양달사를 조명하는 일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유신정권 때 의병보다는 관군에 대한 조명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되면서 양달사 문중 사람들이나, 1970년대 초에 양달사 사업을 추진했던 이들이 많이 돌아가셨어요. 몇십 년간 또 중단됐어요. 한 오십 년간 그렇게 됐는데, 이번에는 절대 없어지면 안되겠다고 생각했고, 양달사현창사업회를 정식으로 조직하게 됐죠. 제가 아니라도 계속할 수 있게 하려고요.”

이영현 사무국장이 양달사 관련 사료를 보고 있다. 미디어제주
양달사현창사업회 이영현 사무국장이 양달사 관련 사료를 보고 있다. ⓒ미디어제주

어럽게 탄생한 양달사현창사업회는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우선은 양달사를 널리 알리는 사업이다. 아울러 영암성대첩을 알리고, 그 대첩을 알리기 위한 영암성 복원도 추진할 계획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건 바로 연구 인력이다. 다행히 젊은 연구 인력을 어느 정도 확보는 했다고 한다. 그는 양달사에 대한 연구를 줄기차게 해오고 있다. 자료를 찾아내 번역을 하기도 한다. 물론 어려운 점이 없진 않다.

“생각보다 양달사 관련 자료는 많아요. 안타까운 점이 있긴 해요. 학자들은 제가 자료를 찾아내서 논문을 쓰면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것만 보고, 양달사는 빼버려요. 정사가 아니라고 해서.”

그렇다면 왜 의병은 탄생했을까.

“을묘왜변 당시 조선 사회는 군기가 기울어있었죠. 결국은 의병이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는 해산물도 풍부하고 쌀도 많기에 왜구가 극성을 부리는 조건이었고, 그걸 관리하려니 이쪽 사람들은 힘을 모아야 했어요. 어쩌면 의(義)라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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