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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명에 달하는 왜구에 ‘속수무책’이던 조선
6천명에 달하는 왜구에 ‘속수무책’이던 조선
  • 김형훈
  • 승인 2022.07.27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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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따라잡기] <1> 왜변의 시작

인류의 삶에서 전쟁은 빠질 수 없다. 전쟁은 죽음이 뒤따르는 행위이지만, 전쟁은 체제의 변화를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인류사의 중요한 분기점엔 늘 전쟁이 있다. 대부분의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두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에겐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 익숙하다.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혔기에 이긴 이야기보다는 패배한 역사만 우리에게 각인됐는지도 모른다. 제주도라는 섬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 그 가운데 승리의 역사는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조선 명종 10(1555)에 발발한 을묘왜변이다. ‘을묘왜변 따라잡기라는 기획을 통해 470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추적해보고, 승리의 역사로서 을묘왜변을 콘텐츠로 만들 수 있는 방안도 생각해보자. [편집자 주]


 

5월엔 전라도 침탈하고, 6월엔 제주도를 침공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을묘왜변 언급 없어

조선 장수들은 제대로 싸우지 않고 도망하기도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을묘왜변은 말 그대로, 을묘년이던 1555년에 발발한 왜구의 침입을 말한다. 음력 기준으로 5월엔 전라도에, 6월엔 제주도를 침탈했다. 특히 을묘왜변 때 우리나라를 넘본 왜구들은 이전의 왜구들과는 성격이나 규모도 차이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을묘왜변은 역사적으로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쉽다면 을묘왜변이 역사 교과서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을묘왜변은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이전의 역사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왜구의 침탈임에도 역사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다. 기자가 직접 들여다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비상, 동아출판)는 을묘왜변 자체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1555년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로 가보자.

사진은 달량포구에서 바라본 바다. 오른쪽에 푸른 수풀처럼 보이는 곳은 '달도'이다. 만조일 때는 사진 아래에 보이는 나무 데크 밑에까지 바닷물이 차오른다. 미디어제주
사진은 달량포구에서 바라본 바다. 오른쪽에 푸른 수풀처럼 보이는 곳은 '달도'이다. 만조일 때는 사진 아래에 보이는 나무 데크 밑에까지 바닷물이 차오른다. ⓒ미디어제주

5월 11일. 왜선 70여 척이 전남 달량 포구 밖에 정박한다. 달량은 전남 해남군 북평면에 있으며, 진(鎭)이 설치되면서 병선이 머물기도 했다. 달량진은 종4품에 해당하는 만호가 직접 관할하는 중요한 군사 요지였다. 이처럼 달량은 군사적·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으나 중종 15년(1520) 가리포진(현재 전남 완도)이 만들어지면서 군사 진지의 역할을 잃고 만다.

가리포진은 달량 포구보다 남쪽인 완도라는 섬에 자리를 틀었다. 조선 군사들이 망을 보는 위치로는 좋을 수 있으나, 왜구 입장에서는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인 위치이기도 했다. 완도에 있는 가리포진에서 왜구를 포착하지 못하면 전남의 서쪽 해안은 쉽게 뚫리기 때문이다. 바다에 능숙한 왜구들은 이처럼 허약한 곳을 노렸다. 완도를 서쪽으로 끼고 돌면 쉽게 방어막을 뚫을 수 있다. 70여 척에 달하는 군단을 들키지 않았다면, 초기 방어의 실패인 건 분명하다. 완도를 끼고 돌면 달량 포구 앞에 있는 ‘달도’라는 섬을 만나게 된다. 여기는 조수간만 차가 크다. 물이 빠지면 달량포구에 댄 배는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된다. 왜구들은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며 달량 포구를 노렸다.

을묘왜변이 터지기 전 이상한 일도 많이 일어났다. 이상하리만큼 햇무리 현상이 잦았다. 5월 11일 당일에도 햇무리 현상이 발생했다. 올해(1555년) 벌써 스물아홉 번째 햇무리다. 왜변 며칠 전에는 진주에 사는 한 여성이 황새 새끼를 낳는 일이 보고됐다. 우박도 잦았고, 4월엔 경주에서 지진까지 발생했다.

이상한 일이 잦았지만 그건 자연현상일 뿐이다.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 상황을 ‘속수무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얼마나 갑갑했을까.

“태평한 지 오래 되어 기율이 해이하고 흉년이 잇달아 군졸들이 지쳤다. 내부는 계략을 세우는 신하도 없고, 외부는 적개심을 지니고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가 없어서 수비가 안 되었다. 그러다가 왜구들이 갑자기 밀어닥치자 모두 두려워하는 생각만 품고 막을 계책을 세우지 못했다.”   -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16일 기유 2번째 기사

왜구는 틈을 보다가 상륙, 달량을 포위한다. 달량이 포위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의 군사들이 투입됐으나 ≪조선왕조실록≫의 언급처럼 ‘속수무책’이었다. 왜구는 달량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북으로 올라가며 주변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 장수도 있었다. 광주목사였던 이희손의 경우이다. 전라도관찰사인 김주가 이희손 등에게 강진현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이희손은 도망하기에 바빴다.

“이희손 등은 자신이 먼저 두려워하고 겁내어 도망했다. 이희손 등이 도망간 뒤에 왜인들은 오히려 성안에 사람이 있는지 의심하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다가 사람이 없음을 안 뒤에 들어갔다. 왜놈들이 성에 들어간 것은 이희손 등이 이미 도망한 다음이었다.”   - ≪명종실록≫ 18권, 명종 10년 5월 28일 신유 2번째 기사

을묘왜변 때 왜구의 첫 표적이 된 달량성. 미디어제주
을묘왜변 때 왜구의 첫 표적이 된 달량성. ⓒ미디어제주

그렇다면 당시 왜구의 세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을묘왜변 때 해남현감의 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해 간신히 목숨을 건진 변협이 있다. 변협이 을묘왜변 34년 후에 선조와 대화를 나눈 장면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선조 22년(1589) 8월 1일에 나눈 대화를 들어보자.

선조가 변협에게 물었다. 왜 성을 지키는데 하루 이틀도 지탱하지 못하느냐고. 변협은 “인심이 옛날과 달라 임금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이 없어서”라고 답한다. 그러다 1555년 을묘년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왜적은 얼마나 되느냐”

“배 70척에 군사가 6000명 쯤 되었습니다.”

“수만 명이 쳐들어올 기세는 보이지 않던가?”

“왜선은 중국 배에 미치지 못하므로 한 척에 100명 밖엔 실을 수 없습니다. 100척이면 1만명이니, 1만명 이상은 어렵습니다.”

6000명에 달한 왜구는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약탈하고, 또 다른 대규모 전투를 준비한다. 왜구는 영암향교에 진을 쳤다. 연전연승하던 왜구와 너무 허약한 조선의 군사.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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