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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매일 부는 바람, 모습은 늘 달라
제주에서 매일 부는 바람, 모습은 늘 달라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8.25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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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제주 읽기] <6> 오늘도 바람이 불어

제주에 오려는 이들과 제주를 벗어나려는 이들은 순풍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포구에 기댄 배는 언젠가는 움직여야 할텐데, 그 시점은 바람이 적당히 들 때이다. 겨울철은 기다림이 더 길어진다. 매서운 북서풍이 몰아치면 배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포구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후풍(候風)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건 아니다. 후풍의 사전적인 해설은 ‘배가 떠날 때에 순풍을 기다림’인데, 후풍이라는 단어엔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애절함이면서 거센 바람을 멈춰달라는 기원도 들어 있다.

전남 해남은 제주도에 들어가려고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제주를 떠나는 이들은 화북이나 조천에서 배를 잘 움직일 바람을 기다려야 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잘 알려진 김종직은 제주에 와 본 일은 없으나, 1465년(세조 11) 2월 28일 김극수라는 이로부터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탁라가(乇羅歌)’를 짓는다. 칠언절구 14수로 된 탁라가에 제주의 바람이 잘 읽힌다.

물길이 어찌 한갓 수천 리뿐일까마는 / 水路奚徒數千里
해마다 오가며 전부터 잘 기억한다 / 年年來往飽曾諳
구름돛을 달면 문득 화살처럼 달리니 / 雲帆掛却馳如箭
하룻밤 순풍이면 해남에 도착한다 / 一夜便風到海南

(‘탁라가’ 14수 가운데 4번째 수)

해류와 바람이 잘 맞으면 육지에서 하루 만에 오가는 곳이 제주였지만, 실제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전남과 제주 사이에는 커다란 바다가 버티고 있으며, 커다란 바다는 바람도 거세다. 사람들은 1개월 가량 바람이 잦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해남 달량포구엔 그래서인지 제주를 오가는 이들이 좋은 바람을 기다렸던 ‘해월루(海月樓)’가 존재한다.

‘탁라가’ 표현처럼 드물게 하루 만에 도착하는 이들도 물론 있었으니, 추사 김정희가 그랬다. 김정희는 1840년(헌종 6) 9월 27일 화북포구에 내린다. 양력으로 계산하면 10월 말이나 11월 초가 될텐데, 추사는 《완당전집》에서 ‘초겨울’이라고 표현했다. 해가 뜨자마자 출발한 추사 일행이 화북포구에 도착한 시점은 석양 무렵이다. 추사를 본 이들은 한결같이 다음처럼 얘기했다.

“북쪽의 배가 날아서 건너왔습니다. 해 뜰 무렵에 출발해 석양에 당도한 것은 61일 동안 보기 드문 일입니다.” (완당전집 제2권 ‘서독(書牘)’ 중에서)

추사 일행은 하루 사이에 두 바람을 만났다. 오전에 분 바람은 아주 순한 ‘좋은 바람’이었고, 오후에 분 바람은 배를 삼킬 만큼의 ‘매서운 바람’이었다. 오전엔 북풍과 동풍의 도움을 받아서 아무 걱정 없이 제주로 오던 추사 일행은 오후부터 얼굴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람을 받은 파도는 배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추사는 “파도가 거세게 일어 배가 파도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고 그때의 감정을 글로 말하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바람에 의지해 배를 움직였다. 그걸 어길 경우엔 낭패를 본다. 때문에 후풍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김종직의 ‘탁라가’를 다시 들여다본다.

바람을 기다리며 조천관에 머물러 있으면 / 候風淹滯朝天館
아내와 자식은 서로 보면서 술잔을 권한다 / 妻子相看勸酒盃
한낮이 되어 부슬부슬 가랑비가 뿌리니 / 日中霡霂霏霏雨
알겠다, 이는 미꾸라지가 기운을 뿜는 것이다 / 知是鰍魚噴氣來

(‘탁라가’ 14수 가운데 마지막 수)

그림책 '오늘도 바람이 분다'에 묘사된 제주의 여름 바람. 미디어제주
그림책 '오늘도 바람이 분다'에 묘사된 제주의 여름 바람. ⓒ미디어제주

배를 이동시키기에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은 ‘탁라가’에서 보듯 아내와 자식이 건네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쩌면 기다림에 지친 사람을 술이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다 가랑비까지 내리니, 육지로 가고픈 생각은 더더욱 사라진다.

다들 순하고 좋은 바람을 안고서 이동하려고 기대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행운이 오진 않는다. 순하고 좋은 바람도 어느 순간 맹렬한 바람으로 바뀐다. 그때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표류는 바람의 행운이 따라주지 못한 경우이다. 《표해록》을 쓴 장한철은 바람의 행운을 얻지 못했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살아나는 행운도 누렸다. 그 역시 조천관에서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후풍(候風)을 했으나, 바람은 그에게 거부 신호를 보냈다.

“갑자기 바람이 잠깐 멎더니, 하늘에 비가 내릴 기색이 가득했다.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파도에 따라 머뭇거렸다. 하늘은 높고 바다는 넓어 끝도 없이 망망했다. 멀리 보이는 몇몇 섬이 붓끝처럼 보이기도 하고, 멀리 있는 돛배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한철의 ‘표해록’ 중에서)

장한철은 조천을 떠난 첫날 자신 심경을 이처럼 내뱉었다. 그건 두려움이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을 예고한다. 바람은 적당히 불어서 배를 움직인다. 과하면 탈이 나며, 너무 적어도 문제가 생긴다.

제주그림책연구회가 펴낸 《오늘도 바람이 불어》(2009)는 제주 바람의 특징을 잘 잡아내고 있다. 제목의 ‘오늘도’는 제주 바람이 일상임을 말한다. 제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제주 바람을 잘 안다. 바람 없는 제주는 상상되질 않는다.

글쓴이에게도 제주 바람은 익숙하면서 친한 존재이다. 간혹 나쁜 사이로 돌변하곤 하지만 그건 잠시 뿐이다. 태풍이 부는 날을 제외한다면, 내게 바람이란 너무 좋은 친구이다. 바람이 좋을 때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다. 탑승교(브릿지)로 내리지 않고, 계단으로 내리는 날이어야 한다. 비행기에서 나온 나를 바람이 맞는다. 바람은 도두동 바닷가의 갯내를 실어 내 코를 자극한다.

《오늘도 바람이 불어》는 제주를 오고 가는 사계절의 바람을 담았다. 봄에 부는 바람, 여름에 부는 바람, 가을철 찾아드는 바람, 겨울에 오는 바람은 각기 다르다. 계절이 다르듯, 제주 바람도 다르다.

유채꽃을 흔드는 바람, 고사리를 꼼지락거리게 만드는 바람은 봄바람이다. 그림책 《오늘도 바람이 불어》는 순하고 좋은 봄바람을 소개한다.

여름 바람은 두 얼굴이다. 평소엔 살랑살랑하지만 태풍을 동반한 사람은 거세다. 《오늘도 바람이 불어》는 초가집을 풍경으로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소개한다. 바람은 바다를 뒤집히게도 만든다.

억새를 불러내는 제주의 가을 바람. 미디어제주
억새를 불러내는 제주의 가을 바람. ⓒ미디어제주

가을철 바람은 다소 숨을 죽인다. 낭만이라는 단어 때문일까. 억새를 흔드는 바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제주도가 아니던가. 감귤이 더 잘 열리라며 부는 바람도 있다.

겨울 바람은? 제주의 겨울은 춥다. 바람이 있어서 그렇다. 특히 북서풍에 실린 바람은 모든 걸 삼킬 기세로 대든다. 거기에 눈까지 동반된 바람은 거칠 게 없다. 바람에 몸을 맡긴 눈은 사뿐히 내려앉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바람을 이웃으로 삼은 눈은 사람을 때리고, 돌담을 때린다. 이때는 “눈이 쌓인다”는 표현이 아니라, “눈이 박힌다”는 표현이 더 제격이다. 조선의 임금인 정조도 매서운 겨울철 제주 바람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제주사람들이 걱정이 됐는지, 글을 내리기도 했다. 임금이 내리는 글은 윤음(綸音)이라고 하는데, 정조의 사랑이 잘 드러난다.

“귤이 소반에 올라오면 애써 재배한 너희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말 떼가 궁궐 뜰에 오면 분주하게 기른 너희들의 고초를 상상한다. 언제나 북풍이 쌩쌩 불어오고 함박눈이 펄펄 날리면 공물 실은 배가 염려되어 정신이 초롱초롱해지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너희들은, 너희들을 잊지 못하는 나의 이 마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11월 24일 계축)

오늘도 제주엔 바람이 분다. 내일도 바람은 찾아들텐데, 좋은 바람인 순풍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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