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00:55 (일)
“추사가 남긴 유묵은 위대했다”
“추사가 남긴 유묵은 위대했다”
  • 미디어제주
  • 승인 2006.11.13 10: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시감상>추사특별전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월성위 등 종가유물 공개…보물 등 62점 선봬

 

#종가유물통해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들여다 본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남상규 부국문화재단 이사장(여미지 식물원 대표)·추사동호회 등에서 제주도에 기증한 추사유물 70여점을 포함한 총 100여점의 유물 중 62점을 가려내어 1차로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종전의 추사전시회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 하나 있다. 이번 특별전의 실무를 총괄기획한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이귀영 과장은 이 점과 관련해 “이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특별전의 특징은 종전의 전시회가 추사 유물 중심이었던 것에서 추사선생의 선대(先代)인 증조부 월성위를 비롯한 그의 종가유물을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 과장은 또 “월성위 관련 유물로는 그의 미간행 시 모음집인 ‘매헌난고’, 영조대왕(월성위의 장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 시책문’, 양아들 김이주가 쓴 ‘선부군가장’, 추사의 외가 어른인 유척기가 쓴 ‘반가운 비(喜雨)’, 영조가 내린 ‘화순옹주를 애도함’, 그리고 숙종·영조·사도세자의 글씨가 담긴 어필첩도 포함돼 있다”며 “월성위 김한신의 관련 유물은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어서 추사 김정희의 집안과 그의 학문세계 및 예술세계의 영향을 살펴보는데 귀중한 자료들을 선보인다”고 강조했다. 
 

#소치 허련이 스승 추사를 그린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

전실실 입구에서 만난 추사선생의 초상화는 150년 만에 다시 살아온 듯 당신의 향취가 가득 배인 진묵(眞墨)들을 흐뭇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그림은 추사의 제자 소치 허련이 그린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이다. 소치 허련이 제주에 찾아와 유배중인 스승 추사의 모습을 그렸다는 초상화다.

송나라 소동파를 그린 ‘동파입극도’라는 그림을 번안한 그림이다. ‘동파입극도’는 소동파가 중국 혜주지방에 귀양갔을 때 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평복차림의 처연한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소치가 이것에 착안, 바닷가 마을에서 귀양살이하는 추사의 모습을 소동파에 비겨 그린 초상화다. 어쩌면 추사선생 스스로 유배에 처한 자신의 신세를 그렇게 소동파에 비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추사의 마지막 혼이 서린 서울 봉은사 현판 ‘版殿’

그의 초상화 바로 옆에는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봉은사 현판 ‘版殿’을 탁본한 작품이 전시실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 글씨처럼 서툴고 어리숙한 글씨로 쓴 것 같아 보이지만 허화(虛和)로운 경지와 졸(拙)한 가운데 괴(怪)가 자연스럽게 살아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판전’은 스스럼 없는 졸한 맛이 강한 가운데 ‘일흔 한 살 먹은 과천사람이 아픈 가운데 쓰다(七十一果病中作)’라고 써서 더욱 이 글씨의 허화로운 멋을 살려주고 있다.

#영조가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부부의 묘표 직접 써
 

추사의 집안은 조선왕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1677~1750)은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막내아들인 김한신(1720~1758)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1720~1758)와 혼례를 올려 월성위에 봉(奉)해지며 경주 김씨 집안의 영예를 드높인다.

월성위는 인물이 준수하고 총명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중요한 직책을 두루 맡았으며 특히 글씨에 뛰어나 시책문을 많이 썼다.

추사의 증조부모인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각별한 부부애를 보였는데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 김한신이 38세의 한창 나이로 후사도 없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부왕 영조의 지극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여 부군을 따라 열나흘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조는 자신이 총애하던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조카인 정조가 조선왕조 400년 만에 왕실에서 처음 나온 열녀라며 그의 순정한 뜻을 기려 충남 예산의 고택에 열녀문을 세웠다.

월성위 부부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영조가 사위와 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충남 예산 추사고택 뒤에 합장한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묘앞에 묘표를 직접 써서 내렸다. 현재 이 묘표의 글씨는 보물 제547-2호이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쓴 시집 ‘매헌난고’도 공개돼
 

한편,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13~34세때 쓴 자필시 초고본인 ‘매헌난고(梅軒亂稿)’도 이번 전시회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보물547-2호로 지정된 이 시집에는 모두 61수가 실려 있는데, 영조의 사위로 뽑힐 때 영조의 명으로 지은 ‘남훈금(南薰琴)’을 비롯하여 영조의 시에 화답한 시, 입춘을 축하하면서 대궐 기둥에 써 붙이는 시인 ‘춘첩자(春帖子)’가 대부분이다.

#신해년 책력 ‘신해칠정’…추사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

추사 김정희가 1851년인 신해년에 사용했던 책력으로 ‘신해칠정(辛亥?正)’이라는 제목과 길상여의관(吉羊如意館)이라는 소장처가 예서로 쓰여 있다.
이 책력의 속지 사이사이에는 추사가 쓴 편지와 시 등 유묵17점이 수록돼 있어 그의 글씨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책력에 실린 유묵 중 15점은 보물 제547-2호로 지정돼 있다.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두 점의 무량수각 현판글씨로 본 추사의 '입고출신(入古出新)'



추사가 1840년 제주도로 유배 가던 도중 그의 벗 초의선사가 주석 중이던 전남 해남의 대흥사를 찾아가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추사가 대흥사의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 현판에 조선의 명필가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쓰여 있자 초의에게 당장 저 촌스러운 글을 떼어내라하고 자신이 ‘대웅보전’ ‘무량수각’ 등 직접 현판을 써준 일이 있었다.

유배길에서도 그의 자신감은 그토록 지나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8년여의 제주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던 추사는 제주 화북포구를 출발해 육지에 다다르자 곧장 초의가 머무르는 대흥사를 다시 찾았다. 추사는 그렇게 초의스님을 만나 밤새 긴 회포를 풀게 되었다. 추사는 초의에게 물었다.
“지난번 내가 제주에 내려가면서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선생의 ‘대웅보전’ 현판이 아직도 대흥사에 있나?”
“아, 그거! 물론 있지. 자네가 떼어내라고 해서 떼긴 했지만 후원 한쪽에 잘 보관해뒀지. 근데 왜 그러나?”
“초의! 그 현판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시게”
“그러지”
추사는 초의가 꺼내온 원교선생의 현판글씨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초의. 내가 예전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네. 이 훌륭한 현판을 다시 내걸고 내 글씨를 떼어내시게”

그렇게 해서 대흥사 대웅전에 아직까지 조선의 명필가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이 걸려있게 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일화는 추사의 혹독한 제주도 유배생활이 그를 정신적·학문적·예술적으로 얼마나 성숙시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 중 일곱 해를 맞던 1846년, 그의 나이 61세 때 충남 예산의 화암사에 예서체로 써서 보낸 ‘무량수각’ 현판 글씨를 보면 초심자라 하더라도 대흥사의 무량수각과 확연히 달라진 서체를 느낄 수 있다.

대흥사의 ‘무량수각’이 획이 기름지고 두텁고 자신감이 넘치며 윤기가 흐른다면 회암사의 ‘무량수각’은 예전의 윤기 흐르던 기름기가 다 빠져나가고 앙상한 듯 골기(骨氣)마저 느껴지며 초탈(超脫)한 그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듯하다. 추사 연구가들이 말하는 추사의 중년시절 글씨에서 보여 지던 ‘쓸데없는 기름짐’이 위리안치라는 혹독한 유배생활에서 다 빠져나간 것이다.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추사의 작품세계는 핍진한 제주유배가 생산해내
 

추사의 글씨에 대해 혹자들은 괴기하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사의 서법이 해탈한 경지의 선승(禪僧)처럼 법도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자재에서 비롯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평가라고 추사연구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은 입을 모은다.

언뜻 보면 획이 삐쳐 나가거나, 획이 종횡(縱橫)으로 단순해보이기 까지 하고, 어느 때는 실처럼 획이 가늘고, 어느 때는 서까래처럼 획이 두꺼우니 ‘괴(怪)’하다는 평가가 나올 법도 하다.

이번 전시회는 그 동안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만 알려져 왔던 추사의 작품을 그의 종가 인물들의 작품까지 다수 감상함으로써 '추사체'가 형성되는 과정과 그의 진정한 개성과 자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의 괴이한 글씨는 파격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특히 말년에 이르면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경지에 이른 무심한 글씨들에서 선(禪)의 경지로까지 승화된 예술세계를 만나게 된다. 또한 글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통해 추사 자신의 솔직한 인생관과 인간적 체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추사는 정적들의 무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핍진하게 보낸 말년 생활에서 비로소 추사체로 대표되는 특유의 학문세계가 피어난다. 제주 유배시절동안 추사는 옛 것을 통해 새 것을 만들어 낸다는 고증학의 반영으로서 '입고출신(入古出新)'을 청나라 학예인들 보다 오히려 더욱 잘 구현해내고 있다.








 <서귀포 신문/ 김봉현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