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7 09:10 (토)
<책과 노니는 집> 2
<책과 노니는 집> 2
  • 조형민
  • 승인 2023.09.21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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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산책] 3

동화로 만나는 삶의 복잡성, 『책과 노니는 집』 <2>
― 역사동화의 살아 있는 어린이 像(상)을 만나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 역사동화로 만나는 낯선 시공간
2. 책으로 노니는 재미와 위기
3. 어린이의 역할: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4. 나가는 말 ― 서유당의 주인

 

3. 어린이의 역할론: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최 서쾌의 책방은 더욱 바빠지고 장이도 어느덧 열넷이 되었다. 책방에는 새로운 심부름꾼 아이가 들어오고 장이는 주로 언문 필사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도리원에서 봄밤의 이야기 연회가 열린다. 동네 사람들은 도리원에 한데 모여 전기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흥에 젖는다. 그러나 봄밤의 연회는 서양 신부를 모시고 예배를 보기 위한 위장술이었음을 장이는 뒤늦게 눈치챈다.

“오늘 밤 도리원의 조촐한 이야기 연회가 좋더구나. 양반, 기생, 장사꾼, 부엌데기……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재미난 소설을 들으니, 『논어』나 『맹자』를 읽을 땐 번번이 졸았는데 언문으로 된 이야기를 들으니 귀가 트이고 가슴이 뚫리지 뭐냐.”

- 본문 중 -

사농공상을 뛰어넘어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천주 교리를 듣게 된 홍 교리의 소회다. 홍 교리는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벼슬 나눠 먹기와 뇌물에만 신경을 쏟는 양반들의 행태에 한숨 짓는다. 조선의 구태에 해갈되지 않았던 홍 교리의 의식은 천주 교리를 통해 희망을 품게 된다. 새 시대를 향한 갈망은 비단 홍 교리의 바람만은 아니다. 최 서쾌와 도리원의 아씨들, 손 직장 등 작품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어른은 천주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관원들의 감시가 삼엄해지고 모임이 발각될 순간이 다가오자 최 서쾌는 장이에게 책방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숨어있다가 날이 저물면 마포나루로 나오라고 당부한다. 책 심부름을 해 온 것과 필사를 했다는 이유로 장이 또한 아버지와 같은 위험을 무릅쓰게 한 것이 최 서쾌는 못내 죄스러울 따름이다. 그런 와중에도 장이는 최 서쾌가 홍 교리에게 심부름을 시킨 책들의 제목에 모두 동녘 동자가 들어있었음을 떠올린다. 천주학 책들의 표지를 바꿔 ‘동’자가 들어간 제목의 책으로 둔갑한 것임을 눈치채게 된 것이다.

‘동국통감, 동국이상국집, 동국여지승람, 동국세시기…….’ 장이는 서고에 들어서자마자 ‘동녘 동(東)’ 자가 새겨진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동국통감』이 보였다. 장이는 『동국통감』을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계속해서 책꽂이를 훑었다. 마음이 급하니 제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이는 고개를 저으며 금방 지나친 책꽂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 본문 중 -

장이는 휘몰아치는 생각에 입궐해있는 홍 교리의 집에 찾아가 마님을 향해 서고에 꽂힌 ‘동’자 책을 찾아 없애야 한다고 울먹인다. 맞아 죽은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휘었지만 또다시 누군가를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장이의 의식을 날카롭게 한 것이다. 장이는 도리원과 홍 교리의 집에 얼씬도 말라 했던 최 서쾌의 당부를 어기고 홍 교리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또한 도리원의 낙심이가 걱정된 나머지 최 서쾌와의 약속을 뒤로한 채 도리원으로 낙심이를 찾아간다. 도리원은 이미 관원들로 둘러싸여 천주학을 믿은 기생들이 밧줄로 결박을 당하고 있었다. 장이는 누마루 아래에 숨어있는 낙심이를 발견하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도리원 담을 넘으려 한다.

장이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인연을 저버리지 않는다. 무턱대고 홍 교리의 집에 들어가 뺨을 맞아가면서도 서고를 뒤진다. 낙심이를 위해 관원들이 점유한 도리원에 몸을 던지려는 장이는 누구보다 마음 시중을 잘 이해한 아이다. 바둑판을 그려놓고 반듯하게 획을 긋고 글자를 완성해 나가면서 장이는 어느새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갔다. 장이는 당위적인 의무로 주변인들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간 책과 책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로부터 깨우친 자신만의 가치관을 삶 속에서 발현해 나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동화의 배경이 될 경우 어린이 주인공의 역할은 주로 최대의 피해자나 목격자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장이는 사건의 주변부가 아닌 독자의 호흡을 이끄는 중심부에 서 있다. 성장소설의 도식을 따르지 않고 역사적 현실과 인물성을 적절히 조화시켜 낸 바람직한 사례로 읽힌다.

장이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인생이란 그렇듯 복잡하다. 이대에 걸친 필사쟁이 부자의 수난과 다시 곤경으로 장이를 빠뜨린 어른들의 처사가 자칫 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이는 세상에 대한 좁은 판단을 뒤로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아이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잘잘못을 가려서 정확한 공과는 따질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사에는 더욱 본질적인 가치가 존재한다. 장이라는 아이의 판단과 선택에 어린이들은 압도당할 것이다. 장이의 행동은 그간의 가치관과 우선순위 교육의 틀에서 벗어난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참맛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아는 세계 너머의 세계를 마주하고 그곳으로 가보는 것 말이다. 긴장과 해소를 반복하며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장이의 시선을 좇아 비로소 역사적 과거가 어린이들의 머릿속에 그려져 간다. 작품을 읽는 내내 어느새 장이는 독자들의 마음 속 서유당의 주인이 되어 가회방 거리를 종횡무진 나갈 것이다.

책과 노니는 집.

홍 교리는 자신을 구해준 장이에게 언문으로 쓰인 현판을 선물한다. 장이 아버지의 바람이기도 했던 장이의 책방에 걸릴 현판이다. 책으로 열리고 책으로 다시 이어질 장이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 어린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삶의 위기로부터, 미천한 신분으로부터 장이와 함께 노닐었던 책의 그 특별함을 말이다.

 

4. 나가는 말 - 서유당의 주인

아동 독자들은 『책과 노니는 집』을 통해 책이 지닌 개인과 세상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 탐구하고 시대 이입해 볼 수 있다. 역사 속 낯선 시공간에서 마주한 장이 부자와 주변 인물을 통해 어린이들은 조선 후기의 추상적 모습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언문의 대중화와 천주교 박해라는 두 가지 축과 개성 어린 인물들이 씨실과 날줄로 엮여 횡단해 나가는 서사는 오늘날 맛볼 수 없는 간접경험을 제공한다.

복잡다단한 인생의 이야기를 어린이들이 주관적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동화는 더욱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책과 노니는 집』은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잘 지어진 구조로 역사적 과거의 시간을 잘 구현해냈다. 단순 간명한 특정 사건을 서술하고 이에 대한 교훈을 섣불리 획득하려는 얕은수의 동화가 아니어서 작품은 더욱 귀하다. 역사동화의 인상적 상을 제시한 『책과 노니는 집』이 독자들 내면에 자리 잡고 장이와 같은 진정한 서유당의 주인이 되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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