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7 09:10 (토)
심심한 하루
심심한 하루
  • 정경임
  • 승인 2023.06.27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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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Happy Song] 제19화

아무런 약속도 강의도 없는 토요일, 느긋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뭐하지?’ 궁리한다. 아, 그 순간 퍼뜩 떠오른다. 오늘이 장날이네! 언제나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반려동물 ‘랑랑이’가 내 생각을 읽었다. 빨리 나가자는 눈초리가 심상찮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시청에서 나눠준 ‘하영올레’ 가방을 메고 서귀포오일장으로 향한다. 4와 9가 있는 날에 열리는 서귀포오일장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마음 놓고 산책하기에는 북적북적한 인파에 랑랑이가 초긴장을 한다. 사과와 상추를 얼른 가방에 넣고 서둘러 서귀포오일장을 빠져나온다.
 

# 월라봉 산책하기

이왕 나온 김에 지칠 때까지 산책을 해보자고 결심하며 효돈에 있는 월라봉에 올라보기로 한다. 워밍업으로 감귤박물관 둘레를 한 바퀴 휘돌고 아열대식물원에도 들러 이국적인 식물을 구경한다. 드디어 월라봉 오르는 초입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월라봉은 크지는 않지만 갈래길이 여럿이라 겹치게 걷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여러 갈래길이라 월라봉 곳곳을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름 내부를 너무 헤집어놓은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여하튼 월라봉 정상에서 저 멀리 보목포구와 섶섬을 바라보며 땀을 식힌다. 에구, 책과 랑랑이 간식을 챙겨올걸, 하는 생각이 든다. 감귤박물관 야외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기다란 의자가 놓여 있어, 이곳에 몸을 기다랗게 늘이고 책을 읽으면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다. 한 꼭지밖에 못 읽어도 그곳에서 읽는 재미는 나름 유쾌하고 즐겁다. 그래서 책과 간식을 못 챙겨온 것이 매우 애석했다.
 

# 강정바다에서 보말 줍기

월라봉에서 뭉그적뭉그적하다가 만보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배를 채우고 나니, 또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뭐하지? 바다 물때나 한번 찾아볼까, 서귀포 바다의 저조 시간이 오후 7시 22분으로 나온다. 그러면 강정바다는 약 2시간 먼저 바닷물이 들어오니까 서둘러 출발하면 조금 늦더라도 보말을 주울 수 있을 것 같다. 랑랑이는 이미 지쳐 있기 때문에 간식 하나 얼렁 던져주고 팔토시와 장갑, 비닐봉투를 챙겨 강정바다로 내달린다. 태풍이 온다는 예고 때문인지, 이미 보말을 줍고 가버렸는지 강정바다에서 보말 줍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어쩌지? 고민은 잠깐, 이왕 왔는데 바닷물이 더 들어오기 전에 보말을 주워야지. 처음에는 바닷물이 언제 휙 밀려들지 몰라 조마조마 물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며 보말 찾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두 걸음 앞으로 바닷물이 들어와도 개의치 않고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며 보말 찾기에 집중한다. 어느 정도 비닐봉투에 보말이 들어차니, 바닷물이 성큼 눈앞에서 찰랑인다.

서귀포 바닷가 풍경.
서귀포 바닷가 풍경.

 

# 보말 손질하기

고사리도 그렇지만 보말도 주워 오면 바로 삶아야 한다. 집에 오자마자 보말을 넣은 냄비에 불을 당긴다. 그리고 두 번째 샤워를 한다. 월라봉에서 산책할 때보다 강정바다에서 보말을 줍는 것이 더 고되다. 무거운 돌을 들어야 커다란 보말을 주울 수 있으니까, 팔에 힘을 줄 때마다 머릿속에서 솟아난 땀방울이 떨어지며 눈을 찌른다. 냉큼 샤워를 하고 보말이 담긴 냄비 불을 끄고 뜨거운 물만 버린다. 보말 껍질에 남은 열로 보말 속까지 익힌다. (이건 순전히 내 멋대로의 방식이다.) 보말 껍질이 어느 정도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속살을 꺼낼 준비를 한다. 보말 줍기를 1시간 정도 했으니, 속살을 빼내는 데도 그 정도의 시간이 든다. 빼낸 속살은 유채유를 두른 프라이팬에 청양고추와 편으로 썬 마늘을 볶은 뒤 한꺼번에 넣고 살짝 볶는다. 그 위에 후춧가루와 깨소금을 뿌려주면 완성이다.

# 심심한 하루, 즐기기

길게 느껴졌던 하루가 어느덧 금세 지나간다. 김혜진 작가의 <9번의 일>에는 ‘9번’이라 지칭대는 그의 하루가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까마득하게 길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잠이 들 무렵이면 하루가 또 이처럼 순식간에 지나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손에 잡히지 않고 손바닥에 빗금을 그으며 휙휙 지나가버리고 마는 어떤 것이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의 하루는 기계적인 하루다. 하지만 제주 서귀포에 사는 이의 심심한 하루는 생동감 넘치는 하루다. 태풍이 지나가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테지만, 그때에는 한라산 둘레길이나 곶자왈을 걸으면 된다. 무성한 활엽수 나뭇잎들이 커다란 캐노피를 형성해 걸음걸음마다 싱그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제주에서 심심한 하루는 이렇다. 일본의 원전 오염수가 제주 바다에 퍼진다면 세슘 보말이 덩치를 키울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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