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과 비범
평범과 비범
  • 홍기확
  • 승인 2014.06.16 16:3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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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54>

#1

흔히 여기저기 세력을 찾아 떠도는 정치인을 ‘철새’정치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분명 잘못된 표현이다. 철새는 지조의 대표주자요, 리더(우두머리)와 팔로워(부하, 시민)이 함께한다는 협치(governance)의 상징물이다.
철새는 대부분 이동경로를 바꾸지 않는다. 계절마다 정해진 하늘 길. 번식을 위해 심어진 본능에 의해 선택된 장소를 꼬박꼬박 찾아간다.
지구온난화나 사막의 증가, 도시화의 영향으로 철새의 개체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번식률이 떨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멸종하는 종도 늘고 있다.
그래도 철새는 꾸역꾸역 본능을 좇아 갈 길을 간다. 도시, 사막이 된 철새도래지에 도착해도 먹을 게 없어 죽더라도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수 천 킬로미터를 함께 항해한 수천마리 중 겨우 몇 백 마리가 살아남아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내년에도 꾸역꾸역 동료의 뼈만이 앙상한 그곳을 다시 찾는다. 동료들은 이런 리더의 결정을 굳건히 믿고 따른다.

따라서 철새정치인이라는 말은 철새를 심하게 모욕하는 말이다. 철새가 인격이 있었다면 헌법소원을 제기해도 될 법하다.

#2

우리는 점점 개인의 실존을 잃어간다.
2011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에서는 19세 이상 성인의 7.7%가 의학적인 입장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해의 보건복지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정신질환 환자가 실제 정신의료서비스를 받는 비율은 15.3%라고 한다. 결국 아주 단순히 산술적인 계산을 해 본다면 우리나라 성인의 50.3%는 적어도 1개 이상의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중 치료를 받지는 않는 잠재적인 환자가 대부분이다.

정신분석치료나 상담을 할 때 의사들이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은 환자의 내면세계이다. 그리고 이 내면세계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환자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다. 방어기제는 백과사전의 용어풀이를 보자면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여,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를 가리키는 정신분석 용어’이다.
이러한 방어기제 중 우리가 흔히 사용하며 남들로부터 느끼기도 하는 사례는 ‘동일시(identification)’이다. 자신의 부족함이나 불안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바람직한 점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가령 ‘우리 작은아버지가 정치인 OOO야. 나중에 부탁할 것 있으면 나한테 말해.’, ‘지금 잘나가는 기업 알지? 우리 아버지가 예전에 상무로 있었어.’, ‘저기 TV에 나오는 도지사 있지? 우리 학교 2년 선배야. 나랑 형님 아우 해.’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누구냐?
방어기제로 동일시한다고 해도, 당신은 그가 될 수 없다.

#3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 몇 주 전부터 합기도 학원에 혼자 걸어가겠다고 해서 허락했다. 아내는 걱정이 태산이다. 학원으로 출발할 때마다 뻔한 얘기를 해댄다. 내용은 언제나 대동소이하다.

“찻길 조심하고, 뛰지 말고.”

아이가 떠나니 아내가 말한다.

“어휴. 물가에 내 놓은 아기 같다니까. 예전에 엄마가 내가 어렸을 때 왜 뻔한 얘기를 매일매일 했는지 이제 알겠어. 정말로 찻길 조심하고, 다치지 않게 천방지축으로 뛰지 말아야 할 텐데.”

헤헤. 나도 그랬는데. 아직까지도 어머니는 내가 집을 떠날 때면 ‘조~심해서 가라.’고 하신다.

내 실존은 이렇다. 부모님에게 소중한 자식이다.
이번 주말에는 아버지의 환갑이다. 나는 철새처럼 본능과도 같이 제주에서 서울로 회귀한다.

#4

나에게는 아무리 찾아봐도 도무지 든든한 배경이 없다.
아버지는 평범하게 사셨다. 리더는커녕 그 흔한 친목회의 회장 한번 해보신 적이 없다. 어설픈 지식으로 세상에 까칠하지 않았고, 맡은 바 임무가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책임질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 파고(波高)의 높낮이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물론 정치는 남대문시장에서 오가는 말이나 신문을 통해 알고 계셨지만, 신문의 경제면 같은 것은 읽지 않으셨다. 아직도 기업의 직위고하 순서를 모르신다. 가끔씩 회사얘기가 나오면, ‘과장이 차장보다 높은 거냐?’고 물어보신다.

친척들 중에서 크게 된 인물도 없다. 다들 평범하다. 혹여 잘 나가는 친척이 있다 해도, 친하지 않거나 먼 친척이다.
아버지 친구들 중에서 크게 된 인물도 없다. 잘 된 사람이 있다 해도 아버지는 누구에게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다. 심지어 은행에 부탁하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빚을 낸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우리 작은아버지가 정치인 OOO야’라거나, ‘저기 TV에 나오는 도지사 있지? 우리 학교 2년 선배야.’처럼 나의 불안함과 부족함을 숨기기 위해 동일시(identification)할 사람이 없다. 꽤 좋다.

잘 나가는 사람은 나를 모르고,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 당당하다. 세상이나 사람에 부탁할 거리가 없으니 아쉬울 것 하나 없고, 도와줄 힘이 없으니 하루하루 가볍다. 빚 낸 거라고는 은행에서 돈 빌린 것인데, 내 집을 담보로 제공했고, 은행은 이자를 받으니 서로 꿀릴 것 없다.

#5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가족이 아프면 신장 하나 쯤 떼 줄 수 있을까?’

스스로 답한다.

‘그쯤이야.’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해본다.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한 면접이 있다. 면접시간은 회장의 국외출장으로 인해, 회장이 돌아오는 시간인 토요일 정오, 12시로 잡혔다. 경쟁자는 단 1명. 그 아니면 내가 된다.
그러나 마침 아버지의 칠순 잔치가 면접일시와 같은 12시다. 도저히 일정을 조정할 수는 없다. 칠순 잔치와 면접 둘 다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가족의 일이다. 가족이 아프면 신장을 떼어 줄 수는 있다고 누구나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칠순 잔치와 임원면접 중에서는 어떠한가? 신장은 떼 주더라도 칠순 잔치는 못 참석하고?
진정 중요한 것은, 가끔 우리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과 함께 맞물린다. 그리고 선택, 혹은 결단을 하게 한다.

내 대답은 이렇다.
가야할 곳을 가야 한다. 본능이 이끄는 곳으로 가야 한다. 철새와 같이 가야할 곳을 향해 가야 한다.

#6

남들이 가끔 묻는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냐고. 아마도 내 대답을 기다리며 대단한 기대를 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평범하게 사셨다. 어느 단체나 모임을 이끄신 적이 없다.
아니 이끄시기 싫으셨던 건 아닌가 한다. 임무는 책임을 동반하고, 책임은 가정과 일 사이에서 수많은 선택을 강요당하니까.

나는 그저 ‘우리 아버지 아들’이고, 우리 아버지는 ‘평범한 가장’이다. 남들에게는 어떠한 수식어도 붙지 않는 평범한 가정으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평범함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비범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번 주말은 아버지의 조촐한 환갑잔치가 있다. 전국 각지에서 철새처럼 친척들이 모여들 것이다.
철새의 우두머리는 잘 낫던 못 낫던 무리의 구성원을 가리지 않는다.
세상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 보다, 가정의 가장이 되기로 한 아버지의 선택.

내가 아는 평범함의 다른 이름은 비범함이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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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민 2014-08-12 17:08:38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고미숙 2014-08-09 01:26:36
잘읽었어요~~공감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