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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 제주는 4.3의 흔적과 싸웠다"
"4월혁명, 제주는 4.3의 흔적과 싸웠다"
  • 박성우 기자
  • 승인 2010.06.29 1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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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 '4.19혁명 50주년 학술토론회' 개최
반세기를 뛰어넘은 제주지역의 '4.3진상규명운동'

공론화되는 것을 꺼려하며 반세기 간 묻어두었던 4.3 사건. 증명된 것은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50년전 이미 이 4.3사건을 규명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1960년 전국적으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4월 혁명 당시에 제주에서는 도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미 4.3사건이 조명되고 있었다.

원하던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기에 현재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의거를 기억하는 이들과, 또 그들의 행적을 알기위한 도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제주4.3연구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9일 오후2시 제주벤처마루 백록담홀에서 '4.19혁명 50주년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제주지역의 4월혁명-4.3진상규명과 민주주의'라는 대주제로 펼쳐진 이날 토론회에는 이성찬 4.3평화재단 상임의원과 김두연 4.3희생자 유족회장, 임계령 4.3유족청년회장, 이석문 교육의원 당선자 등이 참석했다.

주제는 크게 3가지로 나눠 '제주지역의 4월혁명과 지역사회의 변화', '4월혁명 당시 4.3 진상규명운동', '제주지역 민주주의의 지역적 현안과 과제'에 대해 세부적으로 다뤄졌다.

4월 혁명당시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직접 뛰던 이문교 선생이 사회를 맡았고, 그는 담담한 어조로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토론회를 이끌었다.

# 1960년 4월, 제주는 함께 요동쳤다

당시의 시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1주제 '제주지역의 4월혁명과 지역사회의 변화'에서 제주대 평화연구소의 박찬식 특별연구원은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제주지역에서의 봉기는 체계적으로 전개됐다"고 설명했다.

제주지역의 4월 혁명 움직임은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는 견해에 대해 박 연구원은 "이번 발표를 통해 제주지역 4월 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한 기본 얼개가 만들어질 것이다. 지역사회의 변동과 관련해 정치.사회 각 분야에서 전개된 후속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박 연구원은 4월 혁명을 설명하며 "이는 역사적으로 두가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민주주의 보편성을 인식한 신세대 학생들과 시민층이 봉기의 주체로 나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내 모든 지역이 항거에 참여한 전국적 수준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제주지역을 제외하면 위 두 가지 의미는 매우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그 이유는 제주지역의 운동이 포함돼야 4월 혁명의 전국화가 완결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박 연구원은 "제주지역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전국적인 4.19 시위에 아랑곳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면에서는 일부 제주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시위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주지역에서의 봉기를 위해 이문교.고시홍.박경구를 비롯한 제주대학 법과 2학년생을 중심으로 사전 계획이 오갔다"고 말하며 "그러나 이 같은 정보를 사전 탐지한 경찰당국은 교수,교사 및 친인척 등을 총동원해 와해 공작을 펼쳤다"고 밝혔다.

박 연구원은 제주지역 혁명의 증거로 당시에 출간된 '제주신보'와 '조선일보' 기사의 예를 들었다.

그가 제시한 자료를 보면 1960년 5월 1일 제주신보 사설에는 '4.19사태에 이곧이어 도내의 대학생 12명이 주동되어 재빨리 데모계획을 수립했으나 사전 탐지한 경찰의 혹독한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명시됐다.

또 조선일보에는 '제주시내 극장이 끝나는 시간을 계기로 시내 각 중고등학교 학생 1백여명은 오현중고교 앞을 행진하며 데모를 전개했다. 골목골목마다 대기해 있던 남녀 중고교생들의 가세로 한 시간 후에는 1천5백명 이상으로 수가 불었다'고 보도돼 4월 27일 시위 상황을 상세하게 보여줬다.

# 혁명에 힘 입은 4.3사건, 수면위로 떠오르지만...

"4월 혁명으로 사회가 흔들리자 10년간 굳게 닫혀있던 입이 열린다" 2주제 발표에 나선 전남대 사회학과 BK의 현혜경 전임 연구원은 이같이 말했다.

'4월 혁명 당시 4.3진상규명운동'이라는 주제로 마련된 2주제 발표에서 현 연구원은 "제주대학교 학생들과 4.3유족들은, 또 언론까지 진상규명운동을 펼치며 4.3을 공론화 시킬 것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회의 양민학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의 구성으로 거창, 산청, 함양 등지의 집단학살 사건의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제주대학생 7인으로 구성된 '4.3사건 진상규명동지회'가 발족됐다"고 말했다.

현 연구원은 "진상규명동지회는 4.3 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호소문을 신문에 게재하고, 지역을 분담하며 4.3의 실태를 조사했다"며 이들의 행보를 설명했다.

그는 언론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제주신보는 '4.3 및 유지사건 규명 어떻게'라는 제목으로 기자간담회 기사를 실었고, 일주일 후 '4.3사건 및 6.25 당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를 접수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 연구원은 "이에 힘입은 유족들은 모슬포지역을 필두로 국회의장에게 국회조사단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며 "이 외에도 국회 특위와 지방의회 조사 활동 등 각계 각층의 노력이 꾸준히 전개됐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들은 5.16일 군사정변을 기점으로 사그라든다.

학생들의 조사 활동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단절됐으며 이문교 등은 계엄군에 의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검거 구속된다. 또 언론은 군사정변 이후 신두방 전문의 검거 등으로 곤욕을 치렀고, 의정활동 또한 단절됐다.

현 연구원은 "이 후에는 1980년대 후반이나 되어서야 4.3사건이 재논의된다"고 말했다.

토론회 막바지에는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논의했다.

제 3주제인 '제주지역 민주주의의 지역적 현안과 과제'에서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역사적 흐름에 따라 4.3특별법의 제정과 민주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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