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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벌써 까먹은 거예요?"
"어르신, 벌써 까먹은 거예요?"
  • 박소정 기자
  • 승인 2009.05.15 0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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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글 공부'에 나선 할머니들의 '주경야독'

"새가 날아갈 때 나는 소리가 뭐죠?"

"새? 꼬르륵 날아가지."

"어르신,  새가 꼬르륵 날아가요? 그건 배고플 때 나는 소리고."

"모르겠다. 선생님이 힌트 좀 줘봐. 힌트, 힌트"

"'포'자로 시작하고 3글자에요. 저번에 배운건데, 벌써 까먹은 거예요?"

"할머니들이 그렇지 뭐, 앗...포르르~ 포르르르르르. 맞지?"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저녁7시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회관. 이 건물 한편에 마련된 한글교실에 까르르 웃음보가 터졌다. 소리나 모양을 흉내내는 말을 배우고 있던 김복순(66)씨는 선생님의 질문에 엉뚱하게 대답해,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함께 있던 학생들이 크게 웃어 기분이 나쁠법도 하지만,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웃음꽃이 끊이질 않는 이 교실에는 60대 할머니 9명이 다니고 있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기 위해 한글교실을 찾은 사람들, 그들은 작지만 소중한 꿈을 이곳에서 가꿔나가고 있다.

할머니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수업내내 깔깔거렸다. 정확한 답을 말해도 '까르르', 틀린 답을 말해도 '까르르'...말만하면 터지는 할머니들의 쉴새없는 웃음에 교실이 왕왕 울린다.

할머니들은 매주 월,화,목,금 2시간씩 '소망의 나무'라는 한글교재로 수업을 하고 있다. 일단 한글교재에 나온 단어를 함께 읽고 학생들마다 한번씩 돌아가면서 한음절씩 읽는다. 그 다음에는 직접 공책에 단어를 쓰고 마지막에는 받아쓰기를 한다.

큰 소리로 한 자 한 자 읽으면서 또박또박 손을 잡고 글을 써내려 가는 할머니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글씨는 다소 서툴지만 그래도 직접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할머니들은 만족스럽다.

고이열(64)할머니는 "오죽했으면, 늙은이가 여기까지와서 이렇게 배우고 있겠어요"라고 말한뒤, "하지만, 이젠 글을 읽을수 있어 글을 배우는 하루하루 너무 재미있어요."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오전에는 밭일을 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눈도 침침하고 집중도 안되고 자꾸 배운 것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래도 이들에겐 2시간은 행복하다. 할머니들에게는 배움의 열정만은 다른 사람들보다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를 다녀보지도 못한 이들에겐 선생님 또한 소중한 존재이다. 글을 배워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다.

김추월(64)할머니는 "이렇게 작은 마을에 와서 한글을 가르쳐주는게 어찌나 고마운지 몰라요"라며 "우리 선생님은 글도 잘 가르쳐 주고, 재미있고 매력덩어리에요"라고 흐뭇해했다.

또, "우리는 학교를 다녀보지 못해서 선생님이라고 불러본적이 없어요. 한글교실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선생님이라고도 불러보고 재미있어요"며 "8월에 한글교실이 끝나는데, 이런 프로그램이 계속 운영돼 한글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요"라고 아쉬워했다.

한글교실 교사 최수진(34.여)씨는 "하루종일 밭일을 해 지친 어르신들에게 웃음을 드리고 싶어 최대한 재미있게 수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이 수업을 하면서 오히려 에너지를 얻고간다. 배우고 싶어하는 어르신들의 욕구를 일정부분 채워줄수 있다는 것에도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이 배우는 '소망의 나무'라는 교재에 보면, '거리에 나서보니 글자가 보이네, 하나.둘 알아가며 커져가는 나의꿈'이라는 구절이 있다. 작은 마을, 작은 교실에서 뒤늦게 한글을 깨우치며 작지만 소중한 꿈을 가꿔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표현한 듯 하다. 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배움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미디어제주>

<박소정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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