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17:02 (일)
"아직도 마음이 덜컹덜컹 사람이 무서워요"
"아직도 마음이 덜컹덜컹 사람이 무서워요"
  • 박소정 기자
  • 승인 2009.03.31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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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제주4.3연구소, 8번째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

4.3이라는 그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더 생생해지는 그때의 기억에 이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덜컹덜컹 내려앉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61년전 기억을 꺼내 어렵게 말을 하려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4.3 61주년 기념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이 올해로 여덟번째 순서로 '그늘속의 4.3-죽음.삶과 기억'이라는 주제로 31일 오후1시부터 5시까지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진행됐다.

이번 4.3증언본풀이마당은 지금까지 얘기하지 못한 4.3을 풀어내고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4.3을 겪은 당 세대들이 간직했던 기억들을 풀어내어 4.3의 진실을 알리고 해원하는 시간이다.

특히 4.3특별법이 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특별법 안에서 소외돼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한 것이다.

이번 여덟번째 '4.3증언본풀이마당'에서는 강양자(68) 할머니, 양일화(81) 할아버지, 송옥춘(84) 할머니, 김명원(77)할아버지의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4.3으로 인해 평생 후유장애로 고생한 사람들이며, 후유증을 인정받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슴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엮어나가다, 문득문득 머리속에 스치는 그날의 장면에 두 눈을 감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 강양자 할머니 "병원해택도 안되고 약이라도 먹었으면..."

첫 번째 증언을 한 강양자 할머니. 할머니는 4.3당시 밭에 일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은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나갔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 비가 막 쏟아지고 그 비 맞으면서 깜깜한 밤에 할아버지를 찾으러 다니다 보니,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오는 길에 할머니 등에 업혔는데, 그때 돌무더기에 걸려서 넘어졌어요. 그런데 그 돌무더기가 제 등으로..."

그 이후, 할머니의 몸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콩알만큼씩 뼈가 튀어나오더니, 잘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게 됐다. 여덟살 이후 튀어나온 척추 때문에 더이상 키도 자라지 않았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할머니는 홀로 외롭게 생활하고 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 앉아요. 이러한 평화로운 섬 마을에서 그런일이 발생하다니, 마음을 달래고 달래봐도 사람이 너무 무서워요."

할머니는 4.3의 후유증으로 평생 척추후만증(꼽추)을 앓았지만, '희생자(후유장애인) 불인정'을 통보받았다. 호적에 기재된 출생연도가 잘못 됐다는 증빙자료까지 제출했지만, 재심의와 행정소송마저도 모두 불인정을 받은 상태다.

"병원해택도 안되고 약이라도 먹으면 좋을련만...집은 빌려쓰고 있고, 몸이 이러니, 일도 할수도 없는 형편이에요. 70평쯤 되는 땅이 내 이름으로 있다고 해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지도 못하고 있어요. 죽는날까지 하루하루 그저 아픈거 견디며 조금 덜어내며 지내고자 하고 있어요..."

#양일화 할아버지 "매일 고문하고 때리고, 불러서 조사하고 ... "

두 번째 증언자로 나서 양일화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그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 전 일이지만 할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1948년 제주 4.3당시 제주읍내에서 우익청년들에게 붙잡혀 인천형무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곧바로 인천형무소로 이감됐던 할아버지. 한국전쟁으로 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나왔다가 다시 붙잡혀 들어가는 등 기구한 운명을 살아왔다.

"그 이후에 인민군에 이끌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황해도 개성에서 인민군 내무서원으로 전라도까지 내려 갔어요. 지리산에서 한국군에게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수용생활을 하다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고향이 제주에 내려왔죠"

잠시, 그때의 기억이 머리속에 스치는 듯 할아버지는 잠시 하던 말을 멈췄다. 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매일 고문하고 때리고, 불러서 조사하고 하는 일이 반복돼. 경찰에서 매일 그렇게 당했어요. 발목 묶어서 거꾸로 묶어서 달아매고, 물 주전자에 고춧물을 막 비우고...목숨만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으면 내려놓고 죽은 사람 끌듯이 질질 끌어다가 어디 차에 실어버리면 그건 죽으러 가는 거고..."

할아버지 역시 4.3당시 우익청년들에게 가혹하게 폭행당한 후유증을 앓고 있으나 후유장애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제주4.3으로 받은 고통은 아직도 보상이 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제주4.3을 만나 아직도 가슴속에 한 많은 이야기를 묻어둔 채 지내는 사람들, 희생자 신고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 어느날 어디에서 희생당했는지조차 몰라 애태우는 사람들, 평생을 후유장애로 고생했지만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제주4.3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미디어제주>

[제주4.3증언 본풀이마당 증언요지]

■강양자 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랑 살면서 4.3나기 직전부터 사실 분위기가 뒤숭숭했습니다. 무슨 폭도들이다 뭐다 해가지고 산에...함부로 바깥에 다니면 의심받게 되니까는 돌아다니지도 못했고 어린 마음에 혼자 있기가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집에 혼자 있을 때 낮선 사람들이 집에 와서 조사한다고 하면서 “군인 있나”, “순경이 있나” 그런거 자꾸 물어보고...어느날 할아버지가 나가서 안 돌아오니깐 할머니가 “할아버지 좀 찾으러 가겠다”고 했어요. 나도 깜깜한 밤에 혼자 집에 있을 수 없어서 할머니한테 “나도 혼자 있기 싫으니까 할머니랑 같이 가겠다”고 했어요. 그때 막 비가 쏟아지고 그 비 맞으면서 깜깜한 밤에 찾으러 다니다 보니까 배도 고프고 너무 다리가 아프고 해서 오는 길에 할머니 등에 업혔는데, 그 때 돌무더기에 걸려서 넘어졌어요.그런데 그 돌무더기가 제 등으로...넘어진 다음에는 집에 오자 정신 잃어가지고 한 일주일 이상 깨나지를 못했다고 그래요. 할머니는 내가 등 다치고 했지만...할아버지 찾는게 우선이니깐 내가 아파서 의식 잃은 것도 걱정은 되면서도 나를 방에 눕혀 놓고 할아버지 찾으로 나갔겠어요. 나는 등이 너무너무 아프고 온몸에 열이 펄펄 끓고 해도 의원이나 뭐 이런 거는 형편이 안 되니깐...그때 집 옆에 연못이 하나 있었거든요 칡넝클 생버들 널어진거, 그거를 뜯어다가 온몸에 찜질을 한 열흘 이상 계속했대요. 그래서 조금씩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고 했어요. 이후 등에 콩알만큼씩 뼈가 서서히 뛰어나오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계속 할아버지 소식을 묻고 다녔대요. 그때 누군가가 “저기 소나무밭에서 누구한테 끌려가는 거 봤다”고 할머니는 장소를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자 그 장소를 겨우 찾았대요. 찾아서 가니까는 뭐 언제 돌아가서 당했는지도 모르죠. 소개갈 때 저는 몸이 불편해 못따라가고 조금 안전한 이웃에 맡겨졌어요. 이웃에서도 몸까지 다쳐서 걸어다니지 못하는 남의 집 아이를 봐 줄수가 없어서 수소문 끝에 납읍리에 있는 친 할머니에게 연락해서 데려가라고 했었어요. 그때 제 나이 여덟 살 될 때였어요. 외할머니가 소개 내려간후 얼마 안돼서 친할머니를 통해 지서에 끌려가서 총 맞아 죽었다고 했어요. 외삼촌도 한달 차이로 그렇게 죽었대요. 외할머니만 안 돌아가셨어요 내가...

■양일화 할아버지

5월10일 선거일에는 완전 반대운동으로 부락민을 총동원 시켜가지고 산으로, 궤로 가서 숨었지. 하루종일 물애기, 어른 할 것 없이 숨어 살다가 저녁때되니까 들어왔어. 들어와서 보니까 경찰들이 와서 숨으러 안 간 사람은 다 잡아간 거야. 잡아갔는데, 그 사람들 어떻게 됐느냐 하면은 다 총살시켜버렸어. 산에서는 산 사람들은 악분이 나가지고 저지지서를 습격한단 말이야. 가서 불붙이고 습격한거지. 사람 죽이고 쏘아가니까 지서에서는 또 올라와서 동네 초가집 안팎거리를 그대로 불 붙여버리고 내려갔어. 그 곡석타는 냄새가 며칠났지. 그렇게 해서 가버리니까 이제는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그 쪽 사람들에게 불을 지르는 거야. 그러니 그 동네에서 바로 자꾸 대립이 돼. 또 불지피고 난리가 나고 해 가니까 맨날 숨으러 가는게 일이었지. 낮엔 산에 숨으러 가고, 밤에는 슬그머니 집에와서 밥해먹고 누웠다가 또 아침이 되면 숨으러 가고, 그러니 농사도 못지어. 그리고 4.3나서 서북청년단이 들어왔는데 행패가 너무 심했어. 무조건 잡아가버려. 아주 독한 사람들이야. 서북청년단들이 음력 9월 23일날 동네사람 9명을 모슬포 굴에다 잡아다가 죽여 버렸어. 굴속에 가서 죽여버리니까 임자 있는 사람들은 미리가서 시체르 성할 때 찾고, 나중에 간 사람은 막 썩은 다음에 가니...11월 20일 되니깐 “산간에 있는 사람은 해변으로 다 소개를 해라. 아니면 불붙여 버리겠다”고 해서 소개 명령이 내렸어. 난 제주시 백부님 댁으로 피난을 가서 살았지. 그 당시엔 3인 이상 모이면 무허가 집회라고 해서 허가없이 집회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잡아 갈때였어. 죄가 있든 없든! 그 당시 집에 있자니 심심해서 동네 사람이 하는 방애공장엘 갔어. 심부름 하면 먹을 것도 생길거고 심심치도 않다고 생각돼. 그 때 나는 장기 두는 것을 구경했지. 그때를 쓰면서 잡아가는 거라. 난 집에 가불주해서 살짝 대문간으로 나왔거든. 그런데 나를 뒤에 바짝 쫓아와서 “너 이놈아, 거시기 어디 가는 거냐”고 물어 “나 놀러왔다가 집에 갑니다”하니까 “좀 의논할 말이 있으니 나하고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렇게 해서 툭 잡히게 된거지. 가서 의논은 고사하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거야! 그때부터 ‘산사람’으로 인정해버리는 거지. “아니다”고 해도 별수 없는거, “너 어디서 왔느냐. 주소를 말하라”“금악”이라고 한거지. “넌 산에서 온 놈이 틀림없다”하면서 그 청년단에게 매를 직사게 맞고 다쳤는데, 1구서에 집어넣어버린거야. 정신없이 두드려 패니 몸뚱이는 덩그렁같이 붓고 그렇게 맞아서 허리가 꺽어져 운신 못하니까 포승 채운 채 질질 끌면서 유치장 안에 담아버린 거야. 1구 유치장에서는 매일 고문하고 때리고, 불러서 조사하고 하는 일이 반복돼. 경찰에서 매일 그렇게 당했어. 취조실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도 취조를 받는데, 경찰이 ‘너도 바른말 하지 않으면 저렇게 돼. 저거봐’해서 구석에 보면 팔은 뒤로 묶어서 거꾸로 사람을 달아 매거든 달아매서 움직이는 사람은 계속 두들기면 정신을 잃어버리니깐 축쳐버려. ‘아야’도 못하고, 기절한거나 다름없는데 아플 뭣이 없는거야. 이젠, 발목 묶어서 거꾸로 달아매. 궤는 물 주전자에 고춧물을 막 비워. 궤는 물만해도 사람이 죽는데, 콧구멍으로 ‘괄괄괄괄’ 비워가면 처음엔 “아이고아이고”하다가 나중에는 잠잠해져. 정신을 완전 잃어버리는 거지. 그래서 목숨만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으면 풀어서 내려놓고 죽은 사람 끌듯이 질질 끌어다가 어디 차에 실어버리면 그건 죽으러 가는거고...유치장에서 나를 패다가 버치니까 자기네들끼리 억지로 내가 산에 쌀을 줬다고 팍팍 써버리는 거야. 이거 뭐 취조 하나마나 필요없다고 해서 써놓고 “했지?했지?”해도 대답하지 않으니까 전깃줄을 이래 감는거야. 전깃줄 감아서 옛날 수화기처돌리는 거. 그걸로 돌리면 정신이 아뜩 없어져버리거든. 히여뜩 해 버린다고. 떼지 못하고 양손에 감고 돌려서 정신을 잃어버리면, 한 걸로 인정해서 자기네끼리 박박 써서 내기 때문에 “했다”, “안했다”는 말도 못하고. 처음엔 어디 가는 줄도 몰랐지. 뒤로 손을 포승줄로 묶인채 유치장을 나와서 곧바로 배에 타라고 하니까 인천가서 보니까 인천인가 했지. 쇠고기 싣고가는 배에 탁 실어버렸지. 자기네 말 안 들어가면 개머리판으로 트멍만 나면 가서 쑤셔박아. 죽은거나 마찬가지지. 그때 갈 때 배가 꽉 차니까 한 300명 정도는 같이 간 것 같아.

■송옥춘 할머니

집에오니까 또 붙잡혀 간거라. 가보니까 아기 아방이 나왔더라고, 나한테 문초를 하려고 막 물어봐. 그러고 나서 앉아서 쉬고 있으니깐 그 사람 손이영 묶고이디 묶고 한게 보여. 전기 취조를 한 모양이라. 누런 물이 질질 흘러나오더라고. 그 물 영 받아 치우고 막 불쌍해져라. 그러다가 나도 살젠 그 사람 보고 나가 무슨 죄로 여길 끌려와서 나를 이렇게 다 죽어지게 만드냐고. 죽이지도 아니하고 살리지도 아니하고 이디 와서는 살지 못하켄. 당신은 나를 살리시려면 살리시고 죽이실려면 죽이시고 나가 뭔 죄로 이렇게 와야 하냐고, 아기 안으며 그렇게 말하니깐 그 사람이 송옥춘 아무죄도 없대. 죽일려며 내가 죽고 맞아도 내가 맞을테니 아무죄가 없으니깐 내보내라고. 그렇게 남편이 얘기했어. 그리고 딱 이 자리에서 이혼을 할테니 오늘부터 이혼 하니깐 앞으로 부르지 맙써 한거라. 신랑이랑 나는 순경들 앞에서 내 도장 놓고, 그 사람 도장 놓고 거기서 이혼을 했어.그리고 나서 아기를 젖먹이는데 한 사람이 내 쪽으로 오더라고. 총부리로 나를 때리지 않고 어린아기를 팍 때리더라고. 총부리에 아기 머리에서 팍하고 소리가 나. 그때부터 아기가 울지도 않고, 난 몰랐지.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내 나이 21살이었고 어렸어. 기억으로는 그날이 음력 3월 27일닮아. 확실해. 그렇게 아이가 일어나지 않고 아기를 안고 있었어. 집에 와보니깐 8시쯤인거라. 친정어멍이 있었어. 아기 안고 있는데 아기가 치랑하고 어멍이 “이년아 이래오라” 어멍은 아버지 그렇게 돼서 도립병원 다닐땐데 내 얼굴을 보고 “이거뭐여? 죽을꺼면 그놈집에가서 탁 죽고오지 그건 무너냐 나 어떵사나”하는거라. 그리고 나 생각엔 아기를 어머니 맡안. 그런데 아기가 무겁더라고 “야 무사 우리집에 끄서 왔냐. 그놈의 집에 끄서 오지”아기가 힘이 없어 치렁해 있으니깐, 난 죽은 애기 안아서 하염없이 울었어. 어멍이 이거 뭐냐 그놈에 집에 놓고 오라고 하는데 그 놈 집이 이시냐?친정어멍이 입다물고 있다가 밤에 어디가서 심어불게 골괘이 가져 왔드라게. 그 어멍이랑 한 아주방이랑 둘이가서 묻고왔어. 그렇게 했다고 난 어디가서 얘기하지도 못하고 무서웠어. 난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서워, 목으로 피가 콱콱 나지는것 같다고. 취조 받았을 때 산에 올라간 사람 이름 보여주면서 이 사람 아냐고, 누구 알아지겠냐고 물어봐. 그럼 나는 정말 모르는데 모르겠다고 하면 더 두들겨 맞았어...

■김명원 할아버지

경찰에 연행됐다가 집에 오니까 토벌대들이 와서 불을 지른거에요.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 안보이고 부락엔 젊은 사람들이 보이질 않고...나가보니까 완전히 불바다라. 남의 집 다 타다가 남은 데 들어가서 짚 같은 것 쌓아놓고 살다가 도저히 이래선 안되겠다고 해서 결국 어둔밤 가족들은 신흥리로 내려왔습니다. 다같이 죽는다 그러니 할 수 없이 o가 기어서라도 수망리 가겟다. 죽어도 수망리 가서 죽겠다고 말하고 이틀 밤 자고 수망리에 가버린 겁니다. 수망리 동쪽 먼모루라는 돌로된 오름에서 토벌대가 오나 안오나 망보면서 피신해 살았지요. 그땐 아이고 어른이고 그 사람들 앞에서 나타나면 다 쏘아버렸어요. 하루는 우리 왕할아버지가 “이렇게 있다간 안되겠다. 남원리에 가든지 아니면 깊은 산에 들어가야 살지 그렇지 안허민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때 귀순만 했으면 우리가 다 살건데...살다보니 겨울엔 식량도 없고 어느날 밤 아버지는 눈이 많이 올 줄 알고 부락에 감저라도 파서 갖고 올려고 부락으로 내려갔어요. 의귀리에 주둔했던 토벌대가 수망리 토벌왔다가 보니까 사람들 발자취가 있는거야. 토벌대들이 그 발자취를 쫓아온 거지. 아버지가 산에 도착해 소에 고구마 싣고 온것을 내리고 굴안으로 들어와 우리한테 “고구마라도 삶으라”고 한 순간 총소리가 탕나는 거라. 그때 어머니가 “우린 죽어도 좋으니까 아버지가 살아시민 나중에서라도 우리 시신이라도 챙길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거에요. 어머니가 하는 말이 “우리 죽어도 좋으니까 당신이라도 살라”고 아버지를 쫓아내다시피 굴 밖으로 내보내더라구요. 얼마안되어서 군인들이 왈칵 모여들어 굴속으로 총을 막 쏘아대는 거예요. ‘와자자자 와자자자’하면서 그때부턴 완전히 총소리가 콩볶는 소리라. 어머니가 총을 맞았어요. 굴 밖에서 쏜 총이 옆구릴 관통한 거라. 그래도 아프단 소리 안하고...15일 된 물애기 안고 의귀료에 왔어요. 의귀교에 끌려간 어머닌 총을 맞은게, 위에서 보니깐 허벅지로 총알이 관통된 거라. 아버진 굴밖으로 나갔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고...어머니는 고통을 참으면서 그날밤 의귀리에 잡혀왔어요. 막 고통하면서 신음을 하면 아무리 원수지간이고, 적지간이라 해도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물애기 젖먹이는 걸 뿌리치게 해서 어머니를 데려가서 죽인다는 건 어느 나라 법인지 몰라요. 솔직한 애기로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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