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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름 찾기, 민족적 사명과 핵심 가치에 기초해야”
“4.3 이름 찾기, 민족적 사명과 핵심 가치에 기초해야”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3.04.03 1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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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교수, 4.3 75주년 서울 기념식에서 4.3 정명운동 방향 제안

“4.3, 아직도 ‘사건’이라는 몰개성한 이름의 족쇄 벗어나지 못해”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는 헌법 전문 제시
3일 오후 서울 신촌역 창천문화공원에서 열린 4.3 75주년 기념식에서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기념사를 통해 4.3 정명운동의 방향을 헌법 전문에서 찾을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사진=4.3 75주년 서울 기념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3일 오후 서울 신촌역 창천문화공원에서 열린 4.3 75주년 기념식에서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 기념사를 통해 4.3 정명운동의 방향을 헌법 전문에서 찾을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사진=4.3 75주년 서울 기념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제주4.3 75주년을 맞아 ‘4.3의 이름 찾기’가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3일 오후 서울 신촌역 창천문화공원에서 열린 4.3 75주년 서울 기념식에서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의 기념사를 통해 4.3 정명 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이 제시된 것이다.

이날 기념사에서 전우용 교수는 故 박종철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은 직후인 1987년 2월 검찰이 ‘이적 표현물’이라면서 출판사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던 ‘한국민중사’라는 책이 ‘4.3 항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국내 첫 출판물이었다는 과거의 일을 소환해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그가 법정에서 재판을 방청하던 중 검사가 ‘4.3 항쟁’이라는 역사 용어를 따옴표 안에 넣은 것을 문제삼았던 36년 전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검사는 4.3이 제주도에서 무장 폭도들이 일으킨 난동이자 반란인데, 이를 ‘4.3 항쟁’이라고 왜곡 표현하면서 따움표 안에 넣어 그 의미를 특별히 강조했다고 주장한 상황이었다.

반면 중진 역사학자를 증인으로 부른 변호인단은 반대 신문에서 “어떤 용어를 따옴표 안에 넣는 것은 그 용어가 아직 학계에서 공인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는 ‘소위’ 또는 ‘이른바’에 해당한다”는 답을 내놨다.

전 교수는 당시 일을 이렇게 소상히 기억해낸 뒤 “따옴표 하나의 의미에 대한 해석 문제로 유‧무죄를 가리던 당시 상황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참 어이없고 한심한 일”이라면서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이런 장면을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희극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엄중한 현실의 문제를 지적했다.

특히 그는 “해방 직후 시점에 우리 민족의 시대적 과제가 식민지 잔재 청산과 민족 독립국가 건설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면서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이후 4.3이 종료될 때까지 제주도는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려는 우리 민족의 지향이 전 세계가 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민들이 겪었던 참상에 대해서도 그는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된 이념적‧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고립된 섬 제주도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분출한 결과였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그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시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실상은 냉전 의식이 어느 정도 극복된 다음에야 비로소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드러낼 수 있었고, 87년 민주화 이후 또는 80년대 말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수십 년간 제주도민들과 양심 있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당시에 일어났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건들의 진상이 이제 많이 밝혀졌다”고 지난했던 4.3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 결과가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와 전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21년 국방부 장관, 경찰청장과 함께 제주도를 찾아가 군과 경찰이 사죄하는 마음을 포용과 화합의 마음으로 받아달라고 호소하면서 국가 폭력의 역사를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겠다고까지 다짐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인간의 양심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 무절제한 국가 폭력이 이 사건의 주요 본질이었음을 국가를 대표해 공식 인정했던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최근 들어 잔혹한 이념적 광기가 다시 몰아치고 있다”면서 4.3 당시 잔혹함과 악랄함의 대명사였던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 단체가 제주에서 집회 신청을 한 일과 북한에서 넘어와 집권 여당의 최고위원이 된 태영호 의원이 제주4.3을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한 일 등을 사례로 들었다.

이에 그는 “태 의원에게 ‘당신은 3.1운동도 김일성의 아버지가 지도한 사건으로 배우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다”며 차마 못 본 척, 못 들은 척 지나칠 수 없는 행태이며 망언들이지만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늘고 있는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4.3의 이름 찾기’ 화두로 돌아간 그는 “사건은 본디 법률 위반 또는 소송의 단위를 의미하는 법률 용어”라면서 “이 말을 역사 용어로 쓰는 것은 그 의미를 특정할 수 없다는 지적 허무감과 무력감의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4.3 사건’이라는 표현이 역사 용어로서 완결된 표현이 될 수 없다는 부분을 신랄하게 꼬집은 것이다.

이어 그는 “그동안 냉전 이데올로기 때문에, 또는 독재 권력의 무도한 해석권 독점 때문에 사건이나 사태로 불렸던 집단행동들이 합당하든 그렇지 않든 이름다운 이름을 찾은 사례가 적지 않다”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최근 성남시가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는 이름을 ‘광주 대단지 민권 운동’으로 바꾼 사례를 든 뒤 “그러나 4.3은 아직도 ‘사건’이라는 몰개성한 이름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그는 “우리 선조들의 지난한 독립운동사는 헌법 전문에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는 구절을 넣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면서 4.3의 이름 짓기도 이같은 우리의 민족적 사명과 공유해야 할 핵심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최근 이 나라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을 몰각하고, 정의‧인도와 동포애를 짓밟는 작태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이 4.3 기념사업과 기념식이 우리의 민족적 사명을 일깨우고 우리의 핵심 가치인 정의‧인도와 동포애의 공감대를 넓히는 데 기여하리라 기대한다”면서 “4.3의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주는 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우리 선조들이 바랐던 정의‧인도와 동포애로 다시 단결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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