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기록한 4.3 "다랑쉬굴 유해는 왜 안치될 수 없었나"
언론이 기록한 4.3 "다랑쉬굴 유해는 왜 안치될 수 없었나"
  • 김은애 기자
  • 승인 2022.03.26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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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굴 발굴 30년, 성찰과 과제' 특별 세미나
언론이 기억하는 다랑쉬굴 발굴, 이면의 사건들
3월 26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 다목적홀에서 ‘다랑쉬굴 발굴 30년, 성찰과 과제’라는 주제로 특별세미나가 열렸다.

[미디어제주 김은애 기자]

‘4·3’ 희생자들의 원혼은 아직도 허공 중에 헤매야 하는가.

44년 전 ‘4·3’의 회오리 속에서 집단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11구의 시신들이 구좌읍 중산간 지대 자연동굴 속에서 희생된 당시의 모습으로 발견돼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 6km 지점으로 해발 170m에 위치한 속칭 ‘다랑쉬굴’.

이는 1992년 4월 2일, <제민일보> 1면에 게재된 기사 내용이다. 당시 <제민일보>의 4.3특별취재반은 ‘다랑쉬굴’을 포함해 제주 전역에 위치한 4.3 관련 유적들을 취재하고 있었다.

“1992년 3월 22일, 제주4.3연구소의 김동만 연구원(현 한라대 교수, 제주언론학회 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김 연구원은 ‘유해 10여 구와 생활 도구가 있는 작은 굴을 발견했는데, 4.3때 유해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놀라운 내용을 전했습니다. 제가 놀란 이유는 ‘드디어 그 유해가 세상에 드러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은 다랑쉬굴의 유해를 직접 보지 못했을 뿐, 내용만큼은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3월 26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 다목적홀. 비가 그치고 짙은 안개가 4.3평화공원을 감싸던 날이다. ‘다랑쉬굴 발굴 30년, 성찰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특별세미나에서 첫 발제자로 나선 제주4.3위원회 김종민 위원(전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 기자, 이하 ‘김 위원’)이 말했다.

“1988년 3월 결성된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은 이미 ‘다랑쉬굴’에 대한 채록을 수집해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4.3 당시 다랑쉬굴에 숨어 생활한 경험이 있는 교사 채정옥 씨를 취재해 증언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제주4.3위원회 김종민 위원(전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 기자)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다랑쉬굴’. 하도리, 종달리 인근 주민들이 4.3의 광풍을 피해 숨어 살다 죽임당한 곳이다.

1948년 12월 18일, 이들을 발견한 군경민 합동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었고, 굴 속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질식해 목숨을 잃었다.

제주 전역에서 이 같은 민간이 학살이 이뤄졌지만, 뭍 사람들은 이를 잘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제주 사람들도 ‘4.3’을 쉬쉬했다. ‘4.3’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빨갱이’라는 죄명으로 순식간에 죄인이 되는 시절이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다랑쉬굴 특별전시관이 설치돼 있다. <미디어제주>
제주4.3평화기념관에 조성된 다랑쉬굴 특별전시관. <미디어제주>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다. ‘다랑쉬굴’에서의 비극은 그렇게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역사적 실체는 언젠가 드러나는 법. 40여년 어둠의 세월이 지나고 1991년 12월, ‘제주4.3연구소’ 연구원들은 4.3 당시 사라진 마을을 조사하던 중 ‘다랑쉬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제민일보 등 언론의 취재로 인해 1992년 4월, 마침내 그 현장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를 회상하며 김 위원은 “깊은 회한과 짙은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소감을 전했다.

“다랑쉬굴의 유해가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지 못한 채 정권의 강요로 화장돼 바다에 뿌려진 점은 당시 취재 기자였던 필자에겐 깊은 회한과 짙은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만일 민주정부 때에 그 사실이 공개됐다면 ‘4.3평화공원’ 내의 어느 한 곳에 예를 갖춰 안장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은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유해를 매장하지 못하게 하고, 화장해 바다에 뿌리게 했다. 그것도 정권의 강요가 아닌, 유족의 요청인 양 교묘하게 꾸며서 말이다. 행정이 '유해 화장'을 추진하며 근거로 삼은 것은 "유족과의 회의에서 화장 요청이 있었다"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적극적으로 화장을 권한 쪽은 행정이었습니다. 당시 구좌읍장은 '유족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기는, 하지만 세간의 여론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매장을 재차 제안하기도 했는데요. 행정은 '화장'을 원했습니다."

제주4.3위원회 김종민 위원(전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 기자)

이어 김 위원은 "유족들이 화장을 원했다"라는 행정의 주장 또한, 자신의 취재 내용과 차이가 있음을 알렸다. 김 위원이 취재한 희생자의 친아들, 친딸은 '매장'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유골의 일부만이라도 가족에게 돌려달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화장'과 '매장' 간 이견을 조율하기 위한)유족 회의에 희생자의 직계가족(친아들, 친딸 등)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유족 대표로 참여한 이들은 희생자의 6촌 혹은 7촌뻘 되는 가족이었습니다. 직계가족들의 목소리가 회의 때 제대로 담기지 못한 겁니다."

김 위원은 모든 일련의 과정에 노태우 군사정권의 숨은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 평가했다.

“노태우 군사정권은 다랑쉬굴 희생자의 묘역이 ‘제2의 망월동’이 될까 걱정했고, 이를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리수를 둬 가면서 유해를 화장한 것이죠.”

‘광주 망월동 묘역’은 광주5.18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다랑쉬굴이 발굴된 1992년 당시에도 '망월동 묘역'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어 김 위원은 다랑쉬굴 희생자 유해 화장이 이뤄졌던 때, 그날의 상황을 기록한 취재수첩 내용을 공개했다.

다랑쉬굴 장례 유감(遺憾)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구좌읍 ‘다랑쉬 굴’ 11구의 유해는 결국 불에 태워져 바다에 수장됐다.

“언제 어디서 돌아가신 줄도 모르다가 44년 만에 기적적으로 찾게 된 조상의 유골인데 이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니 기가 막힐 뿐입니다. 외부의 압력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15일 오후 2시 김녕리 앞바다, 한 줌 재로 남은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던 후손들은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는 “매장을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이 한사코 화장을 주장했다.”는 행정당국의 발표와는 너무도 거리감이 있는 말이었다.

한 유족은 “화장이 불가피하다면 뼛가루의 11분의 1을 달라며 심한 다툼을 벌였으나 결국 분위기에 밀려 승복했다.”고 밝혔다. 장례식에 있어서 행정당국의 소홀함에 불만을 터뜨리던 또 다른 유족은 “지금껏 억눌러 참아왔는데 매장할 경우 누가 똥·오줌 싸고 돌맹이를 던질까봐 화장에 동의했다.”며 다랑쉬굴과 관련된 왜곡된 여론과 유족들의 피해의식을 표출했다.

이날 장례식은 구슬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뭔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쫓기는 분위기 속에서 서둘러 진행됐다. 새벽 6시 유족들이 다랑쉬 굴에 도착했을 때 유골은 이미 수습돼 있었고, 예정보다 1시간 앞당겨 진행되는 바람에 장례식에 참석키 위해 나선 도의원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취재기자 역시 화장된 유골을 바다에 산포하는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배에 승선하는 과정에서 앞을 가로막는 구좌읍장과 경찰의 취재방해로 심한 실랑이를 벌이다 유족들의 거센 항의 지원으로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다. 내 조상의 일이어도 이렇게 했을까.

그러나 토벌대에 의해 죽었다는 이유 하나로 ‘나 언제 어떻게 죽었노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저 음습한 동굴 속에서 44년을 기다려온 유골들은 뒤늦게나마 후손의 손길과 맞닿았으니 억울한 넋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었으리라. 

-김종민 전 제민일보 기자가 다랑쉬굴 유해 화장 당시 취재수첩을 통해 게재한 글 내용

지금이야 유해를 ‘화장’하는 문화가 널리 통용되는 시대지만, 그때는 달랐다. ‘화장’은 아주 드물게 이뤄졌고, ‘매장’ 문화가 일반적인 때다. '화장'은 고인에 대한 예를 다하지 못하는 행위라는 인식이 팽배한 시절, 행정이 나서 4.3희생자 유골에 대해 '화장'을 종용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이해한다면 김 위원의 ‘취재수첩’ 내용에 좀더 공감을 깊이 할 수 있을 테다.

끝으로 김 위원은 ‘다랑쉬굴 유해 발굴’이 4.3진상규명 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4.3추모제 장소에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1992년 다랑쉬굴이 세상에 알려지며 침체된 4.3 진상규명운동이 가속화됐고, 전국적으로도 4.3을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죠.”

1987년 5월 민주항쟁으로 일궈낸 대통령 직선제. 이는 4.3을 이슈화하는 계기로 작용했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야합’으로 4.3의 진실은 다시 탄압받아 위축됐고, 경찰의 원천 봉쇄로 4.3 추모제도 무산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보도된 ‘다랑쉬굴 유해 발굴’ 기사. 이는 4.3을 세상에 알리고, 그날의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로 작용했다.

“여전히 다랑쉬굴은 방치되어 있습니다. 다랑쉬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도 없이 서둘러 화장하고 바다에 뿌려진 것에 대하여 당시 다랑쉬굴을 발견했던 한사람으로서 여전히 죄스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날 개회사를 통해 제주언론학회 김동만 회장이 말했다.

언론이 기록하는 역사가 때론 진실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여느 역사서가 그러하듯 언론의 기록 또한 선택적 편향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언론의 기록’을 소중히 보관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유해를 ‘매장’하지 않고, ‘화장’한 당시 정권의 속내. 부자연스러웠던 행정의 행태는 ‘언론’만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이 ‘역사’로 남기 위해, 그날의 보도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숨어있는 불의를 알아채고, ‘역사적 기록물’을 남긴다는 사명감으로 이를 보도할 줄 아는 용기. 어쩌면 이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이자,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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