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명 구술 이유는 4·3을 풍문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아서”
“7천명 구술 이유는 4·3을 풍문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아서”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8.10.03 14: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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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 평화연구소, 대학 차원 4·3 첫 모임 가져
김종민 전 4·3전문위원 초청해 4·3 가치 등 토론
​​​​​​​올해 4차례…내년부터 본격 프로그램 진행하기로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4·3 70주년이다. 아픔의 기억이 오랜만큼이나 연구 성과도 그에 맞먹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솔직히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건 4·3을 연구하는 이들이 극히 적다는 데 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을 이해하고, 그걸 파헤치려면 제주에 사는 이들이 더 몰두하고 연구성과를 내놓아야 한다.

어쩌면 반성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 반성의 짐은 학계가 안고 가야 한다.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야 하고, 학계에서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다행히도 그런 반성이 시작됐다. 3일 제주대 평화연구소(소장 조성윤 사회학과 교수)가 인문대 1호관 복합회의실에서 그런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은 첫 만남이다. 연구소가 4·3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기획을 만들었고, 작은 세미나 형태로 발을 디뎠다.

# 제주대 평화연구소의 의미있는 발걸음

조성윤 소장은 “연구소가 4·3에 대한 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현재 4·3은 진지하게 연구해야 할 젊은 이들이 없다. 연구 활성화도 돼 있지 않아 문제이다. 그래서 대학교가 연구의 중심을 잡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걸 우리 연구소가 맡자고 했다”고 운을 뗐다.

제주대 평화연구소가 대학 차원의 4.3 연구모임을 첫 가동했다. 미디어제주
제주대 평화연구소가 대학 차원의 4.3 연구모임을 첫 가동했다. 미디어제주

연구소는 올해 4차례의 모임을 가진 뒤 내년부터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된다. 바로 4·3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키울 계획이다.

첫 자리이기에 4·3을 이해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제주4·3을 말하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날 초대됐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이었던 김종민 전 4·3전문위원이다. 그는 연구소가 제시한 ‘4·3연구 현황과 향후 과제’에 대한 주제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4·3 연구가 가야할 방향성을 제시했다. 우선 그의 말을 옮긴다.

“1987년 6월 항쟁 덕분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아무리 언론사라고 하더라도 취재는 어려웠을 겁니다. 저는 증언채록에 힘써왔어요. 요즘은 구술이라는 표현을 쓰던데, ‘오랄 히스트로(구술사)’의 중요성을 알고 증언에 힘쓴 건 아니었어요. 30년간 7000명을 인터뷰 했는데 증언을 해야 했던 이유는 국내 자료가 없거나 왜곡된 게 많았고, 그걸 보완하려고 했던 겁니다.”

역사는 기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그가 취재현장에 뛰어들었을 때 4·3은 이미 왜곡될대로 왜곡된 상태였다. 증언 채록을 하다 보니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고 하지만 결국은 잘된 방향이었다고 그는 참석자들에게 들려줬다. 구술의 중요성을 다음처럼 얘기했다.

“영화 ‘라쇼몽’은 서로 다른 증언을 보여주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진술한 게 과연 맞는지를 영화는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영화는 증언의 허구를 강조하지만 끝까지 구술을 하다보면 도식화된 역사가 아니라 정말 그 진실의 밑바닥을 알게 됩니다.”

왜 7000명의 증언을 들어야 했을까. 7000명으로부터 증언을 듣는 일이란 보통 일이 아니다.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정말 끔찍한 이야기가 김종민 위원의 뇌에 박혀 있다. 어쩌면 그는 4·3 유족들이 건네준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산다. 수천명의 증언을 듣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었다.

# 활자화되지 못한 기억이 남긴 아픔들

“처음엔 샘플링만 하려 했어요. 유형별로 몇가지를 나눠서 일곱 개나 여덟 개 마을을 조사하려고 했죠. 며칠을 고민했는데 이재수가 떠오른 겁니다. 이재수난은 아무런 기록도 없이 풍문으로만 전하고 있어요. 제주4·3도 그랬어요. 만약 구술을 받지 않는다면 풍문으로만 남을 수 있겠다는 조바심이 든 겁니다.”

4.3 기록의 산증인인 김종민 전 4.3전문위원. 미디어제주
4.3 기록의 산증인인 김종민 전 4.3전문위원. 미디어제주

그는 기억화 된 역사를 끄집어냈다. 활자로 만들어냈다. <4·3은 말한다>는 모두 5권의 책으로 묶였다. 6번째 <4·3은 말한다>도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계획이다. 어쩌면 그는 4·3을 위해 태어났고, 4·3을 위해 헌신을 해온 이다. 취재 초반엔 경찰들이 붙어다녔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이젠 경찰에서 그를 초청하는 인사가 됐다.

“4·3평화기념관에 민간인 학살을 거부한 문형순 서장이 소개되고 있어요. 그걸 본 경찰청 고위간부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문형순 소장을 올해의 인물로 뽑겠다나요. 정말 선정됐어요. 문형순 소장의 흉상도 제막한다는데 제막식 때 참석해달라고 하네요.”

세상은 바뀌긴 했으나 기억이 바뀌는 건 아니다. 활자화되지 못한 기억이 더 많다. 어쩌면 그런 기억들이 더 울컥하게 만든다. 실제 그런 사례를 이날 첫 모임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참석자들도 숙연해졌고,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있었다. 4·3 때 불타는 어른들의 시신을 꺼내지 못한 한이 가슴에 박힌 이들, 붉은 색만 보면 집이 타들어가는 장면만 떠오르는 사람들.

올해는 4·3 70주년이어서 수많은 행사들이 열렸다. 행사를 열며 ‘항쟁’을 꺼내는 이들이 많았다. 통일을 외쳤고, 미군정에 맞선 이들이었기에 ‘항쟁’이라는 단어가 걸맞다는 거였다. 김종민 위원은 어떤 생각일까.

“4·3 정명 논쟁이 벌어지고 있죠. 4·3을 항쟁으로 부르자고 합니다. 저는 지금은 반대입니다. 제가 4·3 취재를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지탄을 받았을 겁니다. 동학혁명만 보더라도 관군 희생자도 있습니다. 농민군이 일사분란하게 올바른 일만 한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기록이 많거든요. 그러나 지금은 동학혁명을 두고 관군이 죽었느니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4·3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가족사로서, 기억으로서의 4·3이 아니라 길게 호흡을 하면서 역사의 눈으로 봐도 늦지 않다고 봐요. 그때 정명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 제주4·3은 마치 조선시대 민란 닮아

그러면서 그는 4·3을 조선시대 일어난 민란의 성격으로 규명했다. 조선시대 가렴주구를 일삼던 목민관에 맞선 게 민란이었고, 4·3이 그런 성격을 지녔다고 그는 보고 있다.

“나중엔 4·3을 통일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프랑스혁명만 봐도 그래요. 프랑스혁명을 두고 자유·평등·박애를 얘기하는데 그건 결과물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프랑스혁명 때도 애꿎은 희생이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참석자들에게 하나의 궁금증이 제시됐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는데 마지막 사령관인 이덕구는 안되는가였다. 참석자들은 경우회와 유족회괴가 화해를 한다고 하면서도 이덕구는 빼고 있다며, 더 나아가 이덕구를 의인으로 다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그에 대한 김종민 위원의 이야기를 종합한다.

김종민 전 4.3전문위원이 아직은 4.3정명이 쉽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김종민 전 4.3전문위원이 아직은 4.3정명이 쉽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제주

“여전히 우리 사회를 억눌리고 있는 건 분단입니다. 6·25를 경험한 이들은 아직도 북한의 남침을 걱정해요. 그게 현주소입니다. 여전히 종북좌파라는 단어가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언젠가는 이덕구가 의인이라는 이름을 달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김종민 위원은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그렇지 못하다고 답했다. 어쩌면 4·3에 대한 정명을 지금 외칠 게 아니라, 좀 늦추더라도 길게 호흡하는 역사의 눈으로 보자는 그의 생각과 맞아 떨어진다.

제주대 평화연구소가 마련한 4·3과 관련한 첫 연구자 모임. 어쩌면 여기서의 연구자 모임을 통해 4·3을 제대로 연구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속속 나오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이번 모임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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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공자 2018-10-13 03:49:36
좋은 의견입니다...
꼴통 교수들이 많은데 정히 역사적 시각에서 치우침 없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