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에 다 주면 말이 없을텐데,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명나라에 다 주면 말이 없을텐데,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6.0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탐라순력도 다시보기] <16> 진헌마로 고통 받은 조선

말 이야기를 이어간다. 전에 이성계와 말 이야기를 꺼냈다. 무예가 뛰어난 태조 이성계는 말 위에서 펼치는 활솜씨가 남달라서 따를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어쨌거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나서는 명나라에 바치는 진상품 가운데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중국에 바치는 말을 진헌마(進獻馬)라고 부르는데, 어지간히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지난 기획 때 볼품이 없는 말을 진헌마로 보내는 바람에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 황제인 주원장으로부터 혼쭐이 난 이야기도 담았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게 있다. 진헌마를 많이 올려 보낼 때는 연간 1만마리에 달하는데, 그러려면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과연 돈은 받고 보낼까. 답을 우선 말하자면 ‘말 값은 받는다’이다.

“의정부에서 진헌마의 말값으로 남은 것을 국가의 비용으로 쓰도록 청했다. 이보다 앞서 진헌마 1만 마리의 말값을 모두 중국에서 비단과 면포로 보내와 말 주인들에게 모두 나누어줬다. 나머지 비단이 1만6000필이었다.”(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1월 20일 기사)

이 기사를 보면 중국에 보낸 진헌마는 공짜로 주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기사는 조선에서는 말을 보내면 이걸 받은 중국은 비단 등으로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기엔 조공이지만 비단이나 면포를 받으니 일종의 물물교환인 셈이다. 다만 말 한 마리에 대한 값이 제대로 됐는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조선에 필요한 말을 죄다 빼가니 문제였다.

앞서 기사를 보면 남은 비단이 1만6000필이라고 돼 있다. 남은 건 누가 먹었을까. 먹은 건 아니고 1만2000필은 의복을 관리하고 면포 등을 유통시키는 관청인 제용감(濟用監)에 주고, 나머지 2000필은 무역에 사용하도록 했다.

진헌마는 일종의 경제활동의 일환이었으나 말이 쉽게 길러질 리가 없다. 진헌마의 수량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줄기는 하지만 조선초에는 진헌마는 그야말로 문제투성이였다. 특히 말은 살아있는 단순한 동물이라기보다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에 명나라로 말을 보내는 일은 군수물품을 헌납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내에서는 이에 대한 비난이 줄기차게 제기되곤 했다.

태조 때는 진헌마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각 도에 명령을 내려 명나라에 바칠 종마를 색출하도록 했고, 구하기 어려운 오명마(五明馬)를 바치곤 했다. 오명마는 털빛은 검지만 이마와 네 발굽 위쪽 등 5곳이 하얀 말로 구하기 어려웠다. 진헌마 때문에 골치아픈 조선은 성종 때 와서는 오명마 진상을 면제하는 방안을 논의할 정도였다.

어쨌든 진헌마로 매년 수만마리가 색출되자 조선정부 내부에서 이 문제가 본격 거론된다. 사간원이 급히 해결할 사안으로 태종에게 건의한 기록이 있다. 그때가 태종 9년인 1409년이다.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1월 14일 기록이다. 붉은 선내엔 “말이 한 마리라도 있는 이들은 모두 관에 바치게 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고 표현돼 있다.

“나라에 중한 것은 군사이고, 군사에 중한 것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맡은 사병을 ‘사병(司兵)’이라 하지 않고 ‘사마(司馬)’라 할 정도로, 말이 나라에 쓰임이 중한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땅덩이가 작고 말도 또한 한도가 있는데, 고황제(高皇帝,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 때부터 건문(建文, 명나라 2대왕인 혜제)에 이르기까지 그 바친 말이 몇 만 마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1월 14일 기사)

태조 이성계부터 줄곧 말을 진상함으로써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사간원이 지적하고 있다. 사간원은 이렇게 명나라에 말을 바치다가는 나라에 있는 말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까지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이라는 땅은 말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역사적인 이유까지 덧붙이면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명나라에서 말을 요구하니 장차 말이 없을 것 같아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당나라 태종과 수나라 양제가 모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거란과 홍건적도 우리를 넘보다가 망했는데, 이는 산천이 험하고 장수가 훌륭한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말이 있었던 까닭입니다.”(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1월 14일 같은 기사)

진헌마를 보내는 데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야 했다. 조선은 명나라에 더 품질이 좋은 말을 보내려고 애를 쓰곤 했다. 세종 12년(1430)엔 이듬해부터 각 목장에서 3, 4세의 말을 찾아 미리 길러서 바치도록 할 정도였다. 그러니 불만은 더 쌓여갔다.

“신해년(1431)부터는 명나라에 바치는 말을 각 목장에서 3~4세의 말을 찾아 미리 기르라는 교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3~4세의 말은 병없이 기르기가 어렵고, 거세를 할 경우 상할 수도 있습니다. 4~5세가 되어도 몸집이 크지 않아 바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각 고을에 분배해 기르게 하고, 목장에 있는 어린 말은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다가 때가 되면 가져다 바치게 하기를 청합니다.”(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9월 6일 기사)

조선이 내세운 명분은 사대(事大)였다. 즉 큰 나라를 섬긴다는 명분이었는데, 그 명분으로 고통을 받는 건 일반 백성들이었다. 말을 애써 키워서 명나라에 바치면 남는 건 비단 한 필 뿐인데, 백성들의 고통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저나 시간이 흐르면서 명나라에 바치는 진헌마도 줄게 된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