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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잊어야 하지만 역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픔은 잊어야 하지만 역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 조보영 기자
  • 승인 2016.03.28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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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교육현주소] ② ‘4·3 유족’ 황요범 명예교사가 전하는 상생·평화 메시지
제주시 조천읍 북촌 마을에 위치한 북촌 초등학교. '제주 4.3' 당시 1949년 1월 17일과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북촌리 주민 479명이 이곳 학교 운동장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 마을은 4·3사건 당시 약400여명 이상의 주민대학살이 일어난 4.3최대 피해지 중 하나다.

1949년 1월 17일 북촌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경토벌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을 불태운 후 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몰아넣고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북촌리대학살’은 하루 기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또한 처음으로 4·3 집단 학살을 소재로 다루어 문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던 제주출신 현기영 작가의 작품 ‘순이삼촌’의 배경도 바로 이곳 북촌마을이다.

소설 주인공 ‘순이삼촌’은 4.3 학살 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혼자 살아남아 겨우 목숨을 부지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환청에 시달리다 결국 30년 전 아이를 떠나보낸 옴팡밭에 스스로 목숨을 묻게 된다.

지금도 북촌마을에는 ‘그날’ 영문도 없이 사라진 가족의 넋을 기리며 상처와 눈물로 얼룩진 세월 속에서 상처뿐인 고향 땅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제2, 제3의 순이삼촌들이 생존 중이다.

28일 오전 제주시 조천읍 북촌초등학교에서 열린 4·3평화·인권 교육

제주시 조천읍 북촌 초등학교, 그 역사의 현장을 가다
 

지난 3월 28일 오전, 제주시 조천읍 북촌 초등학교 강당에는 재학생들과 교사, 마을 어르신까지 전세대가 모여 68년 전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는 '4·3평화‧인권교육'이 진행됐다. 이날 명예교사로 나선 황요범 씨(69세)는 4·3 당시 북촌리 주민이었던 ‘경림이 어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주었다.

당시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온 마을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동, 서로 나뉘어, 머지않아 다가올 비극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젖먹이 아이를 엎고 있던 경림이 어머니는 자신이 서 있는 줄이 죽음의 문턱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감시자의 눈을 피해 슬슬 자리를 옮기는 사이, 토벌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바로 총탄이 날아왔다.

“평소 경림이 어머니는 홑적삼만 입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어요. 그런데 총알이 잘못 나갔는지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경림이 어머니는 홑적삼 저고리가 다 풀어진 채로 학교 운동장을 굴렀어요. 그때 등에 엎고 있던 아이는 쓰러진 엄마의 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았다고 해요.”

황요범 명예교사는 학생들과 마을 주민들에게 4.3의 이야기를 전하는 내내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강연을 이어갔다.

황요범 명예교사 역시 북촌대학살 당시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삼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두 잃었다. 4.3 당시 한 살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다만 살아남은 할머니에게서 그날의 아픔과 기억으로 전해 들으며 자라온 4·3 유족이다.

43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그는 6년 전 신천 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을 맞았다. 그리고 역사의 증인으로 다시 학생들 앞에 선 황요범 명예교사는 학생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했다.

“4·3은 정말 아픈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 아픔을 잊으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학생들은 우리 마을에서 있었던 역사를 꼭 기억해주세요. 그러나 잘못을 용서하는 화해의 마음을 갖길 바랍니다”

북촌 초등학교 아이들이 명예교사가 들려주는 '4.3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모습
북촌 초등학교 아이들이 명예교사가 들려주는 '4.3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모습
북촌 마을에 살고 있는 현덕선 할머니(89세)는 4.3당시 21살이었다. 주민대학살이 이루어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을 오늘(28일) 처음으로 밟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역사, 이제는 치유해야 할 역사,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
 

2014년 3월 4일 지정된 '4·3 희생자 추념일'은 국가에서 정한 47종의 기념일 중 유일한 국가 추념일이다. 이에 제주도교육청은 지난해부터 ‘4·3평화‧인권교육주간’을 지정, 4·3 유족회 회원들로 구성된 명예교사제를 적극 운영하는 등 4.3 평화‧인권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날 교육에 참가한 북촌 초등학교 학생들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요. 북촌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하게 죽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른이 되면 싸우지 말고 착하게 살고 싶어요”라며 4.3의 의미를 되새겼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교육에 참여한 현덕선 할머니(89세, 북촌마을)는 4·3당시 21살이었다고 한다. 학살로 오빠와 조카 둘을 떠나보낸 현 할머니는 “7남매를 공부시켰지만 '그날' 이후 이 학교를 둘러본 적이 없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오고 싶지도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오늘 처음으로 학교를 둘러봤는데 눈물이 나서 혼났다. 저쪽에는 나무가 없었는데… 교문 위치도 바뀌었고, 그 사이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래도 죽기 전에 다시 학교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는 말로 지나온 세월의 통한을 달래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고하게 짓밟힌 희생자들, 아픔을 딛고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유족들, 이 땅 위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며 자라는 아이들은 ‘역사의 기억’으로 ‘평화와 상생'의 가치를 길어올리기 위한 위대한 발걸음을 함께 내딛고 있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는 4.3주민참사의 현장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있다.

<조보영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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