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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섬이어서 제주목사가 관찰사 역할을 대신”
“제주도는 섬이어서 제주목사가 관찰사 역할을 대신”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7.12 07:48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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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1> 순력을 그린 드문 기록화
<탐라순력도> 표지.

‘제주 역사 30선’을 마무리하고, 또다른 역사 기획을 선보인다. 독자 여러분께 옛 그림을 통해 제주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제주도를 담은 그림은 많다. 그 가운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담긴 이야기를 해보겠다. <탐라순력도>는 보물로 지정돼 있는 그림으로, 41점의 그림이 이 속에 있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본다. [편집자주]

 

<탐라순력도>는 보물 652-6호로 지정돼 있다. 제주에는 몇 점 되지 않는 보물이다. <탐라순력도>는 제주 목사로 내려온 이형상(1653~1733)의 제주에 대한 기록집이다.

이형상은 방대한 분야의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제주목사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남환박물> 등 3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300여권 저술이라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할 것 같다. 잠시 정약용과 비교해보자. 조선조 최고의 실학자로 정약용을 꼽는데 주저할 이는 없다. 정약용이 18년의 유배기간중 펴낸 책이 503권이라고 한다. 이형상이 펴낸 300여권은 비록 정약용엔 미치지 못하지만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형상, 그는 조선 숙종 28년(1702)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탐라순력도>는 그가 제주에 와서 돌아다니며 접한 것들을 남긴 그림이다. 다양한 순력의 장면을 그림첩으로 만들어둔 예를 찾기 쉽지 않기에 ‘보물’이라는 대접을 받고 있다.

‘순력’은 원래 관찰사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제주도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조선은 전국을 8도(八道)로 나눴다. 각 도엔 관찰사가 파견됐다. 그리고 군현을 각 도의 관할에 뒀다. 군현은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행정단위였다. 군현에 파견된 이들을 수령이라고 하는데, 부윤·목사·현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조선의 왕은 8도의 최고 책임자인 관찰사를 다스리고, 관찰사는 또다시 수령을 다스리는 체계였다. 수령은 다시 백성을 다스리는 최일선 역할을 하는 구조였다.

특히 수령은 목사든, 현감이든 수직체계가 아닌 병렬적 관계였다. 군현을 각각 다스리는 수령은 상하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시장과 군수간의 관계가 수직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사정이 달랐다. 전라도에 소속된 제주도는 당연히 전라도관찰사가 제주목사인 수령을 다스려야 하는게 정답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섬이라는 특성상 제주목사는 관찰사의 권한 일부를 위임받게 된다.

제주도엔 3명의 수령이 있었다. 제주목의 목사와 대정현·정의현 등 2곳의 현감이다. 목사는 정3품이며, 현감은 종6품으로서 계급엔 차이가 나지만 수령이라는 특성상 수직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제주도가 섬이 아니었다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이들 3곳의 수령 관계는 수평관계가 맞지만 섬이었기에 예외가 생겼다. 바로 제주목사는 관찰사의 권한을 위임받아 대정현과 정의현감을 적절히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됐다.

때문에 제주목사는 군사 직책도 겸했다. 제주목사로 내려온 이형상도 병마수군절제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순력’은 관찰사가 하는 일이었으나, 제주목사는 그 역할도 대신하게 된다. 순력은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순력을 통해 방어실태를 점검하고, 백성들이 지내는 걸 살피게 된다.

<탐라순력도>에 담긴 41점의 그림 가운데 순력 자체를 담은 건 28점이며, 평상시의 모습을 담은 그림 11점, 활쏘기와 관광 등 다양한 그림들이 있다.

<탐라순력도> 서문. 화공 김남길이 그림을 그렸다고 돼 있다.

그렇다고 <탐라순력도>가 온전한 이형상의 작품은 아니다. <탐라순력도>는 그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글을 쓰고 그린 이는 따로 있다.

조선시대는 중요한 군사기지에 그림을 담당하는 이가 있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화사군관(畵師軍官)’이라고 한다. 화사(畵師)는 화원(畵員)이라고도 부르는데, 제주목에 화사군관이 배치됐다는 기록은 없지만 <탐라순력도>를 바라보면 그림으로 기록을 남긴 이들은 분명히 존재했던 모양이다. 이형상이 쓴 <탐라순력도> 서문엔 그림을 그린 이를 김남길이라고 했다. 김남길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화사군관’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얘기도 있다. 글씨도 이형상 목사의 것이 아니다. 이형상이 남긴 <병와집>엔 오씨 노인으로 기록돼 있다.

<탐라순력도> 그림과 글씨는 이형상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도로 기록을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형상은 1702년 가을이던 10월 29일(음력)부터 11월 19일까지 순력을 진행했다. <탐라순력도>는 순력이 진행되기 이전의 그림도 있다. 순력과 더불어 자신이 돌아다닌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남겨뒀다. 기록이라는 건 그래서 가치가 있다. 다음엔 더 재미있는 <탐라순력도>의 이야기를 파고들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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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 2015-07-13 15:02:08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상예동 2015-07-13 14:42:38
김남길(金南吉)은 제주 출신인 화공(畵工)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남길의 후손들이 서귀포시 서홍동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5년 전에 서홍동에서 김남길과 관련된 족보(族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서홍동에 가서 김남길과 관련된 집안을 찾으면 김남길에 관한 생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형훈 2015-07-12 14:59:44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송마칸 2015-07-12 09:26:00
다음글이 기대됩니다.
취재에 어려움이 있으시겠지만 작은거 하나라도 더 기사로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흥미진진할꺼 같네요.

송마칸 2015-07-12 09:25:34
다음글이 기대됩니다.
취재에 어려움이 있으시겠지만 작은거 하나라도 더 기사로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흥미진진할꺼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