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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제16회 청소년4·3문예공모 산문부문 고등부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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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어제주
  • 승인 2015.05.1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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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눈물 - 제주사대부고 2학년 고한솔

[전문] 제16회 청소년4·3문예공모 산문부문 고등부 대상

 

동백의 눈물

제주사대부고 2학년 고한솔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 갓 제주로 내려온 현도로서는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주먹을 쥐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집도, 땅도 빼앗기고 결국은 목숨도 빼앗겨 버린 어머니가 떠올랐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연설 소리에 잡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서북청년단의 일원으로서 사회주의자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각 소대장들은 신입 대원들과 임무에 응한다!”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약속한 듯이 각자 무리를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현도는 두리번거리다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뱀처럼 징그러운 인상을 가진 그는 현도에게 다가와 팔을 툭 치며 싱긋 웃었다.

“자넨 나와 함께 가지.”

그 남자의 이름은 태혈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를 ‘그놈’이라 부르며 증오심을 표출했다.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지? 사실 별거 아니야. 특히 그놈들은 말이지, 죽어 마땅한 놈들이거든.”

현도는 그의 말을 무시하는 듯 보였지만 내심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태혈은 킬킬거리며 멀리 보이는 마을을 가리켰다. 바닷가와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우린 저기로 갈 거야. 이곳 남자들은 죄다 그놈들이니까 모두 죽여. 빌어먹을 그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마을에 들어서자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나며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현도는 어느 새 땀에 젖은 손을 바지에 비벼댔다.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하고 주춤대고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현도는 홀린 듯 달려가 손에 쥐고 있는 죽창을 그에게 내리꽂았다. 공포에 어린 눈빛과 함께 죽창에 흘러내리는, 끈적하고 아직 온기가 남은 피가 손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흠칫하며 현도가 손을 떼자 신음소리를 내며 그 남자가 쓰러졌다. 첫 살인이었다. 그는 공포와 함께 희열을 느꼈다. 어머니의 원수를 갚았다는 생각이 어느 새 자신의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다시 창을 뽑아든 그는 고개를 돌리다 태혈과 눈이 마주쳤다. 태혈은 다 안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도는 그제야 몸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밤이 되자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현도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뜬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다.

“잠이 안 오나 보지?”

재현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소대장 중 하나인 그는 태혈과 함께 다녔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재현은 항상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들이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나?”

현도는 얼굴을 설핏 구겼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이었다. 재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따라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넓은 공터가 나왔다. 현도의 얼굴을 더욱 구겨져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다. 재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죽인 사람들일세. 남자, 여자, 어린아이, 노인까지... 전부 우리가 죽였네.”

현도는 불빛을 들고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저히 ‘그놈들’ 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5살짜리 어린아이 위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또래처럼 보이는 여자를 보자 자신이 희열을 느꼈던 것이 가증스러웠다. 저의 어머니를 짓밟았던 자들과 지금의 자신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문득 치솟는 역겨움에 입을 틀어막았다. 공포에 어린 눈빛이 다시금 생각났다.

“우엑, 우에엑...!”

그는 눈물을 흘리며 구역질을 해댔다. 자신이 상상해온 것과 달랐다. 그가 몸담은 조직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후회와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물이 쏟아져 나와 땅을 적셨다.

“자네가 느낀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말게. 자네가 죽기를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니.”

재현이 먼저 자리를 떴고, 이윽고 눈물을 멈춘 현도도 자취를 감췄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나간 아침은 아이러니하게도 화창했다. 또다시 학살의 시작이었다.

“오늘은 산으로 갈 거야. 동굴을 보면 그 자리에서 연기를 피워. 그놈들은 항상 동굴에 숨어 있거든. 연기를 피우면 뛰쳐나오던가, 그냥 거기서 죽겠지.”

태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현도를 쳐다보았다. 그는 소름이 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현도는 대원들이 아무도 없는 곳을 선택했다. 허둥지둥 올라갔을 사람들의 흔적들을 하늘이 덮어주었는지, 깨끗한 눈이 그를 맞이했다. 무릎까지 오는 눈을 헤치며 얼마쯤 갔을까,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 보였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천천히, 깊숙이 걸어 들어가자 한 여자가 입을 틀어막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현도는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여자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공포에 찬 눈동자와 마주하자 현도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여자의 눈에서 의아함과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현도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고, 미안했다. 서러움과 억울함이 쌓였던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몸을 들썩이자 그는 탄식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여자의 울음소리가 차츰 줄어들자 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나오십시오. 아직은 위험할 겁니다.”

그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나오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태혈이 한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너도 ‘그놈’ 이지. 더러운 것.”

탕 하며 총 소리가 울렸다. 현도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 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태혈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무릎이 푹 꺾이고 새하얀 눈밭 위로 붉은빛이 번졌다. 때마침 세찬 바람이 지나갔다. 우수수 하고 동백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도의 눈앞에 동백이 툭, 툭 떨어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본 것은 꽃이 아니었다. 눈물이었고, 죽임당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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