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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제16회 청소년4·3문예공모 산문부문 중등부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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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어제주
  • 승인 2015.05.19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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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돌담 - 서귀포중 3학년 김도훈

[전문] 제16회 청소년4·3문예공모 산문부문 중등부 대상

 

허물어진 돌담

서귀포중학교 3학년 김도훈

 

봄보다 겨울에 가까운 3월과는 달리 팝콘 같은 벚꽃과 눈에 보이는 곳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꽃을 보면 4월이야 말로 진짜 봄임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포근하고 정겨운 4월에 숨겨진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부모님을 따라 고사리를 꺾으러 다니다 우연히 허물어진 돌담을 보게 되면서였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곳에서 우연찮게 보게 된 허물어지고 칡덩굴로 뒤덮인 돌담, 마치 공포영화에 나올만한 광경에 무섭기도 하고 호기심도 일었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억 저편에 있었던 허물어진 돌담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어느 해 벌초 날이었다. 무더운 여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온통 땀에 젖은 채로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억새풀을 헤치면서 걷는 것도 싫지만 한 곳도 아니고 여러 묘 자리를 찾아 오랜 시간 걷고 다시 풀을 베고 제를 지내고 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느끼곤 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지루해하는 날 위해서인지 걷는 동안 여러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공부가 힘들지는 않니?” “잘 먹고 잘 자야 키가 큰다.” 등 이런 사소한 이야기에서부터 할아버지가 참전했던 월남전에 관한 이야기 등 매 번 비슷한 이야기여서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에도 마을의 흔적이 있었는데 이젠 흔적도 찾기가 어렵구나… 돌담만 약간 남았네.” 라는 말씀에 평소에 안하던 질문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는 용천수를 따라 해안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배웠는데 물이 없어서 옮긴 거 아니에요?” 라는 내 질문에 아버지는 너는 책 좀 읽고 공부 좀 하라는 꾸지람과 “그런 건 나중에 알아도 돼” 라는 말씀을 하셨다. 항상 내 편인 할아버지께서는 그렇잖아도 아버지와 견해가 조금은 다르셔서 아버지와 가끔 언쟁을 하시곤 하시는데 알 것은 알아야지라면서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제주에는 중산간 마을이 많았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4.3때 경찰과 토벌대들의 초토화 작전으로 대부분의 마을이 사라졌단다.”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요?” 라는 질문에는 “많이 죽었지……” 이 말씀 뿐이셨다.

“할아버지는 당시에 너무 어려서…… 큰할아버지가 잘 알고 계시지, 살기 위해서 군에 들어갔으니까.” 마을이 사라졌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살기위해 군대를 갔다 이런 말들이 너무나도 낯설기만 했다.

벌초가 끝날 무렵 친척들이 한 곳에 모였고 가장 큰 어르신인 큰할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신선 같은 외모의 큰할아버지, 80세를 오래전에 넘기셨지만 그런 모진 세월을 살아오셨던 분 같지는 않았다. 4·3에 대해 여쭈어 볼까말까 망설임 중에 일본에 살고 계신 큰 고모할머니 이야기가 나오면서 우리가족의 4·3이야기가 나왔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큰고모할머니가 오지는 못하지만 매 해 돈을 보낸다고 하면서 계속 적립 하고 있으니 나중에 쓸 곳을 생각해 보자고 ……. 그런데 나를 당황하게 하는 말이 또 나왔다. 밀항, 한날한시 제사, 연좌제 그리고 너무 많이 배워서 그렇게 되었다 등의 말이었다.

서귀포로 넘어 오는 차안에서 아버지에게 무슨 이야기에요? 라면서 이것저것 묻는 나의 말에 다 도착할 무렵에야 “아빠도 4·3에 대해서는 어렴풋이만 알고 있고 겪어보지 않았기에 너처럼 어른들에게서 흘려들은 이야기나 가끔 신문기사로 밖에 알 수가 없지만 내 생각에는 2차 대전 후의 프랑스에서처럼 과거를 청산 못한 것이 4·3의 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라는 말씀을 하셨다.

내 방 의자에 앉자마자 4·3을 키워드로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짧지 않은 시간 후에 내게 찾아 온 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굳이 단어로 표현한다면 깊은 슬픔과 실망감 그리고 죄스러움 이었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순사들이 해방 후에도 제복만 갈아입고 경찰을 하도록 놔둔 이승만 정부에 대한 실망, 그토록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재판 없이 학살을 당하고 내 또래의 아이들도 그 광기어린 학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아리게 했고 지금껏 그러한 일을 몰랐던 나의 무지에 대한 실망, 무엇보다도 정부에 의한 조사가 끝나고 공식적인 결과가 나왔음에도 4·3은 빨갱이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였다.

아침 등굣길에 본 4·3추모 현수막 앞에 붙어있는 화해와 상생이라는 문구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답답하기도 하고 내 스스로 4·3에 대해 정리가 안돼서 아버지께 드린 “4·3 뒤에 사건, 폭동, 항쟁 뭐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을 통해 비극이 가장 맞을 것 같다는 답을 얻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한민국 건국기에 생긴 비극, 이 말이 맞을 것 같다. 각자의 다른 이념과 신념으로 인해 생긴 충돌이지만 중요한건 그 속에서 희생되어진 수많은 평범한 제주도민들이 아닐까?

우리는 아픔을 너무 쉽게 잘 잊어버린다. 아니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나쁜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잊어야 할 일이 있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는 않는다.’ 유대민족의 유명한 격언이다. 4·3을 겪은 제주도의 어른들도 얼마 있지 않아 점차 주위에서 보이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우리나라의 아픈 과거라고 숨기고 싶은 역사라고 해서 잘 알려주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을 떠올리게 하는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토벌대의 잔혹한 만행은 지금도 왜 4·3의 희생자들을 폭도로 몰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끔 해주었다. 지금껏 일본정부가 자신들의 만행을 줄곧 부인하듯이 말이다.

서귀포에서 나고 자랐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았을 정방폭포와 소낭머리 무더운 여름에 따가운 태양을 피하고 멱 감기 좋은 곳으로만 알고 있던 그 곳이 많은 사람들이 한스럽게 쓰러져간 학살터라는 걸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중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세워진 서복박물관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 잠시 가두어 두었던 수용소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소낭머리에서 서복박물관을 거쳐 정방폭포에 이르는 길에는 4·3의 슬픈 진실을 알려주는 아무런 것도 없다. 낯선 중국식 건물과 조각들이 길 옆에 있을 뿐이다. 알려고 노력해야만 알 수 있도록 돼버린 4·3의 진실, 한라산 허리 턱에 있던 허물어진 돌담처럼 많은 이들이 애써 잊으려하고 과거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진 게 4·3을 폭동으로 폄훼하는 이들과의 지루한 공방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화해와 상생은 결코 부인 할 수 없는 사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된 사실 아래에서만이 가능하다고 배워왔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동안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의해 세상에 알려지고 그 진실이 밝혀져 국가추념일이 되었지만 갈 길은 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걸음씩 가다보면 될 듯싶다. 그 진실을 증언해줄 수 있는 흔적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제부터라도 보전하는게 그 길 중에서 중요한 발자국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제주도만이 가지고 있었던 4월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서 이젠 4월이 마냥 따스하고 포근한 봄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제주도의 이름 모를 산과 들, 동굴 그리고 해안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죄 없는 영령들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철부지 어린 중학생이지만 정말로 진실의 힘을 믿고 싶다. 왜곡되지 않은 4·3의 진실을 어느 누구나 어디에서나 알 수 있게끔 된다면 그 것이 비록 아픈 역사이지만 화해와 상생의 첫걸음이자 억울한 영령들을 달래고 4월의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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