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17:02 (일)
“4.3 당시 초토화작전의 끝자락, 이덕구는 해산 명령을 내렸다”
“4.3 당시 초토화작전의 끝자락, 이덕구는 해산 명령을 내렸다”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5.04.13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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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민 4.3평화재단 이사, 당시 대원의 증언 토대로 ‘해산명령’ 처음 공개
지난 13일 제주포럼C 제50회 제주탐방 일정 중 찾은 이덕구 산전의 모습.

제주4.3사건 당시 무장대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이덕구가 사살되기 3개월 전, 대원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의 4.3진상조사 결과 보고서가 작성되기까지 실무 역할을 도맡았던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전 제민일보 기자)는 “이덕구 대장으로부터 해산 명령을 받았던 무장대 대원으로부터 직접 증언을 들었다”면서 이같은 내용을 처음 공개했다.

지난 13일 제주포럼C(대표 고희범)가 제50회 제주 탐방으로 ‘해방 공간에서 4.3까지’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덕구의 산전을 찾은 자리에서 어렵게 말문을 연 김종민 이사의 얘기는 이덕구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새롭게 조명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1949년 1월 12일 의귀리 전투에서 습격 계획이 미리 누설돼 대부분이 무장대원들이 궤멸돼 치명타를 입게 된 이덕구가 대원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무장대에 남아있으면 헛된 죽음을 맞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2~3명씩 뿔뿔이 흩어져 마을로 내려가 후일을 도모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1948년 11월부터 초토화작전이 이어지던 시기였지만, 무장대를 회유하기 위한 선무공작이 병행되던 시점이었기에 나름대로 무장대의 희생을 줄여보겠다는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원들은 이덕구의 이같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대원들은 서로 마주보고 서서 일본도를 휘둘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절벽 아래로 몸은 던지는 등 죽음을 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제주4.3평화재단 김종민 이사가 관덕정 앞에서 4.3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 이사는 이덕구에 대해 “조천중 교사였던 그는 무장대에 입산한 뒤 당시 16세였던 제자가 무장대를 찾아온 것을 보고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꾸짖으면서 돌려보내려 하기도 했다”면서 “여러 제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수업 시간에도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이덕구는 역사적으로 이재수의 난을 비롯해 제주 지역에서 핍박을 견디지 못해 들고 일어섰던 ‘장두’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탐관오리의 폭정에 견디다 못해 민란이 벌어졌을 때도 조정에서 내려온 관리가 조사를 한 뒤 해당 관리를 파직하면서 민란의 주동세력에 대한 처벌이 함께 이뤄졌는데, 이를 감수하면서 들고 일어섰던 이들이 바로 ‘장두’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관련 증언 자료와 이에 대한 고증을 거쳐 이덕구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내려지게 된다면, 4.3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각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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