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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
[기고] 우리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
  • 미디어제주
  • 승인 2015.03.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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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근 신례초등학교장
안재근 신례초 교장.

우리의 아이들도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하나의 숭고한 인격체입니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미성숙한 인격체입니다. 그래서 미성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성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민·형사상 책임을 자신이 지지만, 미성년에게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서두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 아이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여 가르칠 것인가?’ 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2년 6개월 전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행복한 자립인’의 육성을 늘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행복한 자립인’을 아주 간단하게 ‘내 맘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단 그 행위가 나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어선 안 된다는 조건을 달고 말입니다.

저는 육남매의 아버지로서 자식들을 기르면서 내 자녀들이 어떤 일이든 스스로 해주기를 기다리는 일을 반복해왔습니다. 즉, 뭐를 하라는 식의 지시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당연히 공부하라는 말을 해본적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고3인 아들이 내일 시험이 코앞인데 거실에 드러누워 소설책을 읽어도 ‘시험공부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해주기만을 꾹 참고 기다렸습니다. 비유가 맞을지 모르지만 요즘 모 방송국에서 육아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인기가 대단합니다. 삼둥이 이야기입니다. 10초 기다림의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보다 삼둥이가 개인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기다림의 효과는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래에 비해서 숟가락과 젓가락질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삼둥이어서 밥을 먹을 때 신경을 다 쓸 수 없어서 내버려둔 것이 이런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아이들이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스스로 먹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식물을 흘리고, 빨리 먹지도 않고, 먹을 때까지 기다리려니 시간이 없고 이런 연유에서 먹여주다 보니 부모 자신도 모르게 아이가 스스로 식사를 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할 때까지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저는 육남매를 키우면서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45세 나으셨으니 나이 차가 대단합니다. 한번은 초등학교 2학년인 딸에게 제 집사람이 ‘한 달은 며칠이냐?’ ‘일주일은 며칠이냐?’면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가만히 놔두면 크면서 다 알 것을 왜 못 견디게 가르치느냐?’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놔두면 다 알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연 성장이나 성숙에 의한 지식의 습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 교육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교육학자 비고츠키는 아이들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능력과 주변의 도움을 받아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구분하여, 아이들이 새로운 인지발달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근접발달영역 안에서 정교한 교수활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교육이란 아이들이 알고 있는 영역과 알아야 할 영역의 차이, 즉 근접발달영역을 메워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조력자가 교사인 것입니다. 훌륭한 교사는 우리 아이들이 알고 있는 수준을 파악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롭게 지식을 습득토록 도와주는 역할을 잘하는 자입니다. 특히 개인차를 인정하고 이를 고려하여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림에도 개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 기다리는 시기를 달리해야 할 것입니다.

서두에 우리 아이들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제한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몸에 좋은 약은 대부분 쓴 편입니다. 교육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자연적으로 성장하면서 습득이 되는 경우가 많아 큰 어려움이 없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으려면 괴로움이 수반될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참고 극복하게 하려면 교사의 힘으로도 모자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플루트 연주능력을 기르는데 신체적·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 때 부모님이 던져주시는 말 한마디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에 중요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아이가 싫다고 해서 ‘얘야 네가 싫은 것은 하지마라.’ 하는 것은 좀 생각해보셔할 부모님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플루트 연주 교육의 예만 들었지만 모든 교육에 있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법적으로 아이들을 보호하는 이유도 아이들이 미성숙해서 그들의 자유의지를 제한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성년자가 누구랑 결혼하고 싶다고 해서 결혼시킬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사랑스런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에서 제한해야 할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엔 우리 아이를 잘 알고 있는 선생님과 상담을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즉 소통해야 할 것입니다.

소통은 차이가 있을 때 필요합니다. 너와나의 생각이 다를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소통이 이뤄지면 너와 나의 차이가 좁아집니다. 가끔 주변에서 10년 이상 된 부부들에게 ‘서로 대화를 많이 하십니까?’ 물어보면 별로 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서로 잘 알아서 말이 필요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굳이 할 말이 없는데도 말을 하고 싶다면 그것은 사랑이 충만하다고 볼 수 있겠죠. 여담이었습니다.

성공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가급적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이 아니라 언쟁만 있고 대화를 해도 서로의 불신만 가중될 뿐입니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비우고 담임선생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여야 할까요? 요즘 제가 알기로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철학자 한분의 생각을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공자와 장자의 예를 듭니다. 공자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남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귤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은 귤을 아주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장자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마라.’ 라고 했다면서 장자야말로 진정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조삼모사의 잘못된 이해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장자가 조삼모사 이야기에서 전하고 싶은 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인데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육사가 원숭이들의 소원인 아침에 도토리 4개 저녁에 3개 주라는 것을 들어주고 이를 수용했으므로 사육사야말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는 장자의 가르침을 현대인들은 사육사가 잔꾀를 부려 원숭이를 농락하고 있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이 철학자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이처럼 소통의 중심에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애기업개 말도 들으라.’는 제주 속담처럼 말입니다.

두서없이 제 생각을 나열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자유의지의 수용 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며, 또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아이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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