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17:02 (일)
“육지인들이 만든 토기를 제주에 가져올 정도로 교류 빈번”
“육지인들이 만든 토기를 제주에 가져올 정도로 교류 빈번”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3.02.17 14:4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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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 30選] <18> 청동기시대 공렬토기(구멍무늬토기)

공렬무늬토기
영국의 고고학자인 고든 차일드는 신석기 혁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신석시시대를 두고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문명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농경과 목축의 탄생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고든 차일드가 강조한 혁명엔 신석기시대이후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개체로 두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런데 고든 차일드는 청동기시대엔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다. 그는 청동기가 인류의 삶을 바꾼 농경이나 목축에 비해서는 의미가 덜 했다고 본 듯하다. 아니,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가르는 요소로서의 청동기보다는 한 지역에 정착하면서 삶의 전체적인 흐름을 바꾼 농경에 보다 많은 점수를 매겼다.

신석기와 청동기를 가르는 대표적인 요소는 재료의 차이에 있다. 석기와 청동기는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렇다고 청동기시대에 석기가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청동기시대는 신석기 때보다 더 정교한 석기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고고학적 발굴이 이뤄진 지역에서 시대를 서로 달리하는 유물이 발견될 경우 어느 쪽의 유형을 따라야 할까? 토기와 석기가 나란히 등장할 때 구분을 짓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던지기에 앞서 청동기시대의 기본적인 특징을 알아야 한다. 청동기시대는 도구의 재료인 청동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를 대체하는 새로운 토기와 석기를 썼던 시대였다.

그러면 앞서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은 어떻게 해야 할까. 타제석기가 나왔을 경우엔 신석기시대로 보면 되겠지만 마제석기와 토기가 나란히 나오면 이 시대는 청동기일까, 신석기일까. 학자들은 이런 경우 대개 토기의 특징을 우선순위로 따진다. 토기를 우선순위로 하는 이유는 토기 자체가 인간의 생활양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지역별로도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 주거지나 석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학자들은 머리가 아팠을 게다.

신석기를 대표하는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나 덧무늬토기였다. 청동기시대는 흔히 무늬없는토기문화라고 한다. 무늬없는토기 가운데 분포범위가 가장 넓은 게 바로 공렬토기(구멍무늬토기)이다. 공렬토기는 함경도 지방에서 처음 나타나 남한지역으로 전파된다. 고고학자 조유전은 공렬토기 기원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함경북도 무산군 호곡동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와 공렬토기가 함께 출토됐다. 이는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는 유적으로, 공렬토기의 기원은 함경북도에 있다고 상정했다.

공렬무늬는 토기 입구 바로 아래 구멍을 연속적으로 낸 토기이다.
공렬토기는 토기 입구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구멍무늬를 장식한 토기이다. 청동기시대 전기에 주로 나타나며, 세형동검시기 이전의 대표적인 토기문화가 된다. 그릇 입구 바로 아래에 구멍을 낸 것은 그룻 내부에 든 물질의 상한선을 표시하거나 장식용이라는 견해가 많다.

공렬토기가 발굴된 건 1950년대 북한에서부터이다. 호곡동유적은 1959년부터 발굴이 이뤄지며, 남한에서는 1962년 경기도 파주의 옥석리유적에서 공렬토기 조각이 확인된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렬토기가 발굴된다.

그러나 공렬토기 발견 당시 공렬토기라는 이름을 얻은 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한병삼씨가 처음으로 공렬토기라는 이름을 세상에 던졌다. 그는 토기와 청동기(1974)라는 책에서 공렬토기라는 것은 아가리 바로 밑에 한 줄로 드문드문 구멍을 뚫었거나 반쯤 구멍을 뚫은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명칭을 학계에서는 아직 사용하고 있지 않으나 적당한 명칭이 없으므로 필자가 편의상 붙여 놓은 것이다고 쓰고 있다.

공렬토기는 북한지방을 거쳐 강원도, 남해안을 거쳐 전국적으로 펴져나갔다고 보고 있다. 제주도도 그 가운데 끼어 있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퍼진 공렬토기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유물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청동기시대 전체에 걸쳐 공렬토기가 확인된다.

그렇다면 공렬토기를 쓴 이들은 누구일까. 특정한 집단이었을까. 아니면 같은 종족이었을까. 당시엔 나라라는 단위의 틀을 이룰 때가 아니었다. 한 종족이 이곳저곳을 이주하면서 문화를 전파하지 않았을까라는 가정을 할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서로간의 문화교류가 적절해 보인다.

청동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공렬무늬토기. 제주도에 살던 이들이 다른 지역과의 빈번한 교류를 증명하는 토기이기도 하다. 제주에서는 청동기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된다.
제주도의 문화 교류는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난다. 신석기시대 덧무늬토기가 제주도와 육지부의 교류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고 앞선 글에서 소개를 한 적이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 그런 교류는 더욱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 청동기시대 전기 유물이 많은 서귀포시의 상모리 유적인 경우 육지부의 흙으로 만들어진 토기가 상당수임이 확인된다. 육지부의 흙으로 만들어진 토기가 나왔다는 건 완제품을 들고 제주도에 들어왔다는 표시나 다름없다. 잦은 교류가 이뤄졌음을 설명하는 척도이다. 하지만 육지부 태토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를 조금 웃돈다. 나머지는 제주도 땅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문화에 고립이라는 단어는 어색하다. 개개의 문화는 상호교류에 의해 발전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시 제주인들은 어떤 이들과 교류를 이어갔을까. 섬인 제주도에 사는 이들은 바다를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지리상 가장 가까운 전남 지역일까, 아니면 해류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배를 댈 수 있는 곳이었을까.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전남보다는 경남 남해안과의 교류 가능성이 높다. 공렬토기가 발굴되는 지역을 놓고 봤을 때는 그렇다. 공렬토기는 전국적으로 확인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공렬토기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는 유일한 곳이 있다. 바로 전남 지역이다. 기자는 앞선 글을 통해 고산리의 유적에서 나온 덧무늬토기와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유물의 문양이 흡사한 점을 설명했다. 유물만을 놓고 본다면 제주인들은 청동기시대 전기까지는 부산을 비롯한 경남 남해안과의 교류가 더욱 빈번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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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el 2013-04-12 09: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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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2013-02-21 17: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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