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교 복사기에 불이 붙었다고 한다. 정말 불이 난 것은 아닐테고, 사정을 알아봤더니 다음 주에 치러지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일명 일제고사) 때문이란다. 그 놈의 학교 복사기는 이 맘 때만 되면 열이 오를 데로 오른다. 점수를 잘 올리기 위해 ‘모범문제’를 찍어내느라고 그렇게 복사기는 열을 낸다고 한다.
또 다른 풍속도는 학부모들에게 발송되는 문자메시지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를 대비해 학생들을 잘 지도해달라는 학교측의 문자메시지가 학부모들께 발송된다.
왜 쓸 데 없는 복사기가 애를 먹고, 전화기 또한 학교에서 보낸 문자를 받느라 바빠야 할까.
얼마전 전교조가 일제고사 대비 파행 사례 학교실태를 공개했다. 전국적으로 355개 학교를 대상으로 교육 파행사례를 분석했다. 결과는 전체 355개 학교 가운데 40.3%인 143개교에서 ‘교육 파행’을 답했다. 학교급별로 내려갈수록 교육 파행은 컸다. 고등학교는 16.7%에 불과했으나 중학교는 42.2%, 초등학교는 절반을 넘는 51%나 됐다. 제주지역은 표본은 크지 않았으나 7개 학교 가운데 4개 학교에서 ‘교육 파행이 있다’고 답했다.
‘교육 파행’이란 정상적인 수업이 안된다는 뜻이다. 이번 조사에 응답한 도내 학교인 경우 △0교시 또는 7,8교시 일제고사 대비 문제풀이 수업 △교과학습 부진학생 대상 강제 방과후 학교 문제풀이 수업 △토요일 및 휴일 강제 등교 후 문제풀이 수업 △정규교과 수업시간에 일제고사 대비 문제풀이 수업 △일제고사 대비 주월간고사 및 모의고사 실시 △일제고사 대비 사교육 출판사 발행 문제집 일괄 구입 배포 △일제고사 대비 학교 관리자에 의한 교육과정 파행 조장 및 강요 △교육청(지원)청에 의한 교육과정 파행 조장 및 강요 등을 겪었다고 답했다.
이런 실태를 잘 훑어보면 학교현장에서 시험을 앞두고 문제풀이식 교육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수업시간을 포함해 수업 외의 시간도 문제풀이를 하며 점수 올리기에 혈안이 돼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시험을 보는 이유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국가수준 평가를 대비하는 학교 현장의 분위기는 시험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돼 있다. 무조건 시험을 잘 봐야 한다. 그래야 교사도 좋은 평가를 받고, 아울러 학교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교육지원청도, 더 나아가서는 교육청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고교생이 있다. 그 친구랑 이메일을 주고받은 내용이 있다. 그 친구는 기자에게 보낸 메일을 통해 일제고사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했다.
“고등학생들은 거의 다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기본 9시까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러나 이 날(일제고사를 치르는 날)은 일찍 끝나니까 이 날을 기다리더라고요.… 모르는 것은 그냥 고민 안하고 그냥 찍어요.”
이 고교 친구는 중학생의 상황도 전했다. 중학교 학생들은 거의 다 찍고, 자는 아이들이 꽤 많다고 전했다.
도내 교육계에서도 ‘제학력갖추기 평가’가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을 부르는 이유는 제학력갖추기 평가가 국가수준으로 치러지는 일제고사와 닮지 않았냐는 우려 때문이다.
사실 시험은 자신의 수준을 평가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간 비교를 시키기에 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복사기에 매달려야 한다. 그리고 학부모들께 문자를 보내면서 학생들의 지도를 당부한다. 제학력갖추기 평가도 일제고사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를 해야 한다. 제주 도내 모든 초·중학교에서 치러지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제주도교육청은 제1차 추경에 올린 제학력갖추기 평가 예산 일부 삭감에 강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기자가 보기엔 4학년을 제외시킨 건 ‘윈윈’ 해법으로 보이지만 교육청의 입장은 다른 모양이다. 교육청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면 일제고사 조사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교육 파행’을 없애는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그래야 학교 복사기도 예전처럼 평온을 되찾고, 시험도 원래 의도인 학생들의 자기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그건 바로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다. 시험을 앞두고 매일 문제풀이에 매달려야 하는 불쌍한 아이들로 만들지는 말자.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