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17:02 (일)
두 손을 잡아주세요
두 손을 잡아주세요
  • 미디어제주
  • 승인 2012.04.23 16: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서귀포시 동홍동주민센터 홍기확

서귀포시 동홍동주민센터 홍기확
공무원 공부할 때의 일이다.

아침 9시에 독서실 문을 열어서 갔다가 저녁 12시쯤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저녁에 돌아올 때 십중팔구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폐지를 줍는 장애인 엄마와 아들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폐지나 재활용품을 저녁에 내놓으니 밤잠을 설쳐가며 폐지를 줍는 모양이었다. 새벽에 줍는다면 새벽잠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이겨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한 번, 두 번 마주칠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자세히 살펴보게 됐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저녁 12시에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눈이 많이 쌓여 종종걸음으로 천천히 걷는데 폐지 줍는 모자가 멀리서 보였다. 왠지 가로등을 통과하는 눈발들이 낭만도 있어 잠시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엄마는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키가 정말 조그만 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10살 남짓한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들은 걷는 게 조금 어색했고 눈동자가 맑지 않았다. 장애인 모자였던 것이다.

엄마는 아들을 잡은 한 손을 놓지 않았다. 나머지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다가 멈춰선 집 앞의 폐지들을 캐리어를 놓고서는 주웠다. 그리고는 다시 캐리어를 잡고서는 절뚝절뚝 걸어갔다.

그 때! 아들이 눈길에 갑자기 넘어졌다. 나는 순간 그 쪽으로 튀어 나갈 뻔 했다. 도와주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게 본능인가 싶었다. 엄마는 아들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엄마는 참 대단했다. 캐리어를 고정시켜 놓고선 아들을 일으키곤 먼지를 털듯이 아들의 옷에 묻은 눈을 투박하게 털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들의 손을 잡았다. 또다시 터벅터벅 걸어가선 다른 집 앞의 재활용품을 뒤적거렸다.

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엄마의 손만 잡고 있었다. 도와줄 힘이 없거나 엄마가 아들에게 궂은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넘어졌다. 나는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이날 이후로 나는 독서실의 폐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침에 오자마자 한번, 저녁 먹고 한번, 집에 갈 때 한번. 그렇게 모은 폐지를 장애인 모자(母子)가 항상 지나가는 길에 12시가 아닌 11시 30분에 나와 미리 놓아두었다.

지금도 지칠 때마다 나는 이 장애인 모자(母子)를 떠올린다. 이들은 나를 성숙하게 했고, 어찌 보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롤 모델이자 영웅이다.

국민기초생활수급자나 장애인 가구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 업무를 맡고 있는 제주도의 사회복지 공무원들이 생각난다.

요구는 많고, 재원은 한정되어 있고. 요구를 안 들어주면 이쁘게 돌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적잖이 격분해서 그날 하루의 기분을 망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테다.

그럴 때마다 이 장애인 엄마와 아들을 한 번 떠올려 봤으면 좋겠다. 많은 힘든 사람들이 사회복지 공무원들에게 요구만, 때로는 무리한 요구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수도 많다. 하지만 열심히,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제주도의 전체 사회복지 업무 담당자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삶에 지쳐 두 손을 놓으려고 할 때, 그 손을 잡아주길 부탁드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