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8 17:02 (일)
화북천 정비사업 현장 4.3 유해 1구 추가 발견
화북천 정비사업 현장 4.3 유해 1구 추가 발견
  • 진기철 기자
  • 승인 2006.05.11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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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 눈가리고 손 묶어 총살" 증언 ...공식 발굴단 구성 및 현장 보존 방안 절실

제주시 화북천 정비사업 현장에서 4.3 유해 2구가 발굴된데 이어 11일  유해 발굴작업을 재개된 결과 1구의 유해가 추가로 발견됐다.

제주4ㆍ3연구소(소장 이규배)와 제주도4ㆍ3사건희생자유족회(회장 김두연)가 긴급 구성한 '제주 4.3희생자 구제발군단'은 이날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을 재개, 1구의 유해를 추가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해는 현재 3구로, 발굴단은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현재 암매장 지역에서 확인된 3구의 유해 외에도 2구 정도의 유해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 지속적으로 추가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날 발굴된 유해는 두개골이 발견됐으며, 현재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화북 출신으로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학살을 목격한  백자훈 전 제주대 교수는 "당시 군인들은 화북주민들을 집결 시킨 후 빨갱이들의 총살장면을 지켜보라면서 사살한 후 돌아갔다"며 "지금의 발굴 자리는 화북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해 나란히 묻은 곳으로 이들은 모두 도두리 출신이었다"고 증언했다.

백자훈씨는 "당시 제일 앞 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총살 당시 살점이 툭툭 튀기는 것을 느끼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며 "5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지만 현장에 가보니  나머지 한 사람이 살아나 시신을 수습하러온 화북주민들에게 '우리 모두 도두출신'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현재 6곳 정도의 유해 발굴 예정지가 있고 공식적인 발굴단 구성이 돼 있지 않음은 물론 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 역시 화북천 정비 지역인 만큼 유해 발굴지역에 대한 보존방안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발굴단의 한 관계자는 "이번 경우처럼 긴급하게 구제 발굴 형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4.3희생자 유해 발굴을 주도할 추진체 구성이 지연되고 있는게 큰 이유"라며 "화북천과 같은 암배장 추정지에 대한 훼손 뿐 아니라 관련 증언자들의 수마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어 사업 추진에 심각한 위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이번 발굴 역시 발굴된 유해와 유류품을 전문적으로 감식하고 희생자들의 신원을 파악해 유가족을 찾아주는 일련의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고 제주대학교 의과대학에 임시 보관하는 것까지 범위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며 "4.3희생자 유해 발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추진체를 구성하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토로했다.

앞서 지난 4일에는 2구의 유해를 발견했는데 한 구는 두개골이 파손된 채로 발견 됐으며, 다른 한 구는 두개골 파편과 치아, 위팔뼈가 발견됐다.

발굴된 유해와 유류품은 개체 분류, 보존 처리 등의 과정을 거쳐 제주대학교 의과대학에 임시 안치될 예정이다.

한편 이 지역은  4ㆍ3 당시 학살ㆍ암매장 추정지 가운데 한곳으로 이날 발굴 작업에는 우은진씨(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과정, 발굴 담당)와 강현욱 교수(제주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등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다음은 4.3연구소가 정리한 현장증언 내용>

1. 군인들이 쓰리쿼터에 6명을 싣고 와 양치석 씨밭에서 총살. 당시 군인들은 한 사람당 3명씩 담당하여 총 18명과 총살 현장 외곽에 보초로 10여명 정도가 있어서 대략 30명 정도의 군인이 총살 집행 현장에 있었다. 희생자 6명은 현장에 내기기 직전 군인들이 준 담배를 마지막으로 피웠다고 한다.
 - 시기는 대량학살의 초기였다고 함(1948년 11월 초ㆍ중순)

2. 군인들은 화북 주민들을 집결 시킨 후 빨갱이들의 총살 장면을 지켜 보라고 함
- 화북 초등학교 학생, 서부락 주민 30여명

3. 6명의 얼굴을 검은 천으로 씌우고 손을 뒤로 묶은 후 우선 장교가 권총으로 한발씩 쏘고, 40m 거리를 두고 사수 3명이 M-1 소총으로 한 사람당 6발씩 쏘았다. 군인들은 사살한 후 돌아갔다.

4. 나는 제일 앞 줄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총살 당시 살점이 툭툭 튀기는 것을 느끼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5. 확인 사살까지한 총살 현장에서 5명은 즉사했으나 그 중 한 사람은 머리나 심장에 총을 맞지 않고 살아 있어서 시신을 수습하러 온 화북 주민들에게 “우리는 도두 출신이다. 마을 길가에서 잡혀 억울하게 여기까지 왔다. 여기가 화북 같은데 도두리 부모 형제들에게 알려 달라”며 자신의 이름과 다른 5명의 이름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화북 주민의 신고로 현장에 온 화북 지서 순경(도두리 출신 문oo)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복부에서 내장이 터지는 것을 보고는 어짜피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다시 ‘죽여달라’고 해서 화북지서 순경이 총 한 발을 쏘아서 죽게 되었다.

6. 그 후 화북 주민들은 가마니에 시신을 담아 현재 매장지에 나란히 묻음

7. 그래서 백자훈 부친은 무덤 앞에 나무에 이름을 쓰고 꽂아 주었다. 2~3일 후에 유족들이 몇 구를 파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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