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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들은 백록담까지 거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제주사람들은 백록담까지 거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1.09.1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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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 30選] ⑤ 조선조 단일 지도로 제작된 최고의 작품 ‘탐라지도병서’

국립제주박물관에 있는 '탐라지도병서'. 가운데 지도를 그려 넣고, 위아래로 지지(地誌) 성격의 서문을 써 넣었다.

지도는 왜 만들까? 새삼 논의할 필요는 없으나 지도는 통치자가 권력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든 도구의 하나이다. 유럽의 탐험지도도 그같은 맥락에서 발전을 거듭해왔다.

유럽과 우리의 지도는 다르지만 지도가 갖는 의미는 매한가지다. 영역을 좁혀 제주도만 따져보자.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제주도를 가장 잘 나타낸 지도는 어떤 게 있을까. 이형상 제주목사가 1702년(숙종 28년) 제주도 전역을 순시하면서 화공에게 그리도록 한 「탐라순력도」에 포함된 ‘한라장촉’이 순수 제주도를 그린 지도의 효시로 볼 수 있다. 그 뒤에 제작된 지도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게 있다. 조선 숙종 35년(1709년)에 제작된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다.

이들 외에 제주도를 나타낸 지도는 중국이나 한반도의 일부로 그려지곤 했다. 한반도를 그리더라도 제주도는 부속도서로서 그려졌을 뿐 독자적인 형태의 지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탐라지도병서는 다른 지방은 아예 제외된 순전히 제주도만을 나타낸 지도라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국립제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이 지도는 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다. 크기는 세로 125㎝, 가로 98㎝의 대형 지도로 단순히 지도만 그리지 않고, 제주도의 자연 및 인문현상을 기록한 지지(地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 지도는 모두 3개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가운데 지도를 두고 위쪽과 아래쪽은 제주도의 크기에서부터, 왕에게 진상하는 물품과 세금 내용까지 자세하게 담겨 있다. 전복인 경우 생산량의 24% 가량을 세금으로 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서문은 ‘제주는 구한(九韓)의 하나였다’라고 시작해 둘레는 400여리, 동서 140여리, 남북으로 70여리 크기의 섬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주목에서부터 바다까지는 2리, 백록담 정상까지는 41리, 정의현까지는 74리, 대정현까지의 거리는 85리 등 지리정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거리 단위인 리(里)를 현재 ㎞로 환산하더라도 지금과 거리상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지도에서는 당시의 인구상도 확인된다. 가구수는 8955호(제주목 6991호, 정의현 1449호, 대정현 815호), 인구는 4만5129명(제주목 3만3585명, 정의현 7459명, 대정현 4085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유럽의 탐험지도가 메르카도르 도법 등을 활용해 방위 등을 표기했다면, 우리나라 지도는 주변 24방위를 표시하고 있다. 탐라지도병서도 주변에 24방위를 그려넣었다.

특히 이 지도는 대부분의 지도가 남북을 기준으로 한 것과 달리 남쪽이 위에 표기돼 있다. 즉 방위로는 북쪽지방인 제주목이 지도의 아래쪽으로, 남쪽인 대정현 지역이 위쪽에 그려졌다는 점이다. 이는 서울인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탐라지도병서'는 제주도 주변의 바다를 물결 무늬로 표현하고 있다.

1540년 독일의 지리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가 그린 아메리카와 동아시아 지도에도 바다를 파도 무늬로 표현하고 있다.


지도 주변인 바다는 파도 무늬로 표현했다. 이런 표현법은 조선시대 전기의 표현법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도를 그리는 표현양식은 세계 어느 곳이나 비슷한 면을 지닌다.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1540년에 독일의 지리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가 그린 아메리카와 동아시아 지도에도 바다를 파도 무늬로 표현하고 있다.

이 지도의 제작연대는 서문의 끝 부분에 나와 있다. ‘강희기축정월이등개간(康熙己丑正月李等開刊)’이라는 표기다. ‘강희’는 청나라 성조 강희제 때 쓰던 연호로 ‘강희기축’은 조선 숙종 35년(1709년)에 해당된다. 이등(李等)은 당시 제주목사이던 이규성 재임기간중에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이규성은 1706년(숙종 32년) 제주목사로 부임해 1709년 5월까지 제주에 머물렀던 점을 고려하면 제주를 떠나기 4개월전에 이 지도를 완성한 셈이다.

서문의 끝 부분에 제작연대가 나와 있다. 빨간 테두리 부분.
그러나 이 지도는 여느 지도와 달리 지역에 대한 지리 정보만 담지 않았다. 제주목을 확대하거나 하지 않고 주변 지역과 동일한 축적으로 그리는 등 실제 모습을 담으려 애썼다.

더욱이 도내 전역에 분포해 있던 과원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목장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에 눈길이 쏠린다. 10소장을 비롯해 산마장, 모동장, 천미장, 장장, 좌가장, 서산장 등을 세세하게 그려 넣었다. 목장의 경계와 함께 목장을 출입하는 문의 명칭까지 표기돼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과연 탐라지도병서는 왜 만들어졌을까. 탐라지도병서가 목장에 대한 자세한 정보, 지지(地誌)적 측면에서 제주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지도는 단순한 지리정보를 제공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경제적 관점에 무게를 둔 지리지의 성격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또한 조선전도 개념이 아닌 지역별 지리지가 만들어지는 시기와 맞물려 있기에 조선정부가 지방에 대한 체계적 관리수단으로 지역별 지리정보를 활용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오름과 목장 등을 자세하게 표기하고 있다.
봉수대가 있는 오름은 정상 부분이 불쑥 솟아오르도록 표현했다. 원내 왼쪽이 사라봉이며, 오른쪽은 도두봉이다.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보는 지도 테두리 부분에 그려 넣었다. 왼쪽 원내가 일본국 표기다. 오른쪽 사진은 확대한 모습.

제주를 중심으로 한 이 지도는 제주도 섬에 대한 정보나 거리는 과장하지 않고 사실대로 표기하려 애를 썼으나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보는 해당 방위에 표현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국은 이 지도의 왼쪽 상단(방위상으로는 남동쪽에 해당)에, 현재 오키나와인 류큐는 지도의 위쪽 중앙(방위상으로는 남쪽)에, 전남지역은 지도의 아래쪽(방위상으로는 북쪽)에 표기하고 있다.

오름에 대한 정보가 여느 지도에 비해 자세하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오름 정보와 함께 당시엔 가장 중요한 방어유적이던 봉수의 모습도 보인다. 봉수가 있는 오름은 정상 부분이 불쑥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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