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7:54 (수)
제주에서만 만든 전복 생활도구도 결국은 철기에 굴복
제주에서만 만든 전복 생활도구도 결국은 철기에 굴복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2.05.19 10:31
  • 댓글 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 역사 30選] <13> 전복껍질로 만들어낸 전복칼과 화살촉

김녕 궤네기동굴에서 나온 전복 화살촉. 아직까지 다른 곳에서는 발굴되지 않았다.
탐라는 해상을 통해 활발한 교류활동을 해 온 국가였다. 1963년 일본 나라현 헤이죠쿠(平城宮) 터에서 중요한 목간이 발간된다. 이 목간은 시마코쿠나키리고우(志摩國名錐鄕)에서 탐라복(耽羅鰒) 6근을 선물로 조정에 바쳤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탐라국이 직접 일본 조정에 선물로 내놓은 건 아니지만 제주도에서 나온 전복이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목간의 뒷면엔 쇼무(聖武) 천왕의 연호인 덴표(天平) 17(745)’ 이라고 쓰여 있다.

이를 두고 일본에서는 단순히 전복의 종류를 표시한 것인지, 제주도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얻은 것인지는 해석이 분분하다고 하지만 제주와 일본과의 교류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탐라라고 불렸던 제주도는 한반도 뿐 아니라 일본내 소국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외교사절단을 보낸 것은 물론이며, 목간의 흔적에서처럼 교류는 이어졌다. 일본 역사가인 아미노 요시히코(綱野善彦·일본 중세사 전공)는 나라에서 교토로 중심지가 옮겨진 헤이안 시대(794~1192) 율령을 분석, 제주도가 일본의 여러 소국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미노는 일본내 소국이던 히고노쿠니(肥後國), 도요노쿠니(豊後國) 등이 탐라산 전복을 일본 중앙정부에 올렸다는 기록을 들면서 제주도와 일본열도의 연관이 깊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탐라의 동시대엔 일본에서와 달리 전복이라는 명확한 명칭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흔적을 일깨우는 사료는 자주 나온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들여다보자. 문자명왕 13(503) 기록으로, 고구려에서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옥(珂玉, 패류를 말한다)은 섭라(涉羅)의 소산인데, 부여는 물길(퉁구스족)에게 쫓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됐다. 두 나라의 물건을 위나라 정부에 바치지 못하는 이유는 물길과 백제 때문이다.”

이 때 섭라탐라를 의미한다. 탐라와 고구려의 교류를 읽을 수 있는 사료이면서, 바다에서 생산되는 패류가 오고간 사실이 여기에 담겨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옥(珂玉)은 패류 가운데서도 상징성이 큰 전복일 가능성이 높다.

전복이 이처럼 교역품이 된 데는 제주도만의 어업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해녀가 물질을 하듯, 당시에도 제주에서는 물질이 일상화 됐다고 추측을 할 수 있다. 이는 제주에서만 등장하는 특이한 유적과도 연관된다. 그 유적은 바로 전복 껍질로 만든 화살촉과 전복칼이다.

왜 전복을 이용해서 화살촉과 칼을 만들었을까에 대한 답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구하기 쉽고, 가공하기도 쉬운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대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에서 생산되는 재료의 한계도 작용했다. 돌칼인 경우 제주에서는 간석기를 만들 만한 재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고, 철기시대에 들어와서도 제주에서는 철이 생산되지 않는 한계가 작용했다.

가장 앞선 시기의 전복 가공품으로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대정읍 하모리 유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뭔가를 만들려다가 만 전복껍질이 등장한다.

성산읍 신천리 한못궤굴 유적에서 나온 전복껍질. 전복칼을 만드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전복 껍질을 이용한 보다 구체적인 용도를 짐작 가능하게 만드는 유적은 성산읍 신천리 한못궤굴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곳은 신석기후기에서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청동기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개무지 더미에서 다량의 전복류가 출토됐다. 여기에서는 온전한 전복껍질과 깨진 전복껍질, 잘 다듬어진 전복껍질 등이 발굴됐다. 이는 전복칼을 만드는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듯하다.

시대의 흐름은 도구의 발전을 가져온다.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탐라전기 유적에서는 전복칼의 쓰임이 완전히 달라진다. 곽지리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전복칼은 한못궤굴 유적과 달리 날로 사용된 반대쪽에 2개의 구멍이 나 있다. 이 구멍은 끈을 묶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구멍을 통해 끈을 묶게 되면 단순히 손에 쥐어지는 전복칼보다는 힘의 강약 조절이 쉬워진다.

곽지리 조개무지에서 발굴된 전복껍질칼. 구멍 2개가 확실한 칼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전복칼과 더불어 전복으로 만든 화살촉도 등장한다. 곽지리 유적보다는 앞선 시기인 김녕 궤네기동굴에서 30여점의 전복껍질로 만든 화살촉이 발견됐다. 이 곳에서는 돌화살촉도 물론 나왔지만 전복껍질 화살촉이 훨씬 많다.

전복칼과 달리 전복화살촉은 김녕 궤네기동굴 외에는 등장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서만 전복화살촉이 등장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이렇다고 내놓기는 어렵지만 특별한 연유에서 궤네기동굴에서만 발굴된 것은 아닐 듯하다. 여긴 집터 유적이어서 의례용으로 전복껍질 화살촉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수많은 화살촉이 아직도 제주도 곳곳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질의 섬 제주도. 그렇게 해서 건져낸 패류는 수출품이 되기도 하고, 껍질은 생활도구로도 쓰였다. 전복을 활용한 도구는 신석기부터 철기시대까지 아주 오랜기간 나타나지만 어느 순간 그 맥은 끊긴다. 곽지리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전복칼보다 시대가 더 내려가는 유물은 아직 없다. 마찬가지로 화살촉 역시 초기철기 시대에 유일하게 나타난다. 전복을 재료로 한 생활도구가 사라진 건 전복을 캐지 않아서가 아니라 전복을 사용해서 도구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탐라의 활발한 해상활동의 결과물이다. 탐라가 여러나라와 교역을 하며 들여온 철기는 굳이 전복으로 만든 생활도구를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6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미디어제주 2012-05-22 11:18:39
늘 좋은 글 감사하고요, 더욱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꾸벅

탐라 2012-05-22 10:38:31
김형훈기자님의 열성에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한반도와 제주를 전혀 다른 지역으로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주의 고고학적 현황을 보면 신석기시대 이후 삼국시대까지도 한반도 특히 남해안지역과 동일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와 제주는 동일한 공간적 범위(문화)에 해당된다는 것을 인식하시고 기사를 작성하지면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기사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디어제주 2012-05-22 10:32:37
앞으로도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미디어제주 2012-05-22 10:32:04
지적 감사해요. 간석기에 대해서도 보도할 계획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탐라 2012-05-22 10:21:40
제주지역에서도 돌칼과 돌검, 돌대패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간석기를 만들만한 재료가 부족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특히 궤네기동굴의 삼각형점토대토기 단계는 이미 남한지역에서 철기가 사용되는 시기이다. 하지만 생활도구를 전부 철기로 대체하지는 못한다. 제주도에서도 동시기의 유적인 화순리유적을 보면 철제품의 출토량은 극히 미미하다. 즉 초기철기시대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철기의 사용량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한국고고학에서 동시기는 철기보다 청동기의 사용이 아직까지는 많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곧 세형동검과 동경 등 동제품이 기원후 1세기까지도 무덤에 부장되는 예가 많다. 따라서 철기의 도입으로 패제품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면 기원후 3-4세기의 유적인 외도동유적에서도 식량처리구는 모두 석기로 제작되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