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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바라보는 건축과 안에서 바라보는 건축을 조화시켜야”
“밖에서 바라보는 건축과 안에서 바라보는 건축을 조화시켜야”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1.06.29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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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들이 말하는 건축] 건축사사무소 ‘담’ 대표 김상언

건축물은 도시공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도시공간은 바로 집 바깥에 있는 거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거실로 표현할 수 있는 도시공간을 살리려면 건축물 개개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런 도시공간을 만드는 이들이 바로 건축가들이다. 건축가들이 건축물에 어떤 의미를 집어넣느냐에 따라 집 바깥 공간, 즉 거실이라고 표현되는 도시공간이 살아날 수 있다. 건축가를 통해 제주 건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본다.[편집자주]

 

건축사사무소 '담' 대표 김상언씨.

건축가들을 만나면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 “건축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각각이다. 왜냐하면 건축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건축에 대한 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통점은 있다. 건축가들은 땅의 중요성을 말하고, 땅과 땅 사이의 관계, 건축물과 건축물 사이의 관계, 땅과 건축물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건축가들은 땅이나 건축물을 독립된 사물로서가 아니라 ‘관계맺음’으로서의 유기체로 바라본다. 그만큼 건축가들은 클라이언트(의뢰인)로부터 제안을 받은 땅에 대한 얘기와 그 속에 풀어낼 건축물을 생동감 있는,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려 노력한다.

건축가 루이스 칸은 이렇게 말했다. “건축가는 공간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공간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건축이 가지는 의미 그 자체이다. 의미 있는 공간을 생각하라. 그러면 하나의 환경을 발명할 것이며, 그 환경은 당신의 발명품이 될 수 있다. 건축가는 바로 그런 곳에 존재한다.”

루이스 칸이 바라보는 건축가는 ‘공간을 만드는 발명가’다. 칸은 건축가를 향해 ‘발견’이 아닌 ‘발명’이라는 말을 꺼내들었다. ‘발견’과 ‘발명’은 엄연히 다르다. ‘발견’은 일반인들에게 드러내지 않았을 뿐, 늘 있는 존재이다. 이에 비해 ‘발명’은 전혀 다르다. ‘발명’은 이전엔 존재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는 일이다. 칸이 내뱉은 말은 건축가라는 용어 자체에서 보듯 ‘건축가’(architect)의 위치가 ‘조물주’(The Architect)에 비견될 정도로 중요함을 건축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주문에 다름 아니다.

그만큼 건축가들이 하는 일은 중요하다. 건축가들은 땅 위에 아무렇게나 집을 올리는 이들이 아니다. 사회구조상 건축가들은 업자 취급을 받고, 공무원들로부터도 간혹 홀대를 받는 경우가 있으나 알고 보면 건축가들은 무형의 땅 위에 공간을 창조하는 더없이 중요한 이들이다.

건축가 김상언씨(건축사사무소 담 대표)도 답을 하기에 가장 곤란한 질문이 ‘건축은 무엇인가’란다. 그가 내린 답은 “건축은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고 했다. 루이스 칸이나 건축가 김상언씨가 내린 정의는 다를 게 없다. ‘새로운 공간의 창조’라는 점에 이의를 달 이들은 없다.

그렇다면 김상언 대표가 생각하는 ‘좀 더 다른’ 건축은 무엇일까. 그는 ‘2가지 방향’을 꺼내들었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과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것’이다. 전자는 창조된 건축물 내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며, 후자는 전자와는 상반된 개념이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은 건축주의 입맛에 맞게 기능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 즉 건축가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덕망이나 다름없다.

‘안에서 밖’이 아닌 이와 상반된 개념으로서의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것’은 건축물과 외부와의 관계맺음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여기엔 도시를 생각해야 하고, 그와 맞물려 있는 환경을 생각하면서 건축행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많이 얘기되고 있는 ‘풍경으로서의 건축’을 말함이다. 바로 건축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부터 건축가들의 고민은 시작된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에만 주안점을 둘 수도, 반대 개념에만 중점을 두지도 못한다. 이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건축 활동을 하다보면 ‘2가지 방향’이 상충하는 경우가 많죠. 이들을 버무려서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봐요.”

그러면서도 그는 ‘2가지 방향’ 가운데 전자보다는 후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밖에서 안을 보는 눈으로 도시에, 그리고 환경에 폐를 끼치지 않고 건축의 기능이 다할 수 있도록 해야죠. 늘 이것을 목표로 하려고 애쓰죠.”

제주시 이도2동에 위치한 김씨 주택. 작은 공간에 들어선 창조물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작으면서도 의미 있는 건축물이 있다. 제주시 이도2동에 위치한 김씨 단독주택으로 작은 땅에 ‘밖에서 안을 보는 눈’을 담으려 했기에 쉽지 않았다. 30평에 불과한 땅에 김씨 부부와 두 자녀들이 살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폭은 불과 4m인 그런 곳이었다. 고심 끝에 3층까지 이어지는 내부계단을 두고, 층별로 공간을 달리 함으로써 가족 구성원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물을 창조했다. 겉에서 보기에도 좋고, 내부에 사는 이들에게도 만족감을 준 ‘2가지 방향’을 모두 충족시킨 건축물이다.

김씨 단독주택은 건축가 김상언 자신도 처음엔 내놓기에 부끄러워했다. 작은 공간에 세워진, 아주 작은 집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건축상을 받은 작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싼 자재를 들여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을 어떻게 만족스럽게 만들까’라는 명제를 던진다면 그에 대한 해답은 바로 김씨 단독주택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김씨 단독주택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집이라면 건축가 김씨의 손길이 닿은 소암기념관(제주도 건축문화대상 수상작)은 도심의 풍경으로서의 건축을 담고 있다. 소암 현중화 선생의 2층집 바로 곁에 지어진 이 기념관은 소암 선생의 생가를 살리고, 그 곁에 새로운 건축물을 이어 얹은 집이다.

이쯤에서 건축을 풍경이라고 하는 이유를 되새겨보자. 풍경은 눈에 보이는 경치를 말한다. 그런 풍경이 눈에 거슬리면 그건 풍경이 아니다. 풍경을 간직하려면 우선은 있던 것에 대한 경외가 있어야 가능하다. 있던 존재를 없애고 새로운 풍경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역사성을 따지고, 그 곳을 오가던 이들의 기억을 담아내려면 존재에 가치를 둬야 한다. 소암기념관은 소암 생가의 벽체를 온전히 살리면서 새로운 건물을 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나무도 그대로 살려냈다. 건축은 기억의 잔존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가치물로 만들어내는 작업임을 소암기념관은 오가는 이들에게 말하고 있다.

소암기념관. 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소암기념관은 지형을 그대로 살려 '누하진입'을 도입했다. 계단을 오르다보면 소암 선생의 흉상을 만나게 된다.
소암기념관 내부는 계단이 없다. 서서히 오르면서 느끼라고 말한다.

소암기념관은 겉은 현대식 소재이지만 옛 건축의 느낌이 난다. 부석사 등지에서 감상이 가능한 누하(樓下) 진입을 여기에 도입했다. 누하진입은 비탈진 경사면을 그대로 활용했기에 나올 수 있는 구조이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소암 현중화 선생을 만나게 된다. 기념관 내부는 계단을 두지 않고 경사면을 오르듯 가볍게 걷다보면 어느새 2층 전시관과 마주한다.

건축사사무소 담은 맑다는 의미의 ‘담’(淡)이면서 공간 개념의 ‘담’을 말한다. 건축이 맑을 수 있다는 건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에서 ‘맑다’는 건 건축가의 생각보다는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우선하려는 건축가의 의도로 비친다.

그는 “쓰는 이들이 보람 느낄 때 건축가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집에 앉아서 자신의 집을 관찰해야 하는 이들인 클라이언트의 불만이 가득하다면 건축가로서는 불행이다. 클라이언트들이 ‘만족’을 느끼도록 만드는 게 바로 건축사사무소 담이 말하는 ‘담’(淡), 즉 ‘맑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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