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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서북청년단, 그 실체가 첫 공개됐다
'잔혹한' 서북청년단, 그 실체가 첫 공개됐다
  • 윤철수 기자
  • 승인 2009.12.11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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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4.3도민연대, '서북청년단 실체 규명' 토론회
4.3당시 서북청년단 만행 등 학술연구로 공개

제주4.3항쟁의 직접적 원인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서북청년단. 제주4.3진상규명 작업이 이뤄지면서 4.3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이나 잔혹성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서북청년단이 어떻게 4.3에 연관되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어떤 역할과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한 연구작업은 미진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1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김평담 김용범 윤춘광 양동윤)가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한다'라는 주제로 4.3도민토론회를 개최해 눈길을 끌었다.

서북청년단의 실체에 대한 규명을 위한 토론회가 마련되기는 제주지역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처음 있는 일로 평가된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서북청년단과 관련한 내용을 갖고 학위논문을 준비했던 정종식씨(건국대 역사교육학 석사)와 김평선씨(제주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2명이 주제발표자로 나섰다.

#"서북청년단 물건 구매에 냉담한 주민들에겐 '빨갱이' 매도 일쑤"

첫 발표자로 나선 정종식씨는 '서북청년단의 결성과 활동'이란 주제로 결성과정, 4.3항쟁에 있어서의 서북청년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해 정리해 발표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북한의 친일잔재 청산과 체제개혁의 희생자가 되어 월남한 이북 5도의 청년들이 결성한 우익 반공청년단체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 폭력적이고 극우적인 성향을 띠며, 반공세력의 선봉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제주4.3항쟁의 탄압세력 및, 김구 암살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북청년단은 정식명칭은 '서북청년회'인데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었고 줄여서 서청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서북청년단의 결성과정,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의 특징, 그리고 결성 후 전국적 활동내용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그는 4.3항쟁 당시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서청 제주도 지부가 정식으로 발족된 것은 1947년 11월2일이었습니다. 위원장에 장동춘이 선출되었는데, 발족 훨씬 이전부터 적지 않은 서청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북청년단 단원 가운데에는 이북에서 급히 도망쳐 나온 연유로 빈털터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주에서 무전취식을 일삼으며, 민가에 가서 쌀과 돈을 강요했고 관공서에 가서도 '국민배급'을 달라고 떼를 쓰고 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들고 다니며 반 강압적으로 파는 단원들도 있었습니다. 4.3항쟁이 일어난 후 성산포 등지에서는 물건 구매에 냉담했던 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의 발표자료에 따르면 4.3발발 이전까지 제주에 파견된 서청단원의 수는 제주읍 300명, 각 면마다 40-50명씩 총 760명으로 추정된다.

1947년 제주도에서 총선거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으로 서청은 500명의 대원들을 '경찰'로 임관하여 김태일 경무부 경무과장의 지휘하에 현지 경찰전투대에 편입돼 토벌전에 나섰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리고 여순사건 직후 1948년 11-12월 사이에 서청단원은 최소한 1000명 이상이 경찰이나 경비대 옷을 입고 추가 투입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3.1시위 이후 갑작스러운 정부군의 증강으로, 침체에 빠져있던 제주도 경제는 새로운 경찰.우익 청년단들을 부양해야 하게 되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경찰의 봉급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명목으로 뇌물을 받아 이를 보충해야 했습니다. 서북청년단은 정기적인 봉급이 없었고 완전히 빈손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공공질서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은 뇌물수수, 공갈, 사기 등을 거리낌없이 일삼았습니다. 경찰과 우익들은 반항하는 섬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처녀들을 강제로 아내로 삼는 행위도 다반사"

그는 1947년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제주에서 자행한 서청의 테러행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며 그 내용을 설명했다.

"서북청년단 순회 집회 때 저질러지는 제주도 주민에 대한 계속되는 테러에 관해 서청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조직원이 더 이상 제주에서 테러사건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하겠다고 11월18일 CIC에 사과했다. 우익들은 서청의 자금모금 캠페인을 벌임에 있어서 테러에 의존해 왔다. 서북청년단 제주도 단장이 지난 주 제주 CIC에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자신의 주장을 CIC에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무자비한 테러와 탄압으로 도민들의 감정이 격하됐다"며 "경찰과 서청의 테러가 심해지면서, 젊은이들은 낮에는 산으로 올라갔다가 밤에만 마을로 내려오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서청은 비록 '반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제주에 투입되었지만 이들의 행위는 오히려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며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다 보니, 우익계통의 사람들도 상당히 포함돼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한 그의 설명은 끊이지 않았다.

"빈곤한 상황이 잔혹한 테러와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야기한 원으로 유추된다. 이들의 명목은 '반공'이었지만  좌익 뿐 아니라 민간인들 심지어 우익 인사들에게도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러 금품을 갈취하였으며, 처녀들을 강제로 아내로 삼는 행위가 다반사였다."

그는 서북청년단의 '잔혹성'이 컸던 이유에 대해서는 경제적 궁핍함을 들었다.

"군경이 아닌 청년단원의 신분으로 파견된 이들에게는 월급도 주어지지 않았고, 모든 의식주 활동을 침탈로만 해결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홀홀단신으로 남한 사회 한가운데 버려진 처지에 처한 이들의 빈곤한 경제사정과 피해의식은 그들의 행위를 더욱 극단적이고, 반인륜적인 모습으로 이끌었을 것임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무장봉기 집단과 제주도민의 사회적 불만 매개 역할"

두번째 주제발표로 나선 김평선씨는 '서북청년단의 폭력동기 분석'을 통해 4.3 전개과정에서 서북청년들이 왜 폭력성의 원인에 대한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김씨 역시 앞서 주제발표한 정씨와 마찬가지로 서북청년단의 폭력의 원인을 경제적 문제로 유추했다.

그는 "활동자금을 모으기 위한 서북청년단은 강매, 강제모금을 취했으며, 관공서 조급문제, 심지어 인사문제에까지도 개입했다"며 "이러한 과정에서 폭력이 사용되었으며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미군정 CIC에도 관심사항이 되었다"고 말했다.

"무릉리에서 서북청년 경찰대에 의해 박행구가 구타당하고 총살당하는 일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고문, 구타, 살해 등의 강도높은 폭력은 남로당의 핵심 지도부들의 원성을 가져왔다. 서북청년단의 강제모금과 관공서 인사문제 개입과 사적 처벌 등의 폭력남용은 제주도민의 불만을 초래시켰다. 오히려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무장봉기 집단과 제주도민의 미군정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불만을 매기하는 역할을 했다."

4.3무장대에 대한 정부의 강경 진압작전 등의 요인도 서북청년단의 폭력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분석했다. 그는 "서북청년단은 군사시설 보호와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하는 등 군.경과 협력관계에 있었다"며 "서북청년단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무장대 진영에 침투하거나 마을에 밀고자를 두어 남로당원과 무장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또 "색출 프로그램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서북청년단, 서북청년으로 구성된 특별중대, 서북청년단 출신의 경찰은 혐의자를 연행하거나 직접 학살했다"며 "그러나 이러한 폭력은 서북청년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군과 경찰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해자에 대한 논의를 이끌고 있다는데 큰 의미있는 토론"

주제발표 후,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회에서는 제주4.3유족청년회 등을 지내며 4.3진상규명 활동에 많은 활동을 했던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 그리고 이창수 새사회연대 대표와 김종혁 4.3도민연대 정책위원장이 토론자로 나서 이에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오영훈 의원은 "오늘 토론회는 그동안 논의되지 못했던 가해자에 대한 논의를 이끌고 있다는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며 "또한 이는 4.3의 진상규명 작업이 미완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 의원은 "이러한 추가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통해 4.3의 화해, 상생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 구현하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혁 4.3도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오늘 나온 내용을 토대로 해 진상규명의 과정과 역사적 사실기반, 그리고 평가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앞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중요하다"며 "이것이 진정한 진상규명의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토론이 끝난 후에는 한석지 제주대 교수의 사회로 방청객들이 참여하는 종합토론이 열렸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서북청년단의 실체를 규명하는 토론회는 아마 전국적으로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며 "오늘 논의는 서북청년단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들의 행위가 무슨 이유에 의해서였는지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또한 이런 자리를 통해서 역사적 진실을 밝혀 나가고 완전한 4.3해결에 더욱 근절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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