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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거부한 10.19 여순항쟁 군인들 “제주도민은 ‘애국인민’”
파병 거부한 10.19 여순항쟁 군인들 “제주도민은 ‘애국인민’”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3.10.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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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희 박사, 제주 기쁨과 희망 포럼 강연 통해 새로운 시각의 접근 주문
“송요찬 포고문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捧持)하여’, 누구의 지시일까?”
역사연구가인 주철희 박사가 25일 제4회 제주 기쁨과 희망 포럼에서 ‘새로운 시각의 역사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주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역사연구가인 주철희 박사가 25일 제4회 제주 기쁨과 희망 포럼에서 ‘새로운 시각의 역사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주제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제주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제주4.3 당시 제주 파병을 거부하면서 촉발된 10‧19 여순항쟁이 군 내부의 남로당 당원들에 의한 봉기가 아니라 제주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던 군 내부의 반발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역사연구가인 주철희 박사는 25일 제주4.3평화공원 내 교육센터에서 열린 제4회 제주 기쁨과 희망 포럼에서 ‘새로운 시각의 역사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주제 강연을 통해 여순항쟁의 배경에 이같은 군인들의 인식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철희 박사는 “4.3평화기념관에 가면 처음 만나게 되는 백비에 75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면서 “앞으로 25년이 더 지난 후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어 그는 “정부의 진상보고서가 발간된 후 20년이 지났고 평화재단과 평화공원이 만들어진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혀진 역사’로 남아있는데,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런 역사를 본 적이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는 “대부분의 역사는 국가 또는 권력자가 남겨놓은 기록이 첫 기록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탈피해야 한다”면서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2항의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을 들어 “이제 우리는 국가 권력이 아닌 ‘우리’ 중심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대목에서 여순항쟁 당시 14연대 군인들이 쓴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면서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면서 제주도민을 ‘애국인민’이라고 지칭한 부분을 주목했다.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항쟁 당시 14연대 군인들이 쓴 성명서.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항쟁 당시 14연대 군인들이 쓴 성명서.

당시 파병을 거부한 14연대 군인들이 제주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병을 거부했고, 이런 이유로 제주도민을 ‘애국인민’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사실 제14연대는 처음으로 제주 파병 명령을 받은 부대가 아니었다”면서 자신이 제주4.3을 깊이 들여다보게 된 이유가 이 ‘애국인민’이라는 표현 때문이었으며, 제주 사회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그는 11월 7일 계엄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10월 11일 군이 제주에 투입되면서 4.3 발발 직후인 4월 5일 설치된 제주도비상경부사령부가 제주도경비사령부로 전환되면서부터 경찰이 아닌 군이 투입되기 시작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특히 그는 해안선부터 5㎞ 이외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령을 내린 송요찬의 포고문 내용 중에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捧持)하여’라는 문구에 주목, 이 포고령이 사실상 군 통수권자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추론했다.

1948년 8월 6일 국제신문에 게재된 ‘동족의 피로 물드린 제주참전기’부터 8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당시 제14연대장을 맡고 있었던 김익렬 대령의 글이 실리면서 제주의 참상이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던 부분을 들기도 했다.

이와 함께 당시 호남신문 기자들이 쓴 ‘제주여 말하라’ 1신부터 4신까지 보도 내용에 대해 “기자들이 직접 군의 보호를 받지 않고 제주를 돌아다니면서 취재,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호남신문에 연재된 내용”이라고 소개했다.

이같은 보도 내용이 기존 군과 경찰이 얘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기에 여수에 있던 14연대 군인들이 ‘애국인민’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4.3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발발 원인도 규명해야겠지만 왜 3만 명이 넘는 도민들을 죽였는지, 그리고 군과 경찰이 남겨놓은 기존 자료보다 새로운 자료를 찾아봐야 한다”면서 “4.3 70주년 당시 내걸었던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메시지가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이 좌장을 맡아 진행한 대담 모습. 이날 대담에는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이 패널로 참여했다. /사진=미디어제주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이 좌장을 맡아 진행한 대담 모습. 이날 대담에는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이 패널로 참여했다. /사진=미디어제주

강혜명 소프라노의 공연에 이어 진행된 대담 순서에서 패널로 참여한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14연대의 출병 거부 서명에 씌어진 ‘애국인민’이라는 표현을 보면 가슴이 뛰지만, 남로당이라는 정당의 이념적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민중은 없다”면서 “그 문장을 남로당원이 아닌 일반 제주도민이 썼다면 ‘애국인민’이라는 표현이 더 크게 다가왔을 거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어 양 실장은 “제주4.3에 ‘항쟁’이라는 명칭을 붙일 경우 ‘항쟁’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작아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4.3 진상 규명의 역사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돼야 하고, 정명에 대한 논의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의미도 있고 역사에 대한 해석만 갖고 사건의 성격을 호명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주 박사는 “‘항쟁’이라는 표현의 그릇이 작다는 얘기하는 동의하기 어렵다”면서 “동학을 ‘혁명’이나 ‘운동’이라고 한다고 해서 ‘학살’이라는 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여순 항쟁’이라 한다고 해서 ‘학살’일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어 그는 “10월이면 여수에서 열리는 추념식에 제주 유족 분들이 오셔서 ‘여수 순천 사람들에게 미안하’는 얘기를 실제로 많이 하신다”면서 “달리 생각하면 2021년 만들어진 여순특별법이 여수‧순천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제주의 노력 덕분이다. 제주에 항상 고마움을 갖고 있고, 진상 규명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5개월만에 정부가 바뀌었지만 제주가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가보려 하고 있다. 제주에 항상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25일 제4회 제주 기쁨과 희망 포럼에서 소프라노 강혜명이 열창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미디어제주
25일 제4회 제주 기쁨과 희망 포럼에서 소프라노 강혜명이 열창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미디어제주
제4회 제주 기쁨과 희망 포럼이 25일 오후 제주4.3평화재단 내 교육센터에서 열렸다. /사진=미디어제주
제4회 제주 기쁨과 희망 포럼이 25일 오후 제주4.3평화재단 내 교육센터에서 열렸다. /사진=미디어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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