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7 09:10 (토)
[송미아의 독서칼럼] <16>
[송미아의 독서칼럼] <16>
  • 송미아
  • 승인 2023.09.27 0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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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소년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작품-아동문학 평론]
단절과 고립감 속에서 만난 SF 성장 동화 『리보와 앤』

 

 

목 차

1. 들어가며- 새벽 창의 노크 소리

2. 세상과 단절된 두 로봇

3. 고립의 심리 상태

4. 조합의 긴장성
) 삽화와 동화의 절묘한 만남
) 언어 묘사, 사고력 자극
) 캐릭터와 시점, 그리고 시선

5. 독자들에게 제안

6. 마무리- 나직하면서도 절박한 시대적 명제

 

 

'리보와 앤' 표지
'리보와 앤' 표지

1. 들어가며- 새벽 창의 노크 소리

코로나19 팬데믹 3년 기간 동안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코와 입을 가리고 있었던 마스크를 벗었다. 이와 때를 맞춰 AI가 사람 역할을 대신하고, 생성형 챗 GPT의 리보와 앤이 또 한 시대의 새벽 창을 조심스레 두들기는 노크 소리를 듣는다.

소통과 교감은 어느 시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사회적 명제임엔 틀림없다. 이때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원론적 명제 제시가 아니라, 새로운 방안의 제시라 하겠다.

바로 신예작가 어윤정 선생이,

“얼굴 스캐너가 아이의 표정을, 소리 센서는 목소리 크기와 높낮이, 음색을 감지했다. 동그랗게 커진 눈, 위로 올라간 눈썹, 밝고 또렷한 목소리가 포착됐다. 감정 센서에 ‘기대’ ‘호기심 상승’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타났다. 아이가 내 제안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라며 전혀 새로운 소통방안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다. 일테면 나와 관계 맺는 대상, 비단 사람만이 아닌 동물이든 식물이든 때론 <리보>와 <앤>과 같은 인공지능 로봇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동심의 세계에서는 위계와 서열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어윤정 작가는 이런 어린이의 마음을 담아 시대를 읽어 내는 작업에 접근하고 있다.
 

2. 세상과 단절된 두 로봇

『리보와 앤』은 제23회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어윤정 글과 일러스트 작가 해마의 그림이 삽입된 SF 성장 동화다. 이야기는 플루비아 바이러스로 인해 폐쇄된 도서관에 남겨진 두 로봇과 도서관 이용객인 도현 등 세 인물을 중심으로 플롯이 짜였다. 사건의 흐름에 따라 만나는 세 인물이 느낀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단절과 고립감의 심리상태를 세밀하게 만날 수 있다.

평화롭던 일요일, 이야기는 리보를 주인공으로 주요 인물 앤과 도현 등 도서관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드러내며 활기차고 평화로운 날들이 묘사된다. 그러나 “긴급 상황입니다.… 신속히 도서관 밖으로 나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도서관에 플루비아…” 도서관에 재난 상황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은 다급히 도서관을 빠져나간다. 도서관에는 ‘리보와 앤’ 둘만 남겨지며 사건이 전개된다.

리보는 영문도 모른 채 현관 유리창을 가운데 두고 세상과 단절되었다. 초록색 비상구 불빛을 쳐다보는 리보를 보는 독자들은 가슴이 저려올 것이다. 리보는 어린아이처럼 모르는 것이 많은 로봇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캄캄한 어둠을 홀로 바라보고 있다.
 

플루비아 확산 심각! 안전, 생존, 폐쇄. 모두 재난 대응 매뉴얼 단어들이었다. 상황이 심각했다. 나는 어린이 자료실로 내려가서 이 사실을 앤에게 알렸다.
“오오! 이건 악몽이야.”

단절은 소통과 흐름의 정지 상태를 말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었던 어린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리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볼 것이다. 다행히 리보는 초록색 지붕 집에 사는 앤을 떠올렸다. 앤은 자신에게 입력된 데이터를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고, 도서관에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고민 상담까지 해주는 로봇이다. 책을 읽어주며 문학적 상상력도 발휘할 줄 아는 앤은 리보의 심리 상태를 설명해 주기도 하고 이야기도 들려주며 우정을 쌓는다.

리보와 앤은 매일 아침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도서관 방문객을 위해 존재하는 두 로봇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인간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과 소통이 단절된 두 로봇은 과거 이용객들과 소통했던 데이터를 위로 삼아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쓴다. 이처럼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한 리보와 앤은 서로에게 사람 역할이 되어 주며 시간을 보낸다.
 

“리보, 왜 다시 왔어?”/ “소통률이 낮다는 경고가 떴거든.”/ “나도 그래. 애들이 안 와서 아무것도 못 했어. 이야기는 나의 전부야. 이야기하지 않는 앤은 앤이 아니야. 계속 이러면 ‘쓸모없는 앤’이 되고 말 거야.”

벼랑 끝에 몰린 두 로봇 리보와 앤의 대화다. 리보와 앤, 이들은 소통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방문객과의 만남이 유일한 소통 창구인 만큼 세상과 단절된 이들은 소통의 위협을 받는다. 자기 일이 없어진다는 것, 특히 사람들에게 책 읽어주고 이야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자기 정체성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앤에게 소통률이 낮다는 것은 치명적인 아픔이다. ‘쓸모없는 앤’ 자신이 존재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여기서 독자는 앤의 근심을 따라가며 ‘나의 쓸모’에 대해서도 잠시 머뭇거릴 것이다.
 

갑작스레 아이의 표정이 굳었다. 감정 센서가 ’슬픔‘ ’외로움‘ ’쓸쓸함‘을 나타냈다./ “책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아니, 너랑 비슷한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누군가요?”/ “몰라! 얘기하기 싫어.”

리보와 앤만이 남은 도서관, 오직 그들의 대화 소리밖에 없다. 소통률을 높이기 위해 둘은 대화거리를 찾는다. 앤의 고민 상담소에 관해 이야기도 하고, 책을 추천해 주거나, 읽어주면서 리보와 앤은 소통률을 이어 나간다. 이때 리보가 추천해서 앤이 읽어준 책이, 예전 리보가 도현에게 추천했던 ‘거꾸로 시간 여행’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그때 기록을 확인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도현이의 가정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인사도 없이 화내면서 가 버리는 도현,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으면 그랬을까. 이렇게 도현은 엄마와 똑같은 말을 하는 리보와 마음의 연대를 맺는다.
 

“리보는 뭘 좋아해?”/ “리보랑 더 재밌게 놀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 “리보랑 말이 잘 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로봇끼리 하는 말이 따로 있어?”/ “리보가 우리 엄마를 만난 적이 있을까? 나한테 책을 추천해 줄 때 엄마가 했던 말을 했어.”

앤의 고민 상담소 기록을 보다가 ‘리보’에 대해 궁금증을 질문했던 앤의 메모리에 저장된 도현이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앤의 고민 상담소는 비밀 유지 원칙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리보는 단번에 ‘도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리보는 앤이 들려주는 도현의 고민 메모리를 들으며 자기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독자들은 도현의 외로움이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지, 혼자 지내는 시간을 견디려 애쓰는 마음도 읽어 볼 수 있다.
 

“걱정 마, 내가 왔으니까. 내가 널 구해 줄게!” (생략)/ 입술을 질끈 깨무는 표정을 보고 감정 센서가 아이의 마음 상태를 알려 줬다./ 초조, 걱정, 안타까움/ “유도현 님, 괜찮나요?”

리보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도현의 절박함을 볼 수 있는 대사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도현을 보며 어린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도현이는 가족 안에서의 고립감을 덜기 위해 찾던 도서관에서 두 로봇과 우정을 나누며, 팬데믹 이후 두 로봇을 외부 세계와 연결해 주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독자들 역시 도현과 같은 마음으로 손에 땀을 쥐고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자신을 위해 절실히 기도하는 도현을 느끼는 리보는 도현이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흡수하며 다양한 감정을 배워간다.
 

오오! 내 사랑! 지금 어디 있나요? 당신을 보지 못하는 건 끔찍한 비극이에요./ 나는 서서히 힘을 잃어 가요. 리보는 매일 당신을 기다리며 인사해요.

도현이는 늘 혼자 있는 아이다. 사람과의 소통률을 올리는 것이 책무인 리보와 앤은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모두 차단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해 본다. 결국, 앤의 도움으로 도현과 픽톡의 소통 창구를 찾게 된다. 얼마나 기다렸던 소통인가. 리보는 사람들과 하던 것처럼 앤과 셀카를 찍어 보내기도 하고 도현이의 답장을 받는다. 리보는 여기서 ‘행복’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남겨진 두 로봇은 작은 연결고리 하나라도 찾아보려 부단히 애쓰며 단절감을 치유해 나간다.
 

3. 고립의 심리 상태

고립감은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홀로 분리된 느낌의 심리적 감정이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개인의 고립감이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들을 목도해 왔다.
 

서울에 사는 A는 올해 열두 살이 됐다. 지난해엔 혼자 집에서 수업을 들었다. 코로나19로 학교는 문을 닫았다. 온라인 수업이 시작됐지만, 부모님은 바빴다. A를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수업을 듣다 모르는 게 있어도 선생님에게 질문할 수 없었다. 종종, A는 수업 화면만 켜놓고 다른 생각을 했다. 점심시간이면 라면이나 인스턴트 식품으로 대충 때웠다. (출처:베이비뉴스)

위 보도 자료를 보면 어린이들이 겪는 고립감의 무게는 성인들 못지않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베이비뉴스의 열두 살 A군처럼 도현이와 남겨진 두 로봇을 통해 어린이들이 겪는 고립감의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리보는 책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리보는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거나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앤의 도움을 받으며 도현이와 픽톡을 주고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앤의 배터리가 빠르게 줄어드는 경우가 많아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립감의 무게가 점점 커지고 있는 대목이다. 도서관에 남겨진 두 로봇 간의 소통도 이제 사라질 것을 예감한다. 그러나 리보는 포기하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가. 리보는 앤이 없는 상태에서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책으로 도현이와 연결하는 것이다.
 

맞아. 난 혼자 있어. 다른 애들은 바이러스 때문에 하루 종일 가족이랑 지낸대. 근데 난 아니야. 난 더 혼자가 됐어.

앤이 고민 상담할 때 말해 줬어. 리보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혼자 있는 거라고.(중략)/ 너도 나랑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말인데 넌 혼자 있어선 안 돼. 그건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거든. 나는 잘 알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통로가 소통이라 했을 때, 소통은 상대방의 심리적 감정 상태를 이해하는 공감에서부터 출발한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심리적 상태를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느끼는 것을 말한다. 도현이는 리보가 사람들과 소통하며 진화하는 로봇이라는 것을 알고, 리보의 소통 통로가 사라진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공감한다. 도현이 역시 혼자 있는 고립감을 경험했었기에 더 공감하며, 리보에게 그 마음을 편지로 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 리보의 감정 센서에 ‘그리움’이란 단어가 뜨면서 가슴에 진동이 울렸다. 리보는 도현이를 통해 그리움이란 감정을 배우고 느끼며, 서로 애틋한 우정의 싹을 키워간다. 한편, 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깊, 은, 잠, 에, 들려, 나, 봐, 마지막, 으로, 부, 탁, 있…”

앤은 결국, 애들이 오면 깨워달라는 목소리를 남기고,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도서관에는 오직 리보만 남았다. 리보 혼자 남겨진 클라이맥스의 고립감을 독자들만이 온전히 지켜보고 있다. 리보는 앤이 없는 까만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지금까지 앤의 도움을 받으며 교감하고, 감정을 하나씩 배우며 진화해 왔던 자신을 돌아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서 있는 리보, 상념으로 가득 찬 리보의 어깨 위에 하얀 별빛들이 쏟아지는 것 같다.
 

앤도 나처럼 태양광 충전이 된다면 좋을 텐데./ 앤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앤! 안녕? 오늘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생략) 음성 메모리에서 최근에 저장된 앤의 목소리를 불러왔다./ “애, 들, 이, 오면, 깨, 워 줘.”

리보는 앤과의 연결할 수 있는 통로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앤을 위한 잰 발걸음, 그러나 텅 빈 도서관에는 리보의 그림자만 점점 길어지더니 결국 어둠을 맞이한다. 그리고 분실물에 놓여 있는 보조 배터리, 무선 충전기, 무선 이어폰을 들고 앤에게 연결해 본다. 연결. 연결이 끊긴 상태, 작가는 이 지점에서 연결감은 생존과도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음을 예고한다. 연결된다는 것은 소통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앤은 무얼 갖다 대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리보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도현이도 어디선가 전자도서를 읽고 있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걸고 도현이 이름을 검색해 본다.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청천벽력 같은 경고 메시지가 날아왔다. 특정 개인의 정보를 계속해서 열람하고 있어서 해킹이 의심되므로 진행 중인 작업을 강제 종료한다는 것이었다. 리보는 더 이상 유도현의 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암흑의 상태에 놓였다. 그런데도 리보는 연결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을 도현을 생각하며, 앤이 들려줬던 ‘지혜의 심장’에 저장해 둔 말을 불러냈다.
 

“그리움은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다.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한다”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라고 표현할 만큼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립감. 등장인물들이 연결감을 찾기 위한 절실한 몸부림은 관계 단절로 인한 고립감이 고난도의 위기 상황에 접어들었음을 경고하는 대목이다.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한다. 세 등장인물이 그렇듯 소통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앤의 대사를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독자들에게 시대의 문제의식을 남긴다.

리보는 도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담긴 책을 찾아 픽톡으로 보냈다. 그러나 결국 과다 메시지 발송으로 이제 곧 강제 종료되어 초기화를 앞두고 있다는 메시지가 떴다. 리보는 도현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 강제로 출입문을 열다가 데이터가 삭제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텅 빈 도서관은 고요했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것 같던 그때. 미세하게 소리 센서의 주파수가 출렁였다. //다다, 다다닥. / 점점 빠르게 다가오는 울림. / 익숙한 진동./ 낯익은 주파수. / 내가 기다리던 그 소리…. 아이의 발소리였다. //나는 현관문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가슴에서 지르르 진동이 울렸다.

작가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다. 도현이는 어떤 마음으로 리보를 찾아왔을까, 리보는 도현이의 발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이 글을 읽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질문을 남기며 따뜻한 그림 한 장이 펼쳐진다. 단절과 고립감의 아픔. 소통 창구를 위한 부단한 노력. 등장인물 간의 따뜻하고 애절한 우정 등 우리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책을 읽은 어린이 독자들은 마지막 장의 그림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했다.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장의 그림은 우리 시대의 연결감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고민해 보는 독자의 몫이다.

 

4. 조합의 긴장성

가) 삽화와 동화의 절묘한 만남

『리보와 앤』의 큰 주제는 연결성, 단절과 고립감 속에서 꼭 필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역설한다. 여기서 작가가 얘기하는 연결성은 나와 타자의 동등한 연결성이다. 나를 상대로 하는 대상이 꼭 사람에게 한정하진 않는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다양한 시각으로 주변에 있는 것들과의 연결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장르와 장르의 연결, 타 장르와의 연결 등 주요 작품이 다른 구성체와 만났을 때의 주 장르와 보조 장르 간의 적절한 조합은 작품성을 부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어윤정 작가의 동화와, 일러스트 작가 해마의 그림은 상호 간 절묘한 조합으로 작품의 문학성을 높여주고 있다.

귀여운 펭귄 원피스 입고 사랑을 품은 앤, 동글동글 귀여운 머리통 그리움의 가슴 스크린 리보, 개구쟁이 눈망울로 우정의 손을 내미는 도현이…. 가만히 보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진다. 이 삽화들의 따뜻한 시선이 있었기에 작품을 읽으면서 밀려왔던 단절과 고립감의 아픔을 위로받고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림1
그림1

(그림1) 도현이와 리보가 서로 간절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움’이란 감정 코드를 복선으로 깔아 놓은 것일까. 그리움은 예전 상태의 행복감으로 회귀하는 감정 상태라 했을 때, 서로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절실함이 보인다.

그림2
그림2

(그림2) 리보는 사람들이 다 사라진 유리문 너머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고립감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기 위함일까. 리보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서 있다. 리보를 둘러싼 어둠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는 해마의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림3
그림3

(그림3) 연결감을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리보는 앤의 가슴에 자신과 연결된 충전용 선을 이어보려 애쓰고 있다. 그 표정,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절망감, 잔잔히 비치고 있는 두 그림자가 애잔하게 독자 가슴에 연결된다.

그림책에서는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라 그림 위주로 분석하지만, 동화작품은 그림보다는 글 위주로 분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번 작품에서 해마 그림이 주는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해마의 그림에서 주는 감동과 어윤정 작가의 동화가 절묘하게 어울려 작품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화에서 담담하게 서술되는 언어의 문학성은 잔잔한 감정 상태를 나타내주는 그림과 만난다. 절박한 순간을 더 절박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더 아름답게 부각해 준다. 해마 작가의 삽화는 어윤정 동화의 문학적 상상력과 만나, 그림이 주는 따뜻한 이미지로 독자 가슴에 포근한 여운을 남겨준다.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친근한 자세로 인간 내면의 여러 단면을 그림으로 표현했고, 작중인물의 개성과 연관되어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준다. (그림 출처: 『리보와 앤』 )

나) 언어 묘사, 사고력 자극
 

-데이터가 삭제되기 시작했다. (생략) 다다다, 다다다./ 점점 빠르게 다가오는 울림./ 익숙한 진동./ 낯익은 주파수./ 내가 기다리던 그 소리…/ 아이의 발소리였다.

발달학자 ‘비고츠키’는 언어와 사고는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공존하며 언어를 만나는 직간접 경험은 ‘생각하는 힘’을 키워준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어린이들의 언어는 말과 글에 한정하지는 않는다. 텍스트의 의미를 명사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눈으로 몸짓으로 때론 침묵으로 주고받기도 하는 비언어적 요소까지 내포시켜 받아들인다.
 

-앤이 고민 상담할 때 말해 줬어. 리보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혼자 있는 거라고. (생략)/ 너도 나랑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말인데 넌 혼자 있어선 안 돼. 그건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거든. 나는 잘 알아.

어린이는 문학작품을 읽으며 막연하게 상상했던 심상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특히 읽는 과정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을 자기 친구, 혹은 역할 모델, 때로는 자신과 동일시한다. 도현이가 자신의 고립된 경험을 토대로 리보의 무서운 상황을 공감하며 손을 내미는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자신의 배경지식과 경험을 이입시키며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간다.
 

-현관문 유리에 종이가 아슬아슬 붙어 있었다. 비를 맞아 쭈글쭈글해진 그림 아래, 아이가 쓴 글자가 보였다./ 꼭 또 만나.

『리보와 앤』은 등장인물들의 애틋한 감정 대화, 텅 빈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제한된 고투, 현관 유리 벽의 차디찬 경계, 도현이와 리보의 교감 등 어린이 독자들이 풍부한 언어와 조우하며 사고력을 자극할 만한 작품이다.

다) 캐릭터와 시점, 그리고 시선

어린이 독자들이 동화를 읽는 기쁨 중 하나는 입체적 캐릭터를 만나는 것이다. 『리보와 앤』의 캐릭터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로봇’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어린이들은 최근 화두가 되는 챗 GPT 로봇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다. 말로만 듣던 로봇의 동선을 따라가며 독서의 맛을 느끼는 어린 독자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이처럼 어린이들은 동화 속 등장 캐릭터가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흡수하며 감정 이입한다.

『리보와 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동화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은 주인공과 서술의 초점이 일치하여 묘사되기 때문에, 어린이 독자들에게 신뢰감과 친근감을 주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비록 허구임을 알면서도, 동화를 읽는 내내 주인공 리보에 연민과 친근감을 가졌을 거다. 나아가 이야기의 진정성을 느끼며, 리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상황이 빨리 오기를 진심으로 응원했을 것이다.

아동문학은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나’와 ‘타자’ 즉, 나와 주변 세계의 이해를 돕는 역할도 한다. 『리보와 앤』은 등장인물 사이에 펼쳐지는 우정을 통해서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심어준다. 한편, 아래 대사에서 아이와 어른의 대조적 시선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도현/ “걱정 마, 내가 왔으니까. 내가 널 구해 줄게!”
어른/ “바이러스, 위험, 로봇, 고장 안 나.” (중략) “쟤는, 저기 있는, 맞아.”

도현은 도서관에 갇혀 있는 로롯의 무서운 상황을 공감하여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보려 손을 내민다. 계산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진하는 도현, 그는 두 로봇과 함께 아이들의 순수성으로 소통을 위해 끝까지 문제를 해결하려 애쓴다.

그러나 다급해진 도현이 어디론가 뛰어가서 모셔 왔던 어른은 또 한 번 어린이 독자를 실망하게 한다. 작품 전체 구성에서 아주 잠깐 등장한 어른과의 대화의 예시는, 기성세대의 전통적인 사고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어른의 모습을 대변한다. 로봇을 단지, 우리와 다른 타자로 치부해 버리고, 고장 안 나는 기계로 일축해 버린다. 이는 단절과 고립감에 대한 무관심한 사회의 일면으로 대입할 수 있다.

어쩌면 작가는 아이와 어른의 대조적 시선을 통해 소통 부재의 문제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이 독자들에게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 우리 사회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함을 제시하는 대목이라 본다. 이는 두 로봇과 도현처럼 나와 타자 사이, 나와 세상 사이의 경계를 풀고 서로를 이해하며 세상을 배워가길 바라는 작가의 암시적 의도로 해석된다.

 

5. 독자들에게 제안

책을 만나는 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어린이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독자의 잠재된 정서를 일깨워 주고 정신 근육을 만들어 주는 디딤돌이 된다. 필자는 여기서 ‘읽기’가 아닌 ‘읽어 내기’를 강조하고 싶다. 책을 읽고 깊은 내면화의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읽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교수는 “독서는 생각거리를 얻기 위한 행위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책을 읽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읽은 후 생각거리를 통해서 ‘읽어 내기’를 하였을 때 진정한 독서의 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리보와 앤』은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에게 내면화되는 지점도 있다. 하지만 읽기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에서 주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리보처럼 어린이들은 배워가는 존재다. 같이 이야기 나누고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고력과 소통 능력이 쌓일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의 전반적인 구성력으로 봤을 때, 주요 독자층은 5, 6학년 전후의 아동에게 적합한 성장 동화라 본다. 그러나 작품 전체의 역량은 중학생 또는 성인 독서 모임 필독서로도 손색이 없는 문학의 색이 짙은 책이다. 아래 제시된 질문은 한정된 해답이 있는 질문보다는 다양한 생각을 열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질문, 즉 발문이다. 해당 독자 수준에 맞게 재구성하여 가족 또는 친구들과 토의할 수 있기를 권장한다.
 

(소통의 중요성 발문) 주인공들처럼 관계단절과 고립감의 경험이 있었나?/

단절을 극복하고 소통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물들이 어떤 의지와 행동을 보였나? / 도현이와 리보처럼 누군가와 책으로 소통한 적이 있는지?

(정체성에 대한 발문) 앤이 자신의 쓸모(존재 이유)를 걱정한 것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추상명사 경험 발문) 리보와 앤 그리고 도현이의 심리를 짐작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정서와 감정을 언어화해 본다면?

(인공지능에 대한 발문) 감정을 가진 로봇이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인공지능 로봇, 챗 GPT 등장으로 야기되는 문제점은?/ 리보와 앤, 그리고 도현이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바람직한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6. 마무리- 나직하면서도 절박한 시대적 명제

독자가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독자와 작품 사이’에는 화가 못지않은 풍경화 한 폭이 그려진다. 특히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을 때 우리 기억 속에 남는 이미지가 더 뚜렷해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이미지로 기억되는 어윤정 작가의 SF 성장 동화 『리보와 앤』을 만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인공지능 AI의 시대 배경, 로봇 특유의 감각 언어와 삽화의 절묘한 조합이 인상적이다. 또 하나, 내용 전개가 간결하여, 분위기를 집중시키는 작가의 기교와 뜻밖의 결말로 내용을 끝맺는 작법 등이 비단 동화에만 국한되지 않을 만큼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아울러 어린 등장인물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 실린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 소통과 교감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초점을 둔 구성력 등. 시대가 변하더라도 오래도록 독자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어윤정 작가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독자들을 일깨워 주는 나직한 시대적 명제를 아래 한 줄의 문구로 독자 가슴에 새겨준다.
 

“그리움은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다.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한다.”

‘그리움을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다.’라는 부분에서, 단절과 고립감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그리움이라는 추상적인 언어는, 이전의 아름다웠던 추억과 행복의 세상으로 다시 연결하고자 희망하는 마음 상태다. 비단 현실적인 도서관 안과 밖의 연결만이 아니라, 리보와 타자, 독자와 작품 등 양자 사이의 벽 또는 상하좌우의 경계선을 없애고 소통 창구를 열고자 하는 실천 의지의 표현이다.

한 발짝 물러서서 우리 사는 시대를 보면, 각종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의 대홍수로 인해 함몰돼 버린 인간사의 면모들을 도처에서 목격한다. 따라서 ‘이타적 소통 또는 실천의 결핍’이라는 시대적 아이러니 앞에 당황해하는 우리 스스로를 본다.

작가는 동화 『리보와 앤』을 통해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과, 소통을 위한 실천 의지를 요구하고 있다. 리보와 도현이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소통하려는 것처럼, 우리는 타자와의 소통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그리움은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이다.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한다.” 이 한 줄 문장이야말로 소통과 교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작가의 나직하면서도 절박한 시대적 명제임을 새겨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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