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7 09:10 (토)
“형무소에서 면회오라는 전보 받고 갔더니 이미 숨진 남편”
“형무소에서 면회오라는 전보 받고 갔더니 이미 숨진 남편”
  • 홍석준 기자
  • 승인 2023.06.13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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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수형인 직권재심, 내란죄 19명‧간첩죄 41명 등 60명 모두 무죄
“연도 날려주고 팽이도 만들어주던 형이었는데…”, 연좌제 성토 발언도
지난해 4월 2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희생자 가족을 찾은 유족들이 각명비 앞에 두고 간 국화꽃이 놓여있다. /사진=미디어제주 자료사진
지난해 4월 2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 희생자 가족을 찾은 유족들이 각명비 앞에 두고 간 국화꽃이 놓여있다. /미디어제주 자료사진

[미디어제주 홍석준 기자] 제주4.3 당시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가 행방불명됐거나 수감생활 중에 숨진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 판결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제주지방법원 형사제4-2부(재판장 강건 부장판사)는 13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각 30명씩 60명에 대한 직권재심을 진행,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10여 차례의 군법회의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억울한 수감생활을 했던 수형인 희생자들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법정에는 이전 재심 때와 마찬가지로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행방불명된 수형인의 유족들이 망인을 대신해 피고인석에 앉아있었다.

검찰과 변호인측의 의견 진술이 끝나고 유족들의 얘기를 듣는 순서가 되자 유족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망인 송창립씨의 조카 송상보씨는 “할머니가 1898년생인데 2000년에 돌아가는데 그 때까지도 4.3 당시 행방불명된 작은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대신에 생신 때마다 차례를 지내왔다”고 가족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어 그는 “아들이 어디에선가 살아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는데, 한 세기를 더 살다 가시며면서도 작은아버지를 못 보고 돌아가신게 두고 두고 한이 되셨던 것 같다. 지금은 비석도 세우고 동생이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이런 비극적인 일이 현대사회에서 일어난 게 아쉽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망인 홍순병씨의 동생 홍사원씨는 “연도 날려주고 팽이도 만들어줬던 형이었는데 무슨 연유로 끌려가 감옥살이를 해야 했는지 억울하게 생각해 왔다”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도 10년 전까지만 해도 ‘형이 살아있을 거다’ 생각하면서 제사도 지내지 않고 생일에 제삿상을 마련했고, 저도 동생이지만 연좌제 때문에 뭐라고 해보려고 해도 그 연좌제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억울했다”고 가슴 속에 묻어둔 얘기를 꺼냈다.

망인 고형관씨의 아들 고병용씨도 “아버지가 30대에 광령마을 구장을 하셨는데,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에 대해 ‘요망진 분이셨지만 겨우 초등학교를 나오셨다’는 애기를 했었다”면서 “그런데 둘째가 공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서 걸려 입학도 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했다.

망인 김홍영씨의 딸 정자씨와 함께 법정에 온 정자씨의 이모 김옥녀씨(89세)는 망인의 아내인 자신의 언니가 직접 형무소까지 찾아가 남편의 시신을 거둬와야 했던 기막힌 사연을 털어놨다.

김씨의 언니는 부산형무소에서 면회 오라는 전보를 받고 부산에 갔는데, 정작 형무소 앞에 가서는 문지기한테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언니는 형무소 앞에서 사흘을 기다린 끝에 관도 쓰지 않고 파묻었던 남편의 시신을 찾았고, 영도까지 가서 관을 구한 후에도 관에서 물이 나올 것을 염려해서 다시 양철판을 관에 둘러 꽁꽁 싸맨 채로 화물선에 관을 싣고 제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김씨는 <미디어제주>와 만난 자리에서 “언니는 얼마 전 98세까지 살고도 이런 날을 보지 못하고 멀리 갔는데, 지금이라도 이렇게 명예 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고맙다”고 재판부에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망인 김씨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이 선고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부산형무소로 이감돼 수감생활을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10월 22일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날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고 75년간 이어져온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 수형인은 모두 60명. 이 중에는 구형법 77조 위반으로 ‘내란죄’ 누명을 쓴 수형인이 19명, 국방경비법 32조 및 33조 위반으로 ‘간첩’ 누명을 쓴 수형인이 41명이었다.

당사자인 수형인들은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유족들이 망인들을 대신해 ‘이제야 무거운 짐을 벗게 된 것 같다’고 홀가분한 마음을 전하는 법정 안은 유족들 뿐만 아니라 판사와 검사, 변호인까지 모두 환한 웃음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도 서로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듯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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