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2-12-07 18:03 (수)
고사리 장마
고사리 장마
  • 정경임
  • 승인 2022.04.29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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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Happy Song] 제10화

얼마 전 후배 일행이 2주간 제주살이를 한다며 제주에 왔다. 후배 일행에게 고사리 체험을 시켜주겠다고 당당히 제안했다. 그리하여 들판 입구에서 만났다. 그들에게 진드기 약을 뿌리라고 했더니, 기겁을 한다.

“진드기가 있어요?”

“어머나, 지금이 진드기가 활동할 때인걸요?”

마침 선배들이 놓고 간 장화 3켤레가 있어 주었더니, 아주 좋아라 한다. 들판 입구에서부터 고사리 교육을 시작했다. 고사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 정도 길이로 끊어야 하는지, 이파리가 세 갈래로 활짝 핀 것은 꺾지 말라고, 이파리가 3갈래로 펼쳐지지 않고 몽글몽글할 때는 꺾은 다음 양옆 두 갈래는 떼어내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예쁜 고사리와 아름다운 고사리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후배 일행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일요일에 비가 내려서인지, 아니면 평일이어서인지 들판 입구에서부터 고사리가 여기저기 쑥쑥 올라와 있었다. 키 큰 고사리가 많아 손쉽게 고사리 체험활동이 되었다. 무엇보다 후배 부인이 ‘아름다운’ 고사리를 여러 번 발견해 오히려 필자가 부러워할 정도였다.

들판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고사리. 정경임
들판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고사리. ⓒ정경임

# 산에 들에 꽃처럼 피어나는 제주도민의 정체는?

제주에는 ‘고사리 장마’라는 제주만의 언어가 있다. 3월부터 성질이 급한 고사리가 삐죽삐죽 올라오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올라오는 시기는 4월이다. 수분을 잔뜩 흡수한 고사리가 쭉쭉 올라온 것을 보면 신기할 만큼 아름답다. 이렇게 멋진 고사리의 성장을 위해 제주의 4월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일명 ‘고사리 장마’다. 장마처럼 비가 많이 오진 않지만 안개가 많이 끼고 찌푸린 날이 많다. 그때 고사리가 무럭무럭 자란다. 그런데 올해 고사리 장마는 더디게 왔다. 게다가 밤중에 남몰래 찾아온다. 아침에 바깥을 내다보면 바닥은 젖어 있는데 하늘은 화창하다. 그러니 고사리 장마가 시작되었는지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서귀포 도로는 햇빛이 쏟아져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데, 들판에 가면 누런 억새잎이 촉촉하다. 4월에는 고사리를 채취하느라 많은 제주도민들이 산에 들에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4월 고사리 장마 때 발견하는 고사리는 아기를 닮았다. 보들보들 솜털이며 나긋나긋 고개 숙인 모습이며 보드라운 몸짓까지. 이번 주말에 만날 고사리들이 기다려진다.
 

# 무덤가 고사리

제주에서 5월 무덤 봉분은 고사리로 뒤덮여 있다. 넓게 펼쳐진 고사리 잎이 무덤에 그늘을 드리운다. 너른 들판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또 다른 무덤이 나타난다. 들판 한가운데 세워진 무덤은 고사리꾼의 낚시터나 다름없다. 차마 무덤의 담을 넘어 들어가지 못하지만, 물론 용기(?) 있는 사내들은 무덤에 올라가 고사리를 꺾기도 한다. 대부분의 아낙네들은 무덤가를 빙 돌아가며 고사리를 꺾는다. 한 무덤가를 두세 번 돌아도 계속 고사리가 보이니, 마치 고사리가 “이번에도 나를 놓쳤지? 언제나 나를 발견할 거야?”라며 놀리는 듯하기도 하다. 그렇게 여러 번 한 무덤가를 돌고 나면 어떨 때는 배낭의 절반이 찰 만큼 꽤 많이 수확하기도 한다.

후배 일행과 함께한 고사리 체험활동. 정경임
후배 일행과 함께한 고사리 체험활동. ⓒ정경임

# 고사리를 따라 걷다 보면

화창한 날에는 고사리 수확에만 열을 올리다가도 구름이 잔뜩 낀 어둑어둑한 날에 무덤가를 돌면 어디선가 찬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루쉰의 <아Q정전>에 실린 ‘약’이란 소설에는 폐병에 걸린 아들을 낫게 하려고 인육을 넣어 만든 만두를 먹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왜 하필 그 작품이 떠올랐을까? 아마도 무덤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고사리 줄기를 따라 스며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들판에 있는 그 수많은 무덤들은 한두 해 전에 세운 것이 아니라 세월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무덤들이다. 한편 너른 들판 가에 죽 자라 있는 억새들을 헤치고 들어가면 숲처럼 어둑어둑한 공간이 나온다. 그곳에는 무덤가가 아니어도 여기저기 키가 자란 고사리들이 많다. 그런데 그곳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 5월에는 뱀도 있고, 인적이 드물어 겁도 나고, 또 무덤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곳에서 만난 무덤은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무덤에 비해 훨씬 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을 자칫 잘못 들어서면 고사리고 뭐고 줄행랑을 치느라 다리가 더 분주해진다.
 

# 어젯밤에도, 그젯밤에도 비는 내렸다

제주 4월에는 밤마다 살며시 비가 내린다. 어젯밤에도, 그젯밤에도 비가 내렸고, 또 5월 어느 날 밤에도 비가 살짝궁 내릴 것이다. 제주의 대기를 맑게 해주는 동시에 산에, 들에 자라는 고사리를 쑥쑥 자라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4월 제주에 내리는 비를 고사리 장마라 부르지만, 5월에도 고사리 장마는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4월이 지나 5월에도 고사리는 억새 사이에서, 찔레 덩굴 속에서, 그리고 햇빛이 쏟아지는 들판 한가운데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발견한 둥글레. 정경임
들판에서 발견한 둥글레. ⓒ정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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