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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근, 현대 주거건축의 공간사 시론 -3
제주 근, 현대 주거건축의 공간사 시론 -3
  • 미디어제주
  • 승인 2021.06.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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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건축 [2021년 2월호] 스페셜 시리즈
김석윤(제주특별자치도건축사회 제17대 회장/건축사사무소 김건축)
건축가 김석윤.
건축가 김석윤.

# 19세기 안·밖거리집의 변화

한국의 전통주거건축 계통에서 제주도형을 안·밖거리집이라 호칭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 특성에 대하여서도 공감된 바의 연구 성과가 다수이다. 이 주거건축은 한 가족 안에서 부와 자세대별로 독립경제 단위를 경영하고 취사를 분리하는 제주도의 고유한 가족제도와 관련으로 그 성립인과를 설명한다. 내용이 그러하고 형식에서 고유하다.

그러나 문화현상은 머물러 있지 않고 생동하는 것이 속성이다. 주거문화는 변화추이가 더디지만 시대와 사회적 구성에 따라 계층화되기도 하고 새롭게 등장하기도 한다. 변화의 주요인자는 주거이념이 먼저이고 사회환경과 공법 등의 변화가 이차적 요인이다.

제주사회도 19세기에 들어 큰 변혁을 거쳤다. 이 사회변화와 주거형식이 어떻게 교섭하고 어떻게 달라져왔는가가 주거문화사의 주제이다. 건축사에서 시대의 구분은 시각에 따라 차이를 보이겠지만 우리 주거건축이 겪는 전통에서 근대로 이전은 서구의 근대의 혁명적 격렬함과 같지는 않다고 본다.

따라서 서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큰 변화에 주목하기보다는 우리의 전통과 근대를 통시하려하고 영속성을 지닌 문화인자이거나 자생적 근대성향을 추적하는 것이 유의미하다. 문화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거건축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는 형태요소인 구조의 변화와 재료, 공법의 변화도 살펴야 할 부분이지만 공간의 조직체계를 살피는 것이 건축의 본질에 근접한 학습태도임즉하다. 근대 이후 건축의 주제는 이미 형태가 아니고 공간으로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 공간체계의 변화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인식장치인 경계 요소에 내재된 질서요소들로서 형태, 크기, 구성상태와 질감과 색상, 광선 등 시각계의 우세 요소 외에도 소리와 온,냉감이나 촉감에 심지어는 냄새까지 오감으로 감지되는 공간인식 여하에 따르는 것이다. 공간의 차별성은 이 오감인식과 감응의 여하에 달렸고 이 공간 체험은 시간적인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계시적 성격이다. 그러므로 건축 공간은 ‘공간체계’로 이해해야 함이 옳다. 제주도 전통주거의 공간 체계가 시대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하는 의문은 지금까지의 전통 주거 건축에 대한 연구가 머물러 있는 형식분류의 단계를 넘어 건축공간론적 탐색에 이르고자 하는 의도이다.

1) 이중 대문

공간체계의 변화는 단조로움에서 다양성과 다층화로, 조야한 형식에서 정제된 기법으로 변화가 그 내용이다. 이중대문의 출현은 제주도 전통주거의 변화 중에 주목되는 현상이다. 문은 원시주거 이래로 문(門), 주(主), 조(竈)의 양택삼요로 간주되어 그 기능과 상징성을 부여하여 왔다. 이것은 중국 예서의 ‘궁실조’에 ‘오문삼조(五門三朝), 삼문삼조(三門三朝)’라는 신분에 따른 옛 제도에서도 그 근거가 확인되는 바다.

제주 민가의 대문은 문호가 없는 예가 많은 반면에 간소한 평대문이거나 밖거리의 한 칸에 설치되는 경우가 통상적이지만 근세에 이르러 평대문을 지나 문간채에 한 칸에 다시 문을 설치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제주시 삼도동의 강씨가와 화북동 김씨가 외에 복수의 사례들이 조사되었다. 밖의 것을 대문이라 하고 안쪽의 것은 이문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이중으로 문이 설치되는 것은 주공간인에 대한 경계 요소를 중첩시켜서 주공간에 위계성과 중심성을 강조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대문이 반복 시설되어 공간체계에 절점이 분명해졌으므로 결과적으로 19세기 제주 민가의 공간체계는 다양성과 함께 절점을 강조하여 공간의 의사표현이 한층 분명해진다. 공간체계의 변화는 단조로움에서 다양성과 다층화로, 조야한 형식에서 정제된 기법으로 변화가 그 내용인 것이다.

2) 머릿방

전통 건축계획론에 해당하는 양택서 중에 양택요결(陽宅要訣)의 ‘삼두방 서사길택도(三頭房 西四吉宅圖)’와 ‘삼두방 동사길택도(三頭房 東四吉宅圖)’에는 머리방과 고방(高房)이라는 방 명칭들을 쓰고 있다. 집의 끝머리에 위치한 방에 붙인 명칭이다. 이렇게 대청을 중심으로 해서 한쪽 끝에 배치된 방을 ‘머릿방’ 혹은 ‘머리마루’라고 호칭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제주 민가는 측면으로 출입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에 지은 중대형 민가에서는 밖거리의 측면에 툇마루를 두고 이곳으로 출입한다. 즉 마당을 거쳐서 상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마당에 들어서기 앞서 머리방으로 바로 출입하는 새 형식이 나타난다. 성읍의 남문 옆 고씨가옥과 삼양동 강씨가, 삼도동 고씨가 등 다수의 사례들이 조사되어 있다. 이 형식은 조선시대 반가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인 사랑채의 개념이 이입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 권3 사랑조(舍廊條)에는 ‘舍廊者 堂側之橫廡...’ 하여서 사랑(舍廊)은 ‘중문에 가로놓여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를 말한다’고 하여 그 용도와 형상을 짐작하겠는데, 반가의 전형은 사랑을 정침과 중장으로 격하여 두는 것이나 ‘택보요전’에는 ‘中小建 則 中墻未隔...’ 하여서 ‘큰 집이 아니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고 있으니 제주의 경우는 후자를 적용한 풀이로 보인다.

머릿방, 머리마루의 출현은 안·밖거리 대향 배치 구성에 변화를 가져와서 이전시대까지 제주 민가의 특성으로 지적되던 구심적 공간구성 체계가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1840년에 제주에 유배되었던 추사선생이 적거에 대하여 서간에 쓰기를 ‘堗則爲一間 南向有眉退... 內舍則使主人 依旧人處 只槪外舍割半分界 足以容接’하고 있다. 여기서 미퇴(眉退)란 머리퇴를 지칭한 것이고 밖거리를 반분한 ‘머릿방을 거처로 쓴다’ 하고 있다. 이 적거의 주인은 교리 신분이라 하였으니 하급관리들의 주거도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머릿방은 제주전통주거의 근세적 변화요소로 지적할만하다.

3) 별동정지

19세기 초, 중기 제주도의 대형 민가에서 보이는 특성으로 별동정지 형식이 있다. 민택삼요(民宅三要)에서 논하는 주거의 기본요소는 문, 주, 조(門, 主, 竈)이다. 이 중에 조리가 이루어지는 조(부엌)가 별동으로 떨어져 있는 형식을 말하는데, 이 특징은 이 시대 완결형 민가에서 보편화된 현상이다.

특히 제주목안 지역에 분포가 많았다. 이 특징의 배경을 쿠로시오 문화유형으로 보고 류큐(琉球)와 일본 규슈지방의 민가에서 주동(主棟)과 가마무네(釜棟)로 이루어진 소위 이동조(二棟造)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일본 규슈지역의 경우는 별동에서부터 연접으로 이행 과정을 가진데 반해서 제주 민가는 원형이 본채에 부엌이 연접된 형식에서 주거의 규모가 확대되는 시기에 분동하고 있어 전이의 순차가 다르다.

여기에서 주거형식은 선택의 근저인 이념의 동질성이 형성되고 나서 새 형식을 발생시킨다는 주거문화 전개의 법칙성을 되새겨 보게 된다. 따르건데 별동정지 형식은 제주도 가족제도의 해체를 증거하는 주거형식으로 적시될 수 있다. 이 배경으로 제주사회의 경제발전과 현감, 판관급의 토반층이 형성됨과 양택요결, 민택삼요 등 양택서에 의거한 건축관습 등이 연관될 수 있다. 별동정지형식 주거는 일본 서남부도서지역에 분포하는 이동조의 문화요소가 아니라 주거 이념의 변화에 따른 선택으로 결론함이 옳다.

4) 내외담장

내외벽은 반도지역의 상류주거에도 드물게 보인다. 남녀별의 성리학적 규범에 따라 문간에 내외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여 문을 열고 바로 안마당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차단시키는 장치로 면벽이라고도 한다

제주 민가의 경우는 공간의 모서리 부분에 일정 구간에만 설치하여 시선을 차단하거나 영역을 은유적으로 구획하는데 돌담이므로 벽이라 하기보다 담장의 성격이다. 삼도동(무근성)의 고씨가, 조천리의 金(萬戶)家, 金(旌義)家, 성읍의 高氏家, 곽지리 秦助防將家, 朝天 金씨(평창군수)家에 이 사례가 확인되었다. 이 장치는 공간을 완전히 가로막아 분리시키지 않고 모서리의 일정구간만을 담을 쌓아서 공간의 윤곽을 명확하게 하고 공간분절과 동시에 시선을 차단할 수 있다.

출입 동선은 적극적으로 구속하지 않고 공간성격을 손상시키지 않는 세련된 조영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내외담장(어깨담)은 19세기 제주 주거건축의 조형요소 중 매우 독자성을 지닌 공간 장치라 하겠다. 성리학적 예제의 격식과 실리를 적절하게 융화시키고 있어 그러하다.

5) 머릿돌

머릿방은 주로 접객과 학습으로 쓰였다. 시회(詩會)와 관풍(觀風)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19세기 말 제주 적객이었던 운양(雲養)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에 적소인 제주교동 김판관가를 이르기를 ‘第舍寬敞華好 几案潔淨 又有花園 散步之處 ...’ 하여서 당시 제주사회 상류주거의 면모를 추정함이 가능한데, ‘산보할만한 화원이 있다’함이 이채롭다. 이렇게 머릿방의 앞에 조성한 정원이 머릿뜰이다.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의 섬용지에 ‘書齊南北庭下 宜砌石爲階’로 서재 가까이는 석계(石階)를 쌓아 꽃나무와 분경을 연출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니 이런 전적의 보급과 학습효과로 근세형 주거의 새로운 흐름인 정서 공간이 출현하고 있다.

제주사회에 유배객과 지방 토착사족들 사이에 시회가 결성되어 문인문화가 전래된 것도 이 시기의 사실로서 이에 따라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른 주거공간의 출현은 당연하였다.

1928년에 제주를 답사하고 제주건축을 쓴 일본의 건축사학자 후지시마(騰島亥次郞)의 글에 삼도동(무근성) 고씨저택의 정원사진이 실려있고 조천리 웃동네 金氏(海渼)家와 禾北洞 金氏家에 이 사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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