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19 18:08 (화)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해녀를 들려주세요”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해녀를 들려주세요”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0.07.28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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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책가방] <12> 고희영의 ‘엄마는 해녀입니다’

다큐멘터리 물숨이 그림책으로 되살아나

에바 알머슨의 따뜻한 그림 더해져 친근

해녀들의 삶을 어린이 시각에 맞게 잘 전달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아침에 꼭 봐야 하는 게 있다. 바다다. 다행히 집에서 보인다. 아주 짙푸른 색을 띠는 날도 있고, 하얀 거품을 드리우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은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바다는 매일 다른 색을 한다. 그 바다는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 뭐랄까. 늘 다른 모습을 하고 다가오는 꿈속의 여인? 마누라가 봤다간 한소리 듣겠다.

각설하고 넘어간다. 제주바다에 어떤 용왕이 사는지 알 순 없지만 그 용왕을 친구이면서, 혹은 물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바로 제주해녀이다. 해녀들은 용왕을 위해 굿을 한다. 친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는 의미에서 굿을 해주고, 물주로 여기는 해녀들은 “바닷속 물건을 많이 잡히게 해달라”는 염원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동티가 난다. 바다를 잘 달래줘야 하기에.

해녀는 우리처럼 바다를 바라만 보진 않는다. 그들은 몸으로 느낀다. 제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에게 해녀가 무척 독특하게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소재로서도 제격이다.

해녀는 흔히 아픔으로 소개된다. 예전엔 대부분 그랬다. 조선시대 제주를 들른 유학자들의 눈에 해녀는 슬프고 괴롭게 비친다. 기건 목사는 해녀들의 물질이 애처롭게 보였는지 전복을 자신의 밥상에 올리지 말라고 했고, 홍윤애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조정철은 자신의 저서인 <정헌영해처감록>에 고된 해녀의 일상을 시구로 남기기도 했다. 그때는 사실 그랬으니까.

뱃물질을 마치고 사계포구로 들어오는 해녀들. 망사리에 물건을 가득 담았다. 미디어제주
뱃물질을 마치고 사계포구로 들어오는 해녀들. 망사리에 물건을 가득 담았다. ⓒ미디어제주

현대에 와서는 다른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상품으로 등장한다. 여성으로서의 상품이었다. 박시춘이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에 작곡한 ‘삼다도소식’은 해녀를 사랑 이야기로 만들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읽힌다. 그런데 박시춘은 알고 보면 ‘아들의 혈서’ 등을 작곡하며 조선인을 전쟁터로 내몬 친일 인사여서 썩 반갑진 않다. 어쨌거나 제주도가 관광의 섬으로 부상하면서 해녀 역시 상품으로 비쳤다.

해녀문화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유산인데, 그걸 제대로 보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제주관광을 소개하는 엽서나 책자엔 해녀문화는 없고, 상품가치를 지닌 여성만 보였다. 물옷을 입은 제주여성은 물질을 하는 해녀가 아니라, 제주에 오라고 유혹하는 여성이었다. 엽서에 등장하는 제주여성 이미지는 그랬다. 그러지 못한 여성이나, 혹은 해녀는 억센 ‘아지망’에 불과했다. 바닷가에서 소리나 지르는, 그런 여성의 이미지로서 말이다.

격세지감이다. 지금의 제주해녀를 보면 시대가 읽힌다. 제주해녀를 문화로 제대로 바라보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문화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숫자만 나열해본다. 1만4143명과 3820명. 차이가 크다. 앞 숫자는 1970년 물질하는 해녀의 숫자이며, 뒤에 나온 3820명은 2019년 현재 직접 바다에 나가는 해녀들이다. 70대 이상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현실인데, 20년 뒤에는 몇 명이나 있으려나.

21세기는 문화가 상품이다. 제주해녀는 그런 조류에 힘입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기자도 표시는 나지 않지만 일조를 했다. 전임 직장인 <제민일보> 창간 15주년 기념으로 제주해녀 기획을 시작했다. 2005년이었다. 제주해녀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만들자는 거대한 목표를 세웠다. 취재반장이던 기자는 일본까지 가서 물질을 하는 제주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동해안에서부터 남해안, 서해안의 해녀를 만났다. 제주도를 한바퀴 돌며 바다밭도 뒤졌다. 바다밭 지도를 그린다며 일러스트를 독학하기도 했다.

지금은 해녀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래도 줄이 닿는 이들은 있다. 해녀가 아닌, 해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몇 안다. 그중에 다큐멘터리 ‘물숨’을 만든 고희영 감독을 만나러 가보자. 이 코너가 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이기에 그가 글을 쓴 그림책 <엄마는 해녀입니다>를 들여다본다.

<엄마는 해녀입니다>는 ‘물숨’의 어린이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물숨’을 만든 고희영 감독은 제주해녀를 세계화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걸 실천한 결과물이 <엄마는 해녀입니다>이다. 이 그림책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기자가 고희영 감독을 만나던 2016년만 하더라도 이 그림책은 나오지 않을 때였다. 이듬해 그림책은 나왔고, 날개를 단 듯 사람들의 손에 하나씩 쥐어졌다.

엄마는 잠수 대장이라서 돌고래처럼 헤엄을 잘도 칩니다.
엄마는 건지기 대장이라서 물고기를 잘도 건집니다.
엄마는 따기 대장이라서 전복을 잘도 땁니다.
엄마는 줍기 대장이라서 미역을 잘도 줍습니다.
엄마는 잡기 대장이라서 문어를 잘도 잡습니다.

- <엄마는 해녀입니다> 중에서

해녀는 타고날까? 이런 의문이 들곤 한다. 특별한 장비 없이 15m 이상의 깊은 물속도 들어간다. 숨을 꾹 참고, 물건을 잡으면 물 위로 솟아오른다. 그때 “호오이~ 호오이~” 하며 숨을 뱉는다. 숨비소리이다. 아주 맑은 새소리처럼 들리기에 사람들은 숨비소리를 낭만적으로 바라보지만, 실제는 살아있다는 신호이다.

<엄마는 해녀입니다>는 물질하는 할머니가 있고, 주인공 엄마도 물질하는 제주해녀이다. 그림책에 나오는 엄마는 처음부터 물질을 하지 않았다. 물질을 물려주고 싶은 엄마는 없다. 엄마처럼 물질을 하려는 딸도 없다. 물질은 기피대상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도시로 나가서 살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은데 물질이라니.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보자. 왜 물질은 여성만 해야 하나. 물질은 여성에게 부여된 특허가 아님에도 여성의 몫이 되었다. 물론 ‘해남’으로 부르곤 하는 물질을 하는 남성도 있었지만 그건 예외였다. 왜 여성인가? 우린 이런 의문도 갖질 않았다. 그런 의문을 가진 이들은 제주여성 스스로였다. 물질을 하는 게 마냥 싫었다. 제주바다를 지키는 공동체로 느끼기보다는, 그 공동체를 탈출하는 게 우선이었다.

<엄마는 해녀입니다>에 등장하는 엄마는 역시 물질을 기피했다. 자신의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 제주를 떴다. 바다는 지긋지긋한 존재였다. 그러다 바다가 불렀다. 바다의 소리가 엄마를 제주로 불렀다.

바다는 제주여성들에겐 숙명의 존재처럼 보인다. 아니, 물질을 하는 해녀들에겐 몸이나 마찬가지이다. 허리가 굽어도, 무릎이 아파도, 몸이 뻐근해도, 바다는 해녀를 반겨준다. 그런 몸을 이끌고 바다로 나간다. 바다에 들어가면 돈이 되는 건 분명하지만, 돈 때문에 바다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자칫 죽음이 밀려오곤 한다. 그래도 나서는 곳은 바다이다. 제주해녀들에게 바다는 달리 말할 존재가 못된다. 몸이 향하는 곳이 바다이며, 이끌리는 데로 가보면 거기에 바다가 있다.

힘이 있다고, 젊다고 최고의 해녀가 되진 않는다. <엄마는 해녀입니다>의 할머니 해녀와 엄마 해녀 중 으뜸은 할머니다. 할머니의 망사리는 늘 무겁다.

할머니는 엄마보다 키가 작습니다.
할머니는 엄마보다 손이 작습니다.
할머니는 엄마보다 눈이 어둡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할머니의 그물이 엄마의 그물보다 왜 만날 더 늘어져 있는 걸까요.
엄마의 두 젖보다 훨씬 처져 있는 할머니의 두 젖처럼 말이지요.

- <엄마는 해녀입니다> 중에서

다큐멘터리 ‘물숨’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희영 감독이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해녀 곁에서 밀착 취재를 하며 얻은 결과물이 ‘물숨’이었다. 숨비소리에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면, 물숨은 죽음을 말한다. 깊은 바다에 들어간 해녀들은 숨을 남겨놓아야 한다. 남은 숨이 있어야 바다 위로 오를 수 있다. 숨이 남아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분명 저 위 바다 표면은 아른거리는데, 숨을 쉬지 못해 바닷물을 마시게 된다. 그게 물숨이다. 물숨은 죽음이다. 바닷물을 들이키는 순간 삶과는 고별을 해야 한다.

그림책 <엄마는 해녀입니다>도 물숨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해녀 이야기를 담은 수많은 작품 가운데 물숨 이야기를 담은 건 많지 않다. 죽음과 관계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물숨을 몰라서인지는 모르겠다. 물숨을 제대로 설명하는 작품은 다큐멘터리 ‘물숨’과 <엄마는 해녀입니다>일테다.

늘 보던 이들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곤 한다. 고희영 감독이 ‘물숨’을 찍으면서 그런 경험을 해봤다. 다큐멘터리 촬영은 다 끝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할머니가 어느날 물숨을 마시고 돌아가시기도 했다. 해녀들에게 물숨은 언제든지 나타난다. 눈 앞에 보이는 물건을 잡으려다 변을 당하곤 한다. 물숨은 우리 인간에게 말한다. 욕심을 덜 내라고.

내일도 엄마는 바다로 나갈 것입니다.
내일도 할머니는 바다로 나갈 것입니다.
내일도 나는 바다로 나간 엄마와 할머니를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입니다
.
내일도 할머니는 잊지 않고 엄마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거라
.”

- <엄마는 해녀입니다> 중에서

<엄마는 해녀입니다>에 담긴 그림은 스페인 출신 화가인 에바 알머슨이 그렸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우연히 잡지속 해녀를 만났다. 해녀를 보지 못한 이들은 누구나 그렇듯, 에바 역시 사진속 해녀에 빠졌다. 고희영 감독을 만나며 해녀를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둘은 함께 <엄마는 해녀입니다>를 만들어냈다.

<엄마는 해녀입니다>에 나오는 그림은 따뜻하다. 포근한 해녀의 얼굴이 그림책 곳곳을 차지한다. 우도에서 만난 해녀들을 그렸기에 사실감이 있다. 기자는 아직 에바를 만난 적은 없다. 만나면 꼭 하나는 묻고 싶다. 그림 곳곳에 등장하는 ‘하트’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다. 왜 하트를 그렸고, 장면별로 색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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