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오브 맨>과 「지나가는 밤」
<칠드런 오브 맨>과 「지나가는 밤」
  • 최다의
  • 승인 2019.10.1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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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혹은 녹차 <9>

위로를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말이 없을 때가 있다. 상투적인 위로가 너만 힘든 줄 아느냐는 비난이 되는 일은 셀 수 없이 흔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손쉽게 말하는 것은 잔인한 무례가 된다. 똑같은 세계 속에 내던져졌어도 우리는 우리 각자의 좁은 시야에 갇힌 채 살아간다. 유사 이래 죽음을 맞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죽음은 모두 각자가 혼자 들어가야 하는 문이고, 홀로 타야 하는 나룻배이다. 고통을 존중하려고 하면 위로는 갈 곳을 잃는다. 나는 너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을 책임져줄 수도 없다는 현실을 자각할 때, 우리의 상투적인 언어에서 지킬 수 없는 허풍을 걷어내면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아주 사소해진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너의 곁에는 내가 있다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2006)과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에 수록된 단편 「지나가는 밤」(2017)은 비슷한 밝기의 무채색이다. 현실을 짓누르는 절망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고도 안개처럼 만연하다. <칠드런 오브 맨>이 묘사하는 불임, 난민 문제, 독재, 테러로 자멸해가는 세계 속의 런던은 2016년의 브렉시트를 비롯해 현대에 만연한 불안과 소름끼칠 정도로 닮아 있다. 흥행에 실패했던 이 영화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재조명을 받은 까닭은 상당부분 이러한 통찰력에 있을 것이다. 한때 아내와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난민 인권을 위해 싸우는 시위대의 선봉에 섰던 테오는 사랑하는 아들 딜런을 잃은 뒤 모든 희망을 놓는다. 아들을 잃고 아내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도 그는 언젠가 절망에 잠식되었을지도 모른다. 거리에서는 매일 같이 폭탄이 터지고, 수많은 난민들은 반인륜적인 대우 속에서 사살되고 추방된다. 전 세계에서 어떤 아이도 태어나지 않은지 20년이 되어간다. 고령화되어가는 사회에서 복지를 포기한 정부는 공공연히 안락사용 독약을 배포한다.

그런 삶 속에서 기적적으로 임신을 한 난민 소녀 ‘키’가 나타나고, 그녀를 이용하고 아이를 빼앗으려는 세력들 사이에서 테오는 키와 그녀의 아이를 안전하게 ‘인류 프로젝트’의 배로 데려다주라는 임무를 받는다. 절망 속에서 꺼질 듯이 휘청거리는 희망을 운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얼마나 가냘프고 허망한가. 드디어 난민들의 판자촌에서 키가 출산을 했을 때, 아기를 안은 그녀를 보고 놀라서 사격을 멈추고 성호를 그으며 물러나던 군인들이 다음 순간 다시 살육전을 이어가던 장면은 시의적이다. 아기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요셉을 비추듯 배경에서 흐르던 담담한 성가 같은 음악이 뚝 그치고 총격이 이어지던 순간의 찬물을 끼얹은 듯한 충격은 손꼽히는 연출의 백미이다.

「지나가는 밤」의 현실에 겹겹이 눌어붙은 절망은 너무도 가까운 가족의 시각에서 낱낱이 드러나기에 더 잔인하다. 부모를 잃은 두 자매는 서로밖에 의지할 상대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모진 말을 뱉으며 싸우고 등을 돌린다. 윤희는 주희의 자기파괴적인 무책임함을 견딜 수 없다. 학생 시절에 일탈을 하고, 준비 없이 덜컥 임신해서 무책임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학력도 경력도 볼품없이 끊겨버렸다. 윤희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주희의 철없는 웃음이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현실을 올곧게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현실의 끝에 견딜 만한 정착지가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뿐이다. 주희는 간신히 절망에서 눈을 돌리려는 자신을 억지로 주저앉혀 현실을 코앞에 들이대고야 마는, 한 줌의 위로도 허락해주지 않는 윤희에 의해 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낙관을 가장한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밑바닥의 두려움과 외로움마저 까발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자신을 망치고 마는 위악적인 선택들과, 최선을 다해 이를 악물고 선택을 했을 때조차 더 나은 삶이 없었다는 허무한 절망이 그곳에 있다. 죄지은 게 없어도 삶은 가장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크게 싸우고 헤어졌던 두 자매는 같은 곳에서 만난다. 어두운 바닥에 누워 속살거리는 대화는 덤덤하고도 나직하다.

“기도가 통하는 세상이면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겠지. 정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간절히 살기를 바란 게 아니란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주희는 가만히 숨을 쉬었다. 윤희의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윤희는 팔에 얼굴을 받치고 누워 있는 주희를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그런데도, 가끔은 사람들이 우리 엄마 죽지 말라고 빌어준 거, 그 기도들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 기도들은 기도 나름대로 계속 자기 길을 가는 거지, 세상을 벗어나서. 그게 어디든 그냥 자기들끼리 가는 거지. 그것도 아니라면…….”

(최은영, 「지나가는 밤」, 『내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 2018, p.100.)

간절한 기도들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딜런을 살리고 싶었던 테오의 기도가 제 아이를 살리고 싶어하는 키의 기도보다 덜 간절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딜런은 죽었고, 키와 테오를 대가 없이 도와주었던 집시들도, 신념을 위해 키의 아이를 빼앗으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었던 반정부 세력들도 죽는다. 테오와 키, 키의 딸이 나룻배를 타고 떠나올 때 그들이 떠나온 도시는 안개 너머에서 화염에 휩싸이는 것이 보인다. 그 모든 기도가 간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불행한 결혼과 이혼 끝에 아이를 빼앗기고,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주희에게 윤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윤희는 동생의 고단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그저 하룻밤 따뜻한 단잠을 자기를 바란다.

도시를 떠나온 나룻배 위에서 테오가 총상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 키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갓 태어난 딸의 이름을 딜런으로 짓겠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딜런을 잃은 테오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짧은 말에 담긴 의미들을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키가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테오의 죽은 아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그를 위로하기를 바란다는 것일 뿐이다. 테오는 그 말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 새도 없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너무 짧고, 너무 허약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전부이다. 세상의 고단함 속에서 정직한 위로는 그것뿐이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기도가 말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곁에는 기도하는 내가 있다고.

팝콘 혹은 녹차

최다의 칼럼니스트

- 제주대학교 국문학 석사
- 동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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