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에 당당하게 맞섰다가 제주로 유배
광해군에 당당하게 맞섰다가 제주로 유배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9.08.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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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13> 동계 정온

지난 시간에 설명한 청음 김상헌은 척화파의 거두로, 교과서에도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이에 비해 이번에 다룰 동계 정온은 김상헌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는 귤림서원이 세워지고 나서 김상헌과 함께 배향된다. 이로써 충암 김정에 이어, 3현이 모셔진다.

정온은 33세였던 1601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를 통해 관리로 등용된다. 그때 나이가 41세였으니 다른 오현의 인물에 비해서는 과거시험 합격이 늦은 편이다. 앞서 소개한 충암 김정은 22세에, 규암 송인수는 23세에, 청음 김상헌은 27세에 과거에 합격한 인물이었다.

어쨌든 40대에 이르러 벼슬을 하게 된 정온은 영창대군과 관련된 일에 휘말리고 만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아들이다. 선조에겐 모두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영창대군이 유일한 적자였다. 광해군을 비롯한 나머지는 후궁이 난 아들이었다.

어쩌면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광해군은 후궁의 아들이라는 약점을 늘 안고 살았다. 만일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됐을지도 의문이다.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임진왜란 때 종횡무진한 덕분에 세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정식 왕후로 맞아들인다. 1602년 왕후 자리에 오른 인목대비는 4년 후인 1606년 영창대군을 낳는다. 선조 나이 55세였다. 선조가 그렇게 바라던 적자의 탄생이었고, 선조는 적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려는 기미를 보인다. 일부 신하들도 선조의 속내를 파악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이어서 명나라의 승낙도 받지 못했다며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었다. 때문에 광해군 입장에서 영창대군은 거슬리는 존재였다.

선조는 1608년 병이 악화되자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광해군에게 임금자리를 넘긴다는 교서를 내린다. 문제는 그 교서를 받아든 영의정 유영경이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 숨겨버린다. 대북파에 의해 그 문제가 발각되지만 유영경의 행동에 대해 어떤 조처를 내릴 것인지에 대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채 선조는 운명을 달리한다. 왕위 계승 문제는 인목대비가 쥐게 됐고,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요구한다. 어찌보면 선택의 순간이었다.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 교지로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이런 사정을 지켜본 광해군은 자신의 자리를 더 지킬 수밖에 없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을 보낸다. 그때가 광해군 5년(1613)이며, 영창대군은 이듬해 2월에 죽음을 맞는다. 영창대군 나이는 불과 9세였다. 강화부사로 있던 정항이라는 인물이 영창대군을 살해한 터였다. 마침 동계 정온은 부사직이라는 직위에 있을 때인데, 그걸 참지 못하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정온이 올린 상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현단에 있는 동계 정온 시비(詩碑). 미디어제주
오현단에 있는 동계 정온 시비(詩碑). ⓒ미디어제주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시키는 것이 매우 엄한 국법입니다. 죄없는 평범한 사람을 죽인 자도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데 하물며 우리 임금의 동생을 죽인 자는 더 그렇습니다. 정항을 죽이지 않는다면, 임금께서는 선왕의 사당에 들 면목이 없으리라 여깁니다.” (광해군일기 75권, 광해 6년(1614) 2월 21일 계묘 3번째 기사)

정온의 상소를 본 광해군은 노발대발한다. 그 상소를 받아준 관리는 파직을 당하고, 정온의 관직 역시 박탈된다. 광해군은 벌이 너무 약하다며 자신이 직접 문책을 하게 된다. 다행히 정온은 죽지 않는데,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그 상소 때문에 정온은 제주도 대정에 유배를 오게 된다. 1614년 유배를 왔으니, 그의 나이 46세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건 1623년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광해군은 물러났고, 정온의 유배가 풀린 것이다. 정온은 인조 때 주요 관직을 지내는데, 반대로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를 오는 상반된 처지가 된다.

정온은 김상헌처럼 인조 당시의 인물이어서 병자호란을 겪게 된다. 병자호란 때 정온은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고 주창했고,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일이 일어난 뒤 무슨 면목으로 고향에 가느냐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가 죽은 건 1641년 6월이었고, 그의 나이 83세였다. 그해 7월엔 제주에 유배를 와 있던 광해군이 생을 마감한다. 정온과 광해군은 한날 한시에 마주한 인물이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한 사람은 제주에서 살아나갔고, 한 사람은 제주에서 죽을지 누가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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